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13. 뇌전(雷電)의 마녀(魔女)
[ 13. 뇌전(雷電)의 마녀(魔女) ]
다음날, 엘렌백작의 프러겔 군은 마벨이 후퇴한 모쉘 근처 세르딘 평야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한 번 쯤은 적의 저항이 있을만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벨은 우리를 이곳까지 오게 놔두었다.
그렇게 도착한 세르딘 평야는 완만한 언덕과 초원이 펼쳐진 곳으로 서로의 모습을 뚜렷히 볼 수 있을 정도로 탁 트인 곳이었다.
8만 대 4만의 싸움, 우리에게 예봉이 꺾인 마벨의 제국군은 그 수가 줄어 이젠 수세에 몰려 있었지만, 프러겔의 수뇌부는 어느 때보다 분열되어 있었다.
쾅 -!
“정면으로 부딪혀야 합니다!!”
“정면이라뇨! 지금 제정신 입니까? 이럴 때일수록 적을 고립시켜야 하오!!”
숫적 우위를 앞세워 정면을 공격하자는 공세파와 적의 병력과 자원을 소모시켜 패퇴시키자는 신중파간의 신경전은 극에 달에 있었다. 하지만 사령관인 엘렌 백작은 공세파인 몰트겐 후작과 신중파인 베르텡 후작의 어느 편도 들지 못한 채 난처해 하고 있었다.
“페르티안 준작의 생각은 어떠오?”
두 거물의 싸움에 두통이 이는지 관자놀이를 만지던 엘렌 백작이 페르티안을 바라보자, 녀석은 자신의 편을 들라는 듯 눈을 부라리는 두 후작의 눈치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정면인지 아닌지를 떠나.. 왜 우릴 평야로 불렀는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페르티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앨렌 백작과 베르텡 후작과 달리 몰트겐 후작은 콧방귀를 뀌며 녀석에게 소리쳤다.
“최후의 발악이겠지! 도망치기엔 늦었다 생각하니 뭐라도 얻을 셈으로 도박하는 거요!!”
그의 말에 많은 수의 귀족들은 ‘그렇지’하며 동조를 하며 몰트겐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고, 공세파를 누그러트리기엔 뾰족한 명분이 없던 베르텡 후작의 신중파는 그 입지가 작아지고 있었다.
그만큼 프러겔의 위세가 어느 때보다 하켄제국에 비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좋소, 몰트겐 후작. 그대에게 군의 6만을 주지. 그 병력이면 적을 몰아 낼 수 있겠소?”
엘렌 백작의 말에 몰트겐은 누워서 떡먹기란 듯 호탕하게 자신의 가슴을 치며 맡겨만 달란 듯 말했다.
“충분합니다, 곧 폐하와 국서(國壻)께 좋은 소식을 안겨 주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몰트겐은 멋드러진 백색수염을 만지며 우리 돼지인 베르텡에게 지켜나 보란 듯 씨익 웃고는 막사 밖으로 나갔다,
“미안하오, 베르텡 후작.”
몰트겐의 손을 들어준 자신의 판단에 자존심이 상했을 베르텡에게 사과를 하자, 돼지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개의치 말란 듯 그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백작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앙센도 베르텡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몰트겐이 나간 막사입구를 바라보며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랜만에 얻은 승리라 모두들 들떠 있는 것이 사실이오, 하지만 그만큼 우리의 기세가 높으니 이번은 몰트겐 후작의 말을 따라봅시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배려하듯 베르텡을 다독인 엘렌 백작은 페르티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준작의 얼굴은 왜 이리 무겁습니까?”
“예..? 아 그게..”
엘렌 백작의 물음에 녀석은 이걸 말해야 하나 마나 하는 표정으로 잠시 망설이더니 그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마벨은 우리와 정면으로 싸우길 원하는 것 같아서요.”
“정면으로?”
