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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화 〉21. 백야(白夜)의 플로헤타 (21/67)



〈 21화 〉21. 백야(白夜)의 플로헤타

21. 백야(白夜)의 플로헤타 ]



단순하지만 명료한 직관력이 이치를 통과하고, 거짓말같이 맞아 떨어지는 타이밍은 일순의 기세를 역전한다. 마벨의 전략이 치열한  싸움이라면, 페르티안의 전략은 직관력과 타이밍이었다.


백병전 끝에 언덕에서 프러겔 군을 몰아낸 제국군은 그야말로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다. 무질서하게 흩어져 도망가는 그들의 모습에 언덕을 넘은 대다수의 제국군은 이번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시야에 가려져 있던 언덕 아래에는 수많은 프러겔 전열보병들이 내려오는 제국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덕을 마주하며 긴 라인배틀을 형성한 그들은 완벽한 사각 속에 숨어 적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무질서하게 도망친다 생각했던 프러겔 보병들은 라인을 형성한 아군들 사이사이로 도망치듯 뒤로 빠졌고, 그와 반대로 추격과 함께 언덕 아래를 뛰어 내려오던 제국군은 날카로운 목책에 막혀 돌격하지도, 비어진 플린트 락을 들어 쏘지도 못한 채 갇히고 말았다.

“지금이다! 모두 발포하라!!”
“발포!!”
파바바바방 -


폰의 발포명령과 함께 쏘아진 프러겔 군의 일제사격은 안개를 연상시킬 정도로 매캐한 연기와 함께 맹렬히 발사되었고, 이에 제국군의 대다수가 추수가 끝난 볏짚마냥 힘없이 땅 아래로 쓰러져 널브러졌다.

“2열!!”
철컥 -
“발포!!”
파바바바바방 -


장전속도가 늦다면, 적의 장전속도를 맞출 효율을 찾으면 되는 법. 페르티안은 제국군에 비해 훈련도가 떨어지는 자신의 보병들을 3열로 세워 순차적으로 플린트 락을 쏘게 했다.

 몸이 인정한 천재성이었다. 어려운 것을 쉽게 풀어내는 그의 단순명료하면서도 탁월한 임기응변은 확실히 특출난 재능이었다.

‘이 새낀 타고났어..’

감탄도 잠시, 무섭게 쏘아대는 플린트 락에 놀라 귀를 막으며 눈을 질끈 감는 녀석을 보자니, 앞서  말을 갑자기 취소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나는 ‘샤벨리아, 귀를 막았는데 소리가 크게 들려, 어떡하지?’하며 묻는 녀석에게 화사한 미소와 함께 친절하게 손을 접으며 녀석에게 내 의사를 전달해 주었다.


‘뒤질래?’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건지 녀석은 귀를 막은 모습으로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하루라도 내게 맞지 않으면 살  없는 몸이 되었는지, 철없는 녀석의 관자놀이를 양 주먹으로 돌려주며  교육하던 그 때, 페리츠의 포병대가 증원되어 언덕위로 올라오던 적의 라인 요소에 마력탄을 떨궈주며 허리를 초토화시키기 시작했다.


“얼-”


제법 훌륭한 녀석의 지휘에 내가 감탄하며 쳐다보자, 내게 주먹돌림을 당하며 몸을 움츠렸던 녀석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 나도! 나도 좀 보면 안 돼? 제법 빵빵 터지는 거 같은데..”

이봐요, 지금 불꽃놀이 오셨어요? 천진난만하게 날 바라보며 애원하는 녀석의 얼굴을 보자 또다시 울컥한 난 더욱 주먹을 돌리며 외쳤다.


“놀러왔어?!  봐?! 보긴!”
“아아아악!! 그만! 나 정말 머리가 사라지는 느낌이야!!”

그렇게 녀석에 대한 사랑의 매가 끝나갈 때 즈음, 전령하나가 우리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보고입니다! 적의 후방에서 정체불명의 대규모 증원군이 나타났습니다.”
“뭐..?!”


페르티안도 적의 증원은 생각지 못했는지 놀란 표정과 함께 말에서 내리더니, 적이 사라진 언덕위로 뛰쳐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 녀석의 돌발행동에 놀란 나와 폰은 서둘러 녀석의 뒤를 쫓았다.

“야! 너 미쳤..”


발끈하는 내 외침에 녀석은 목소리를 낮추란 듯 입에 손가락을 대더니 증원되어 다가오는 적을 망원경으로 살피며 말했다.

“역시..”
“뭐가 역신데?”
“봐봐, 보면 알거야.”
“보면 안다고..?”

심각한 녀석의 표정에 덩달아 긴장이 됨을 느끼며, 난 녀석이 건넨 망원경을 들어 적을 바라보았다.


‘..!’


흰 바탕에 노란색과 검은색이 화려하게 혼합되어 흑수리가 그려진 제국기 아래로 서부왕국들의 깃발로 보이는 화려하지만 넝마가 된 연대기들이 승리의 전리품으로 빼앗긴건지 마차에 질질 끌려 능욕당하는 것이 보였다.

게다가 대충 잡아도 5만은 될법한 적의 증원군은 멀리서 보아도 위세가 대단할 만큼 사기가 충만한 모습이었다.

“저 녀석들 뭐야..?”

내 물음에 얼굴이 굳어진 폰이 망원경을 접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서부왕국연합군을 패퇴시켰다던 노르공 백작의 부대 같습니다. 어떡할까요 페르티안님?”
“...”


하지만 페르티안은 폰의 물음에도 진지한 표정으로 적들을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깊게 생각에 잠긴 모습, 허나 왜일까? 그런 녀석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가슴 한 켠이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응..? 내가 왜 이러지..?’

