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1화 〉Ending 2. Embrace the last moment (71/71)



〈 71화 〉Ending 2. Embrace the last moment

창가에 빛이 새어든다.
고요한 아침의 빛줄기가 헤스티아의 눈가를 스치고, 여신은 조금씩, 조금씩 눈을 떴다. 바람이 틈 사이로 불어 들어온 것인지 커튼이 흔들리고 있었고, 커튼 바깥에는 여전히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헤스티아는 숨을 내쉬고, 커튼을 제대로 치기 위해서 일어나려 했지만,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중량감에, 자기도 모르게 흠칫, 하고 멈추고 말았다.
이불을 살며시 들추어보면, 언제나처럼 머리를 풀어헤친 암자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헤스티아를 끌어안은 채로 잠에 들어 있었다. 숨은 고르고, 옅은 미소가떠오른 표정에선 아무런 근심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헤스티아는 말없이 에스트의 엉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새하얀 볼을 꾹꾸욱 눌러 장난을 쳐보기도 하면서 에스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다가, 언뜻 생각난 듯이, 눈보라가 치던 창문 너머를 보려 했다.

바람이 그친것인지, 커튼은 어느 새인가 다시 드리워져, 바깥의 빛줄기는 멈추어 있었다. 헤스티아는 착각이었던 걸까, 고개를 흔들고서 방 안을 보았다. 오로지 작은 가정집의 화톳불과 다 낡아가는 마석등 몇 개만이 따스하게 사방을 비출 뿐이었다.

작지만,  사람이서 살아가기에는 무리 없는 크기였다. 목욕을 할 목욕통도 있고, 강에서 흘러들어온 지하수는 언제나 따스하게 데워져 있었으며, 헤스티아의 취향을 반영한 듯, 벽의 한쪽 면은 책이 가득 찬 책장이 세워져 있었다.
생각해보면, 요즈음은 기적의 이야기를 읽고 있었던가. 태양 빛의 왕녀... 그위네비아, 라는 신의 이름은 들어본 적 없었지만, 그녀가 그녀의 성녀들을 위해서  태양의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읽어도 재미가 있었다.


“에스트, 그만 일어나거라. 에스트.”

“으, 으응..., 적이야?”

마침내 이대로 안겨있는 것도 지루해진 헤스티아가 에스트를 흔들자,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나른한 목소리로 에스트가 헤스티아에게 물었다. 정신이 든 탓인지 에스트의 두 팔이 안아오는 힘이 더욱 강해져서 곤란했다. 점점 안으로 파고들어오는 모습이, 깨어날 마음 전혀 없음, 이라고 광고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나저나, 적이냐니. 이 아이는, 이 때가 와서도, 아직......

“아니, 적은 아니다.”

“그럼.”

게슴츠레 눈을 뜬 에스트가 손바닥을 들었다. 뻣뻣하게 펴진 손가락 다섯 개가 헤스티아의 눈앞에서 흔들흔들 흔들렸다.

“5, 분만......, 더.”

“안 된다! 지금 당장 일어나거라! 무엇보다 내가 심심하다!“

“어차피, 헤스티아는......, 니트 인, 걸. 헤스티아의 5분보다 내 5분이, 훠얼씬, 소중해.”

헤스티아의 이마에 실핏줄이 내달린다. 최근 여신에서 니트로 전직한 것도 사실이고, 매일 놀고 읽기만 하는 헤스티아보다는 에스트 쪽이 몇 배는  피곤할 것이다.
그리고, 헤스티아가 요즘 들어서 피곤할 수 있는 에스트가 부러워진 것도 사실이다.

유희가 부족했다! 림월드였다면 극심한 유희 부족 –15, 정신 광란을 일으킬-
흠, 흠. 헤스티아가 속을 진정시켰다. 선을 넘는 것은 역시 좋지 않아.


“일어, 나거라!”

“꺅?!”


이마에 실핏줄이 가득해진 헤스티아가 두 손으로 이불의  끝을 붙잡고, 그대로 위로 쳐올렸다. 언제나 따스한 방이었지만, 창문 사이로 새어 들어왔던 바깥의 한기가 조금이나마 여전히 남아서 주위를 맴돌고 있었던 탓에, 에스트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잠이 다 깨어버리고 말았다. 눈을 반달모양으로  에스트가 헤스티아에게서 떨어져, 일을 저지르고 억지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그만 일어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며 묵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여신의 얼굴을 보았다.

“헤스티아 치사해.”

“신들은 원래  치사한 법이다.”

“음... 그건 그랬지?”

에스트가 떨어진 틈을 타, 헤스티아가 침대에서 내려갔다. 맨발로 총총총 걸어가, 의자에 앉아서 책을 집어 들었다. 에스트는 흥, 하고 고개를 돌린 채 책을 읽는 헤스티아의 모습을 손가락에 머리카락을 돌돌 말며 졸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애초에 말이다, 네 방은 따로 있지 않느냐! 치사한 것으로 따지면 네가 더 치사하다!”

영토 침입이라는 것이다! 라며 헤스티아가 끝까지 외쳤다. 그리고서 완벽하게 토라진 모습으로 책에 얼굴을 붙였다.

“우으.”

“흥.”


에스트는 헤스티아를 마냥 바라보다가, 순간 무시무시한 웃음을 짓고, 방 한 켠에 놓인 조리대를 향해 걸어갔다. 에스트가 조리대로 한 걸음 걸어 나갈 때 마다, 어느새 묶은 헤스티아의 트윈 테일이 뿅뿅 흔들리고 있었다.


