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01 우리의 만남은 어디서 잘못된걸까?
[ 01 우리의 만남은 어디서 잘못된걸까? ]
콰아앙!! 콰아앙!!
“끄아아악!!”
드넓은 초원 위, 검은 제복의 군인들이 머스킷 총을 쥔 채 일렬횡대로 서서는 푸른제복을 입은 병사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싸움은 이미 결정 났는지, 진영을 무너트리고 도망치는 것은 푸른 병사들 쪽이었다. 군악대의 드럼소리와 함께 횡대 맨 오른쪽에 있던 초급장교가 날카로운 샤벨을 치켜들며 착검을 외쳤다.
그와 함께 하늘 위를 가로질러 떨어지는 검푸른색의 마력탄은 포탄처럼 땅에 떨어져서는 폭발을 일으켰고, 숲에 숨어있던 검은색 털모자가 인상적인 제국의 기병대가 화려하게 치장된 금실과 은빛 흉갑을 번쩍이며 도망치는 푸른제복의 전열보병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공격!! 프러겔 놈들에게 제국의 힘을 보여줘라!!”
한편, 오합지졸로 흩어져 도망치던 프러겔 병사 가운데 밀크 브라운 머리에 하늘색 눈동자를 한 젊은 병사 하나가 모자를 떨어트린 모습으로 허겁지겁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하아.. 하아.. 제길.. 제길..”
술이 웬수였다. 그 날, 친구와 함께 선술집에 가지만 않았다면, 이런 전쟁통에 끌려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나간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는 일, 페르티안은 머스킷 총까지 집어던진채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옆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지휘관들은 대체 어디로 간건지 어느새 동료들과 떨어져 혼자 도망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 거기!!”
“어..?”
총에 맞아 죽은 말 아래에 끼인 건지 화려한 푸른 제복의 귀족장교하나가 도망치는 자신을 향해 급히 손을 흔들며 부르는 것이 보였다.
‘아우.. 시발..!’
그냥 무시하고 가기엔 너무 화려한 그의 제복에 페르티안은 한 숨을 푹 쉬고는 울며 겨자먹기로 방향을 틀어 그에게 달려갔다.
“괘.. 괜찮으십니까?”
“어.. 어서, 이 말 좀 들어봐!!”
“네..? 아, 네!!”
하지만, 거대한 체구의 말은 혼자 들만한 무게가 아니었는지, 몸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어.. 어떡하죠?”
“자.. 잘라!”
“네?”
“말 몸통을 자르든, 어떻게 하란 말이야!!”
“아.. 알겠습니다!”
스릉.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건만,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이곳에 머뭇거리는 자신이 얄미울 뿐이었다.
“으이씨..!!”
챙그랑!
장교가 건네준 샤벨은 날카롭긴 했지만, 말을 몸을 자를 정도로 묵직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깊게는 커녕 겉만 베어대는 검을 내던진 페르티안은 근처에 버려진 장교막사가 있는 것이 보였다.
“어.. 어디가?!”
“도끼를 가지고 와야겠습니다.”
“도끼?”
“네, 검으론 안 되겠어요.”
타악.
“..?”
도끼를 가지러가기 위해 일어서던 그 때, 장교는 그의 소매를 붙잡고는 살려달란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빠.. 빨리 오게! 빨리 와야 되네, 알았지? 도망치면 나, 죽어서도 자넬 저주할거야!”
“알겠으니, 이 손 좀..”
“약속해!”
“야.. 약속하겠습니다.”
‘미치겠네..’
“그.. 그래.”
장교는 페르티안의 약속에 그제야 안심이 된단 듯 소매를 놓아주었고, 겨우 장교에게서 풀려나온 그는 시간이 없단 듯 궁시렁 거리며 막사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 기다릴거야! 알았지? 나 놓고 가면 안 되네!!”
‘아우씨.. 진짜, 저걸 그냥 콱 버리고 갈 수도 없고.’
저주반 애원반 섞인 그의 목소리에 인상을 팍 찡그린 페르티안은 꼼짝없이 붙잡힌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땔감을 자르기 위해 마련해 놓았던 도끼를 막사 근처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찾았..”
시잉!
파밧!!
“크윽..!”
그 때였다, 날카로운 샤벨 하나가 순간 천막 사이를 뚫고 나와선 제복과 함께 그의 가슴팍을 베어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으윽..”
투두둑.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페르티안의 가슴팍은 어느새 붉은 피로 물들기 시작했고, 고통에 몸을 휘청이며 한 쪽 무릎을 꿇은 그의 앞으로 황금빛 머리칼에 아름다운 미모를 한 소녀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보병..?”
‘..!’
인형처럼 감정없는 그녀는 제국의 병사인지 검은 제복차림으로 쓰러진 그를 향해 걸어오더니 자신의 피가 맺힌 샤벨을 들어선 목에 겨누었다.
“씨.. 씰..?!”
사람모습을 한 마법병기, 아름다운 미모와 달리 그들에겐 인간의 감정이란 것이 없었다. 오로지 인간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지고 태어난 대인용 살인병기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런 감정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살인인형을 이 전쟁통에 그것도 도망치는 와중에 만났으니, 그에게 있어 이것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아니, 정말 운이 지지리도 없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몰랐다.
‘제길.. 제길.. 제길..’