“네.. 그렇지 않고선 이곳을 전투장소로 고른 것이나, 여기까지 아무런 저항 없이 우릴 기다려 준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흐음..”
페르티안의 말에 엘렌 백작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그 말 또한 일리가 있단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난 준작의 감을 믿소. 내 예비대 1만을 줄 테니, 그대가 후작의 뒤에서 그를 지원할지 말지 판단하시오.”
“네? 제게 말입니까..?”
깜짝 놀라 되묻는 녀석의 말에 엘렌 백작은 오히려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왜요? 너무 적나요?”
“아..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많이 주신 것 같아..”
“하하하, 그럼 다행이고요.”
백작의 말에 당황한 녀석이 얼굴이 빨개지며 손사레를 쳤고, 엘렌 백작은 순박한 그의 반응에 재밌단 듯 웃음을 흘리는가 싶더니 내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샤벨리아 경.”
“네?”
“편하게 샤벨리아라 불러도 괜찮겠죠?”
“뭐, 편하실대로..”
백작이라 해도 언젠가 공작이 될 사람이었다. 회사로 치면 부회장이 될 사람인데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었다.
“저 샤벨리아, 내 부탁하나만 해도 될까요?”
“부탁이요..?”
“네, 작은 부탁입니다.”
그렇게 말한 그는 불안하게 시리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진한 눈웃음을 지었다.
* * *
휘이이잉 -
“...”
시발, 웃을 때부터 알아봤다. 정가보다 심한 눈탱이 맞은 듯, 뚱한 얼굴로 입을 삐죽 내민 내 앞엔 엄청난 수의 전열보병들이 세르딘 평야에 배틀라인을 만들어 제국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엔 자신감에 넘쳐 ‘하하하하’하며 웃어대는 몰트겐 할배가 있었다.
“앙센보다 더한 인간이야..”
그에게 부탁을 받은 건 몰트겐 후작을 호위해 달란 것이었다. 왕국에서도 중요한 인물인 그가 행여 다치거나 위험에 처하면 곤란하다며 녀석은 거절하려는 내게 새끼 손톱만한 사파이어 하나를 내밀었다.
“받는 게 아니었어.”
사파이어에 혹한 내가 덥썩 녀석의 의뢰를 받았지만, 문제는 이 할배였다. 아주 기운이 뻗치는지 이팔청춘은 저리 가라였고, 거기에 고집은 왜 이리 쎈지, 아주 지 마음대로였다.
“후작, 뒤로 물러나시죠.”
“에헴!! 자네가 사나이의 로망을 아나?!”
시발, 알았지. 지금은 없어서 할 말이 없다만, 나도 한 때 사나이였던 적이 있다고 이 할방구야. 그렇게 나는 사령관이면서 적에게 자꾸 노출되는 그를 말리느라 아주 고생아닌 고생을 하고 있었다.
히이잉 -
“후작각하, 전군 준비가 끝났습니다.”
“하하하, 좋다! 전군 공격!! 하켄 놈들을 일순 끝내버려라!!”
‘뭐..?’
아무리 유리하다 해도 전후사정없이 노빠꾸로 전군을 밀어 넣는다고? 나는 이 할배가 제정신인가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이 할배 이미 수도에서 지혼자 개선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스릉.
“전군 앞으로!!”
투두두두두 -
그의 명령에 프러겔의 전열보병들은 마벨의 제국군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양쪽의 포대가 육중한 발포소리를 내며 초월을 아작내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후작! 뒤로 좀!!”
“하하하하!! 그깟 대포가 대수인가?! 보게, 우리의 승리가 눈 앞일세!!”
‘시발! 이 인간아!! 그깟 대포에 당신 대가리가 아작나면 승리도 뭐도 못본다고!!’