“아아, 오늘은 날씨도 좋으니까, 간만에 요리나 해야겠다-”

날씨 전혀 좋지 않잖아. 헤스티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말려들 어가면 안 된다. 말려 들어가면 안 된다. 말려 들어가면 안 된다.

“신이나 불사자나, 안 먹어도  죽으니까, 요리 안 한지도 꽤 되었지~ 간만에 미각에게 일할 기회를 줘야  것 같아-”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그러니까 듣지 마. 헤스티아, 넌 할 수 있어. 듣지 마. 듣지 마아아아.

에스트는 포니테일로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속옷차림인 그대로 위에 앞치마를 걸쳤다. 어차피 볼 수 있는 사람, 아니, 신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조금 거리낌이 있었으면 했다.



“무, 슨, 요, 리, 로, 할, 까, 요?”

에스트가 허공에다 대고 손가락질을 하다가, 한순간 딱 멈추었다. 만면에 가득 (만들어진) 미소를 짓고,  들으라는 듯이 외쳤다.

“오늘은 날도 추우니까, 스튜를 만들자!”

헤스티아의 입속에 군침이 고였다. 일을 안 해서 휴면상태였던 위장이 갑자기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내가 중요하냐, 아니면 네놈 머리통 속의 하찮은 자존심이 중요하냐고 울긋불긋한 표정으로 헤스티아의 위장이 헤스티아에게 외쳤다.

“그래도 니트 신에게  요리는 없으려나?”

“...니다.”

“응? 헤스티아, 방금 나 불렀어?”

능청맞게 귓가에 손가락까지 대고서 묻는다. 헤스티아는 손에 쥐고 있던 책이 찢어지다 못해 분쇄되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세게 책을 붙잡고서, 다시 한 번 에스트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도 먹고 싶어요.”

“착한 신은 나도 좋아해.”


미소를 지은 에스트가 에스트 병에서 에스트를 가마에 콸콸 흘려 넣고, 최초의 화로에서 옮겨 붙어온 잔불을 일으켜 장작에 불을 붙인다. 끓기 시작하는 에스트를 보며, 그녀는 창고로 향했다. 꽁꽁 얼어 아직 썩지 않은 채소가 꽤 남아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니까.

“.......”

“왜 그러느냐, 에스트. 춥지 않느냐....”

창고의 문을 여는 순간, 창고로부터 찬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칼날처럼 살을 에는 찬바람을 맞으며, 에스트는 무엇인가 떠올랐다는 듯이, 문득 멈춰 섰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무엇인가가 붙잡혀 있었다.

“헤스티아, 혹시 바람이 새어 들어온 적이 있었어?”

“아침에 살짝 들어왔느니라. 창문이 조금 노후화 된 것 같구나.”

“으응.”

잿가루.

자신의 머리카락에 들러붙은 작은 회색 덩어리를 보며, 에스트는 키득 웃었다. 창고에서 채소를 꺼내어 조리대에 올려놓고,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눈으로 책을 읽는 헤스티아를 한 번 쳐다보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무한의 상자에서 먼지가 쌓인 갑옷을 꺼내어 입는다. 흑기사의 대검을 들고, 헤스티아 몰래 창문을 열고, 작은 집에서 뛰쳐나갔다.

여기저기 흔적만이 남은 유적들을 지나, 자신을 향해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망자들을 지나고, 묶인 채 증오스럽다는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는 유펠리아를 넘어서서, 끝없이 펼쳐진 눈밭에 섰다.

멀지 않은 곳에, 익숙한 청년이 서 있었다.
잔불도 일지 않는 재가 그 자리에 있었다.

장작을 회수하기 위해서, 혼돈의 불꽃이 일으켜세운 망자였다.

“오래간만이야,  크라넬.”

“당신을 데리러 왔습니다.”

한 때 소년이었던 청년이 에스트에게 전했다.  멀리 이쪽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사죄하는 마리우스의 모습이 보였다. 꼭꼭 숨겨진 회화세계를 어떻게 찾아왔나 했더니, 배신자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세계가 불타고 있습니다.”

“이미 모조리 타버렸잖아?”


혼돈의 불길은 이미 바깥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황량한 잿더미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에스트가 떠난 이후, 벨 크라넬의 소울로도, 아이즈 발렌슈타인의 소울로도, 그 누구의 소울로도, 저 식신 불꽃의 공복을 채울 수는 없었다. 오히려 맛을 보게 한 탓에 혼돈의 불길이 더 굶주림을 참을 수 없게 되어, 지상으로 빠르게 나오도록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세계 어딘가에는 아직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처럼 말이죠.”

“그럴 리가 없잖아? 나도 유펠리아가 없었으면 이렇게 멀쩡히 대화하고 있을 수는 없었을 걸.”

“그래도, 저는 장작을, 그 혼돈을 안정시킬 장작이 필요합니다.......”


벨이 검을 꺼내들었다. 헤스티아 나이프가 아니라, 어디 사는 누구일지 모를 신의 힘이 깃든 검을 들고서 잔불이라고 하기에도 미약한 잔불을 흘렸다. 혼돈의 불길이 벨에게서 몇 방울 몇 방울떨어져, 회화세계의 땅을 녹여간다.

그것이 무척에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에스트는 무심코 처음부터 모든 잔불을 피워올리고 말았다.


“다시 만나서 기뻤어. 식사라도 같이 하고 싶었어. 하지만, 이렇게 되어 유감이야.”

“저야말로, 정말 유감입니다.”

검이 부딪쳤다.

그러나 이 회화세계는 다시 침묵에 빠질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눈보라가 몰아친다.
불길이 사그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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