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9화 〉Go, Beyond Death (69/71)



〈 69화 〉Go, Beyond Death

머나먼 고대.
안개로 뒤덮인 세상은 아직 나누어지지 않았고,
잿빛 바위와 고목과 고룡만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최초의 불길이 일어나
세상이 분열되기 시작했다.
열과 냉기.
삶과 죽음.
그리고 빛과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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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화염과 붉은 화염이 서로를 집어삼킨다.

다르면서도 같은 존재들이 일으킨 불꽃이 혼돈의 불길과 뒤엉켜, 이 깊은 지하에 검은 태양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자신의 손등에 새겨진 저주의 낙인과 같은 모습을 한 검은 태양을 보며, 에스트는 실소를 흘렸다.

흑기사의 대검과 대왕의 대검이 맞부딪친다. 어느 쪽 역시 밀리지 않는다. 한 순간에 몇 번의 공방이 이어진다. 목을 노리고, 심장을 노리고, 죽음을 걷는다. 검은 불길이 피어오르면, 다음 순간 붉은 화염이 그것을 집어삼킨다. 붉은 불길이 피어오르면, 다음 순간 검은 화염이 그것을 집어삼킨다.

기억을 잃은 불사와 아무도 모르는 난쟁이의 파편.
장작의 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모든 것을 잃고, 자신마저 잃은 가여운 불사자와,
가장 큰 파편이었으나 자아를 이루지 못하고 남에 들러붙어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파편.

하지만, 같은 존재다.
어느 쪽에게도 자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기억을 잃은 자는 지금을 살아가는 자신이, 과거를 살아가던 자신과 똑같은 존재인 것인지 판단할  없으며, 태양빛 왕의 소울을 갉아먹고 난 다음에야 여태까지 자신이 들러붙어 있었던 것을 모방해 자아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파편에게 자신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름조차 잃어버리고, 타인에게 의존해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불사자.
애초부터 스스로가 존재하지 않아, 타인의 모습을 모방할 뿐인 커다란 파편.

“아냐.”


선택받은 불사자는 그것을 부정했다.
검은 불꽃과 붉은 불꽃이 또 한 번 부딪친다. 붉은 색의 불꽃이 유래 없이 거센 불길을 피워 올리며 검은 불꽃을 집어삼킨다. 에스트를 닮은 심연의 존재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에게서 떨어지더니, 힘겹게 검은 불꽃이 어린 대검을 휘둘러붉은 불길이 다가오는 것을 막아낸다.

“너와 나는 다르지 않아.”

“달라.”

“뭐가 다르다는 거야? 너나 나나, 처음부터 망가져 있었어.”

“달라.”


심연의 존재가 손에 거세게 흔들리는 신앙의 결정체, 태양의 창를 쥔다. 있을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윈의 소울을 잡아먹었다는 것은, 그가 사용했던 것을 저것 역시 사용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평범한 태양의 창보다도 검게 느껴지는 태양의 창을 보며, 에스트는 곧바로 지팡이를 꺼내 소울 결정창을 쏘아내었다. 그윈의뇌창에도 필적한다는 소울창,  상위의 마법인 소울 결정창은 검은 태양의 창에 허무하게도 깨어져버렸다.

아무래도 전설이라는것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 같다.


에스트의 가슴을 관통한 태양의 창이 폭발해, 그녀의 사지를 찢어발긴다. 파직파직 튀기는 스파크가 전신을 타고 흘러, 전신을 마비시키고,  피부를 괴사시킨다. 검은 불길을 흘리는 에스트를 닮은 이가 다가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은 에스트의 목을 붙잡고 그대로 들어올렸다.

“자아, 하나일 적으로 다시 돌아가자.”

검은 불길이 거세게 회오리친다. 그러다, 순식간에 불길이 흩어지고, 검게 너울거리는 어둠의 장막이 되어, 몸이 만신창이로 망가져버린 에스트의 몸을 휘감으려 한다.
 모습에, 에스트는 피를 흘리며 씨익 웃었다.


“그게, 너와 내가 다른 점이야.”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야?”


심연의 조각이흔들렸다.

“너는 여전히,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저 남을 모방할 뿐인 그림자에 불과해.”

“너 역시 마찬가지잖아? 선택받은 불사자니 뭐니, 남이 평생 쌓아올린 기술을 훔치고, 소울을 빼앗으며, 그리하여 그저 남을 모방할 수밖에 없는-”

“선택받은 불사자라고 그만 불러.”

에스트의 전신에서 거센 불길이 일었다. 화톳불의 열기와도 닮은 듯한, 따스하면서도 거친 불길이 피어올라, 심연의 조각이 만들어낸 검은 불꽃의 장막을 깨트리고, 불태워 잿더미로 만든다. 에스트의 상처가나아가고, 그녀의 목을 붙잡은 심연의 조각의 팔을 태워나간다.

심연의 조각은 에스트를 집어던지고서, 팔을 가볍게 흔들어 불길을 꺼트렸다.
하지만, 어떻게 그 상처에서 갑자기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화로의 여신은 나에게 이름을 내려 주었어.”

“......”

“기억이 없건 말건, 예전의 내가 지금의 내가 맞는 것인지 확인할  없건 말건, 이젠 상관없어.”