칼에 베인 상처의 아픔 따윈 상관없었다. 자신의 목숨은 그녀의 손에 달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살고 싶다는 욕망, 페르티안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사.. 살려줘.”
“...”
“난 장교도 귀족도 아니라고!! 그냥 밀이나 심고 키우던 농부라고!!”
하지만 아무 말 없는 그녀의 모습은 두려움을 느끼기 충분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무미건조한 푸른 눈으로 한동안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이내 생각을 정했는지 날카로운 샤벨을 치켜 들고는 싸늘히 중얼거렸다.
“넌 우리의 적, 제거 한다.”
“시발!! 이 군복 때문에 그래? 색 때문이라면 벗을게!”
페르티안은 입고 있던 푸른 군복을 벗어 던지고는 살려달란 듯 그녀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나 농부라고, 여기 점령하면 제국 땅이잖아! 나도 제국신민이 될 수 있다고!!”
“나와 상관없는 일, 넌 여기서 죽는다.”
정말 답답하단 말이 이래서 만들어 진걸까, 차라리 사람이라면 말이라도 통할 것 같았다. 하지만 씰인 그녀에게 자신은 뭐도 저도 아닌 그저 적일 뿐이었다.
“시발.. 빌어먹을 씰..”
스릉.
“각오.”
한치의 자비도 없는 그녀의 모습에 페르티안은 조금이라도 살아야겠다 생각했는지 철푸덕 넘어진 엉덩이와 다리를 밀며 뒷걸음질 치던 그 때였다.
갑자기 그녀와 자신의 하늘 위로 이형적인 일렁거림이 생기는가 싶더니 일순 푸른 빛 하나가 샤벨을 들어 자신을 베려하던 씰을 강타하며 내려쳤다.
콰광!!
챙그랑.
‘..!’
마치 번개를 맞은 듯 푸른빛에 강타당한 그녀는 들고 있던 샤벨을 땅에 놓치는가 싶더니, 다리가 풀린듯 그의 앞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리곤 마치 태엽이 다한 인형마냥 고개를 푹 숙인채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 이게 무슨..”
황당했다. 하지만 페르티안은 죽을 고비를 넘겼단 생각에 식은땀을 흘리던 자신의 이마를 쓸어 넘기고는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그녀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살피기 시작했다.
“고장.. 났나..?”
그렇게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살피던 그 때, 그의 오른쪽 손목으로 흘러 맺힌 핏방울 하나가 그녀의 가슴팍 위로 떨어졌다.
피이잉!!
“뭐.. 뭐야?!”
마치 잘못된 버튼을 누른 것처럼, 갑자기 푸른빛이 터져오르는 그녀의 모습에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무슨 일일까? 마치 자석에 끌어당겨지듯 자신의 손이 그녀에게로 점점 끌려가는 것이었다.
“시.. 시발..!! 뭐.. 뭔데?!!”
강력한 무언가에 끌려가는 오른손을 잡아 당겨보지만, 강렬하게 빛나오르는 푸른빛은 더욱 강하게 자신의 손을 당겼고, 페르티안은 이내 왜 자신의 손이 그녀에게 끌려 당기는지 알 수 있었다.
“피.. 피가..”
가슴팍에 베어져 흐른 피가 그의 오른손을 타고 강렬하게 빛나는 그녀의 가슴팍으로 딸려가는 것이었다.
“미.. 미친..!”
물컹.
“헉..!”
당황한 그의 눈동자, 순간적으로 딸려간 그는 부드럽고 말캉한 것이 한 손 넘게 잡혀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아..”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자신의 나쁜 손에 페르티안은 얼굴이 새빨게 지며 말을 잇지 못한 채 어버버 거렸다.
츠즈즈.
“크으윽..”
잠깐의 행복도 잠시, 그녀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피를 섭취할 생각인지 더욱 많은 피를 자신에게서 뺏어 흡수하기 시작했다.
“하아.. 머리가..”
하염없이 그녀에게 흘러들어가는 피를 보며, 남자는 이대로 자신이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그와 함께 그는 몽롱해지는 시야 사이로 씰의 심장과도 같은 마나하트가 그녀의 가슴골 위에서 빛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응..?”
피를 먹어서 일까, 다시금 생기를 띠는 그녀의 볼과 피부는 불그스름해 지고, 풍성한 그녀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리며 영원히 잠들 것 같던 그녀는 사파이어같은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를 조금씩 껌벅이며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깼어..’
이전엔 없던 감정이 느껴지는 눈동자, 전과 다른 점이라면 그녀가 조금은 사람 같이 느껴진다면 너무 감성적인 걸까, 그렇게 오랜만에 잠에 깨어난 듯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그리곤 티끌하나 없는 하얀 피부를 찡그리며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키스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붉은 입술을 천천히 떼어선 무어라 중얼거렸다.
“...냐?”
“네..?”
“시발.. 귓구멍이 쳐막혔나, 짜증나게 사람 말을 못 알아들어.”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일까, 아름다운 그녀가 시장잡배와 같은 걸걸한 말을 할 리 없단 듯 어색한 웃음과 함께 물끄러미 보자, 그녀는 그런 그가 짜증난단 듯 아름다운 미간을 험악하게 구기며 또박또박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여기, 어디냐고 병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