그렇게  수 없는 감정에 조금씩 흔들리며 혼란스러워 하던 그 때, 나와 반대로 굳게 빛나 오르는 녀석의 눈동자가 결심했단  나와 폰을 바라보며 말했다.

“버티죠.”
“네?”
“증원이 왔다고는 하나, 우리에게도 아직 패가 남아있으니 기다려 보죠.”
“패라면..”

폰의 물음에 페르티안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 미소 짓는 얼굴에 더욱 가슴이 뛰자 짜증난단 듯 벌떡 일어나서는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나.. 나는 내려간다! 어차피 내가 할 일은 없잖아,  그래?!”
“그렇긴 한데.. 왜 그래? 설마 아까 다친 상처 때문에 그래?”

그렇게 말한 녀석은 정말 심각한 거 아니냔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 상처를 보려했고, 찰나였지만 녀석의 손가락이 상처로 들어난 내 맨살에 닿는 순간, 더욱 요동치는 내 가슴에 난 매몰차게 녀석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안 꺼져?! 니가 봐서 뭘 안다고?!”
“아니 난..”
“됐다고!!”

놀라 쳐다보는 녀석의 표정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은  감정을 통제해야 했다. 안 그럼 녀석에게 애먼 화만 더욱 낼 것만 같았다.


‘쪽 팔려, 쪽 팔려..’


녀석에 대한 미안함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섞인 기분, 정말 최악이었다. 누가 잘못한 것도 아니건만  묘한 감정이 나를 설레게 하면서도 동시에 비참하게 했다.

혼란스러웠다. 정말 태어나 연애  번 못한 칠칠한 놈이라 그런 걸까, 녀석에 대한 이 감정. 솔직히 이해도 못하겠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 아니 인정하면 안됐다. 나는 아직 남자로서의 서지웅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런데 남자를 좋아한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니야! 이건, 절대 아니라고! 서지웅!!’

뒤에서 바라보는 녀석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녀석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지금 녀석의 얼굴을 본다면,  신념모두가 송두리째 뽑힐 것 같은 위험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녀석을 등지고 화가  듯 성큼성큼 언덕을 내려가던 그 때, 전령하나가 헐레벌떡 나를 지나쳐 페르티안에게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내 뒤에서 기쁨에  전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급보입니다! 모쉘을 공격했던 발슈테인 중위가 성공했다는 전언입니다!!”






* *


모쉘에 대한 기습, 그것은 마벨에게 있어 큰 충격이었다. 발슈테인이  태운거라곤 도시 중앙에 있는 거대한 시청건물이건만, 사정을 알 리가 없었던 마벨은 꽤나 놀란 듯 했다.


노르공 백작의 합류에 다시금 군을 재정비해 전투를 도모하려던 그였지만, 모쉘이 기습을 받았단 급보에 정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부대를 정리해 후퇴했다.

그만큼 모쉘은 그에게 있어 숨통과도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마벨에게 받은 타격이 적지는 않았기에 양측은 다가오는 가을과 겨울동안은 잠시 휴전을 하기로 하며 세타 강을 두고 서로 군을 물렸다.

모쉘을 빼앗기긴 했지만, 남부지역에 거대한 영토를 가진 프러겔에 있어 마벨에게 잃은 지역은 그리  것은 아니었다. 엘렌 백작과 프러겔 수뇌부는 세르딘 평야에서의 승전을 축하하기 위한 성대한 파티를 열었지만,  참석하지 않았다.

아프다는 핑계로 막사에 쳐박힌 난 도저히 파티를 즐길 기분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이 이 육체에 적응하며 살아왔다 자부했지만, 호수에 던져진 돌에 울리는 파동처럼 내 마음은 여지껏 경험한 적 없는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바보같아..”


어두운 막사 안,  잠이 필요 없는 씰임에도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여린 팔과 작은 손, 이전의 나와 비교하면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를 감싸듯 풀어 헤쳐진 윤기있는 황금빛 머리칼은 그야말로 이전의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함이었다.

그렇게 진정되지 않는 가슴에 밤샘을 새던 그 때, 막사 밖으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곤 수분을 망설이며 서성거리는가 싶더니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기, 샤벨리아. 자?  페르티안인데..”


바보자식, 내가 지 인기척을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뚱한 표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나서는 달빛에 비쳐져 투영된 녀석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
‘얘기..?’


나는 녀석의 말에 눈을 깜박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 바보 녀석, 인기척 없는 내 반응을 오해했는지 한층 기죽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가려는 것이었다.


“자.. 자나 보네? 나..  갈게, 시끄럽게 해서 미안.”
‘저 병신!’

지금껏 한심했지만 어느 때보다도 한심한 녀석의 모습에  숨을 내쉰 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넌, 씰이 자는  봤니? 기다려, 나갈테니까!”

내 목소리에 녀석은 ‘다행이다’하며 걸음을 멈췄고,  왜인지 모르지만 근처 거울로 달려가 헝크러진 머리칼을 후다닥 넘겨 정리하고는 저 소심한 놈이 또 도망가기전에 얼른 막사 밖으로 나갔다.

“뭔데?”
“아, 그게..”


마지못해 나왔단 듯 내가 새침한 표정으로 나오자, 녀석은 잠깐 놀라 나를 쳐다보더니 살짝 붉어진 표정으로 말하는 것을 망설였다.

‘왜 이래.. 나까지 긴장되게.’

그렇게 알 수 없는 긴장감에 떨리는 것을 느끼며 난 녀석의 입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정적이 이어졌을까? 잠시 후, 확신에 찬 녀석이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설마 이 녀석 나한테 고백하는 건 아니지? 그렇게 혼자 오만가지 생각에 휩싸이던 그 때, 녀석의 순진무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벨리아.”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날 빡치게 하면서 말이었다.


“혹시 너..  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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