그렇게 말 안 듣는 사촌조카와 명절날 싸움을 하듯 끙끙 거리고 있던 그 때였다. 제국군 전열보병과 만난 프러겔 군 사이의 라인배틀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파바바바방 -
정신력의 싸움, 어차피 무기는 같았다. 누가 이 지독한 대결에서 자리를 떠나지 않고 버티느냐가 관건이었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더 있던걸까, 많은 수에 의기양양하며 제국군과 플린트 락을 쏘던 프러겔 군이 조금씩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장전!! 장전해..”
파바바바방 -
“끄아아악!!”
“아아악! 내 손!!”
초급장교의 독촉에 플린트 락을 장전하던 그 때, 자신들 보다 장전을 먼저 끝낸 제국의 전열보병들은 프러겔 군에게 총포를 쏘아대며 사정을 두지 않고 있었다.
‘장전속도가 빨라..’
하지만 장전속도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라인이 흐트러지며 무너지는 프러겔 군을 감싸며 압박하는 제국군의 대열 재정비와 유연성이 프러겔 군과 대비해 뚜렷하게 돋보이고 있었다.
“뭣들 하느냐!! 압박해! 압박!!”
많은 수를 초원에 밀어 넣었지만, 오히려 대열이 흩어지며 도망치는 프러겔 군의 숫자는 늘어나고, 이탈하는 동료들의 모습에 군의 사기는 순식간에 떨어지는 것이 멀리 있는 나조차 느껴질 정도였다.
공포의 전염, 그리고 불리하다는 불안감이 프러겔 군을 점점 먹어가고 있었다.
‘훈련정도가 이정도로 차이 난다고..?’
무너져 흩어지는 프러겔 군의 라인을 파고든 제국의 전열보병들은 본대를 파고들더니, 능숙하게 양쪽을 갈라버리며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횡대에서 종대로 자연스럽게 바꾸는 그들의 제식은 보통의 훈련으로는 완성되기 힘든 놀라운 것이었다.
그에 반해 대열이 무너진 프러겔 군은 패닉에 빠지며 더욱 이탈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랬다, 마벨은 자신의 군대와 프러겔의 군대의 훈련차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이었다.
지독한 훈련으로 담금질한 자신의 군대와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의 군대, 그것이 지금의 제국군과 프러겔 군이었다.
게다가 고립된 본대의 한 쪽을 가르며 휘젓는 제국의 기병대는 기울어져 가는 전쟁의 승기를 더욱 가속화 시켰다.
“후작, 후퇴해야 합니다!”
지휘 막사까지 근접한 적의 기병대에 내가 '어버버' 거리는 그를 불러보지만, 이미 그는 패닉에 빠진 듯 했다.
‘시발..!’
“후퇴다!! 모두 후퇴명령을 내려라!!”
“네.. 네!!”
다급한 내 목소리에 부관은 후퇴명령을 내렸고, 이윽고 후퇴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후작! 후작!!”
“어.. 어?”
“정신 차리십시오! 이미 군은 무너졌습니다!!”
“그.. 그럴 리가..? 우리 군은 적보다..”
사고가 정지된 건지 그는 이미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적의 사령관이다!”
파바방 -
“이 새끼들이..!”
티디디디딩!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제국의 용기병들이 작은 플린트 락 소총을 들어 쏠 정도로 군은 와해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쏜 총탄을 샤벨로 튕겨 흘리며 후작의 말 엉덩이를 검등으로 새차게 때렸다.
“이랴!”
히이이잉 -
“으아아아아!!”
놀란 말은 이내 병사들이 도망치는 초원 뒤로 후작을 데리고 달리기 시작했고, 나는 어느새 내 주위를 포위하며 샤벨을 빼든 적의 용기병들이 우습단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니들 뒤지기 싫으면 그냥 가라, 형이 지금 많이 외롭거든?”
그러자 녀석들 뒤에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와 함께 낯익은 면상 하나가 내게 말을 걸었다. 이전 날아갔던 팔은 어떻게 붙였는지 멀쩡한 오른팔과 함께 기분나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었다.
“그래? 그럼 내가 외롭지 않게 해줄게, 이 빌어먹을 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