“잃은 것을 그저 잃어버렸다고, 그걸로 좋아, 라고 포기할 셈이야?! 그럼, 결국엔 별 볼 일 없는 망자가 될 뿐이라고!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도 모자라, 남들에게도 잊혀져버리는 그런 생에 무슨-”

“되지 않아.”

에스트는 확답했다.
기억을 잃는다면, 새로운 기억으로 쌓아나갈 뿐이다.

그것이 인간다운 것이겠지만, 인간이 되고 싶다, 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불사이건 아니건, 그저, 지금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길고 길었던 순례의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솔라가 얻은 답과 닮아있다는 것은, 그들이 역시 닮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잊혀버린다고....... 어둠 속에, 아무도 모르는 난쟁이처럼.......”

자신의 모습을 한 심연의 조각이 이해할  없다며 고개를 내젓는 모습을 보며, 에스트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동정할  있었다. 기억을 잃고, 여태까지 자신이라는 것이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타인의 고통에 안타까워할 수는 있을지언정, 공감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타인을 동정할 수도 없었던 에스트가, 처음으로 남을 동정할 수 있었다.

헤스티아는 자신을 잊지 않을 것이다.
자신 역시 헤스티아를 잊지 않을 것이다.

저 약한 심연의 파편에게는 안식할 거처조차도 없었다.


“이해할 수 없어....... 어둠의 왕이 되면, 너와 내가 하나가 되어 망자들의 왕이 된다면, 영원히 자신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어째서 그걸 거부하는 거야.”


심연의 파편이 검을 들었다. 에스트 역시 가련한 괴물을 바라보며 검을 들어올렸다.

불길이 피어오른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몇 번이고 맞부딪친다. 서로의 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늘고, 튀는 피와 상처마저 불길에 집어삼켜져 타오른다. 이해 따위는 더 이상 바라지 않고, 그저 죽이기 위해서 검을 휘두른다.

 순간,
검은 불꽃을 휘감은 대왕의 대검이 에스트의 가슴을 찌른다. 불길이 전신으로 퍼져나가고, 몸을 집어삼키기 위해서 날뛴다.

“기다리는 이가 있고, 돌아가야  곳이 있어.”

불길에 휘감긴 몸을 움직여, 스스로의 몸을 대검에 더더욱 찔러 넣는다. 무언가를 눈치챈 듯, 검을 뽑아내려는 심연의 조각을 제지하듯, 검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심연의 조각이 검을 쥔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불꽃을 피우는 대검을 높게 들어올려, 심연의 조각에게 내려쳤다,

“나는, 그만 돌아가겠어.”

“안 돼. 나는 절대로 그 어둠 속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심연의 조각이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떨어지는 흑기사의 대검을 붙잡는다. 에스트는 이미 검에 찔려, 전신이 불타고 있었고, 심연의 조각은 한 손이 불타고 있을 뿐이었다.
이대로 버티기만 하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며-

“이제 그만 포기해. 적어도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에스트는 대왕의 대검 자루에서 손을떼어, 흑기사의 대검 날에 손을 올린 뒤, 그대로 힘을 주어 내려찍었다. 심연의 조각은 대왕의 대검을 에스트의 몸에서  틈도 없이,그대로 베여 쓰러졌다.

검은 불꽃이 사그러든다.

“......앞이, 보이지 않아.”

한 마디를 내뱉고, 심연의 조각이 인간성 덩어리가 되어 흩어진다. 그것의 심장에선 검푸른, 하지만 어딘가 여전히 하얀 빛을 띤 이상한소울이 떨어지고, 대왕의 대검을 쥐고 있던 손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그윈의 소울이 떨어진다.


에스트는 고개를 돌렸다.
검은 태양은 여전히  있었지만, 끓어오르는 혼돈의 화염이 멈추어 있었다.

활동을 정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저 조용히 멈추어 있었다.
부러진 나선검이 꽂힌 화톳불 위에서, 검은 태양이 일렁였다.


“그런, 걸까.”

가까이에서 보면, 명확했다.

에스트는 부러진 나선검의 화톳불에 다가갔다. 장작의 왕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때마다, 멈추어있던 혼돈의 불꽃이 기쁜 듯이 일렁였다.

한 때, 이자리스의 마녀는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최초의 불꽃을 보았다.
언젠가 불의 시대에 끝이 올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최초의 불꽃을 대체하기 위한 불을 만들었고, 보기 좋게 실패했다. 혼돈의 화염은 세상을 비추는 불꽃이 아니라, 세상을 집어삼키는 불꽃이었고, 그것에 집어삼켜진 모든 이자리스의 생명들은 데몬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세상을 집어삼키려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자아가 없는 불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최초의 불꽃처럼, 자신에게도 언젠가 끝이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끝을 막기 위해서,
세계를 모조리 집어삼켜 장작으로 삼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남고자 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망집.
그렇기에 망념.

복수의 사도라던 레아는  망집과 망념을 이용해 그저 세계를 불태우고 싶었을 뿐이었고, 그녀의 계획은 상당히 성공해버리고 말았다.

막혀서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던 때와는 다르다.
곧이라도 장작을 찾아 튀어나올 것만 같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에스트는 부러진 나선검의 화톳불의 앞에 섰다. 끓는 불꽃이 피어오르고, 검은 태양은 형태를 잃어버렸다고 생각될 정도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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