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8화 〉Go, Beyond Death (68/71)



〈 68화 〉Go, Beyond Death

일찍이 니토가 휘감았던 죽음이 몰아친다.
마누스의 검은 안개가 쉴 새 없이 들이친다.

산 자라면 이쯤에서 무릎을 꿇었으리라. 다가가지 못하고, 멀찍이서 권능을 휘두르는 괴물의 모습을 보며, 절망하며 쓰러져야 했을 것이다.

그녀는 불사자.
죽을  없는 운명이다. 죽지도 못하는 여행길을 나아가야하는 운명이다.

죽음이니, 심연이니, 진즉에 넘어섰다. 넘어서고 말았다.

검과 검이 부딪친다. 부딪치는 순간, 에스트는 팔을 비틀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던 검신이 검과 검이 얽힌 곳을 축으로 삼아, 빙글, 하고 돌았다, 하늘을 향하고 있었던 칼끝이 순식간에 레아의 가슴을 향해 질주하고, 그것의 가슴을 아무런 저항도 없이 단번에 찔러 들어갔다.

“커, 헉-?!”

“불타버려.”

잔불이 거세게 피어오르고, 검신을 따라 흘러간 불길이 레아의 가슴 속에서 꽃처럼 피어오른다. 빛이 어둠을 밝히듯이, 인간의 본성이, 심연의 어둠이, 장작의 왕에게서 아찔하게 피어오르는 최초의 불길에 지워져간다.

“캬, 아악!!”

레아가 괴성을 지르며, 지워져가는 자신의 육체를 암술로 강화해 억지로 움직였다. 여전히 맞물린 채인 대검을 힘으로 밀어내어, 에스트를 자신의 앞에서 치웠다. 그리고는 대검을 들고, 비명 지르는 듯한 영창을 읊어, 수많은 저주 덩어리를 땅에서 솟아나게 했다.
모든 인류의 조상이 읊은 저주의 말. 멀고 먼 과거, 아무것도 없는 어둠에서 태어나, 최초의 불길에 이끌렸지만, 왕의 소울을 가질 수는없었던 이름도 모르는 난쟁이가, 위대한왕들을 질투하고  질투하며 읊었던 저주의 이야기들.

그것이 에스트의 육체를 깎아나간다. 최초의 화로에서 옮겨 붙어온 잔불조차도 그 원념은 견딜 수 없었는지, 빛이 바래고, 그 아래 인간의 피부가 모래처럼 변해 흩어진다.

그렇지만-


“저주 같은 건 개구리나 쓰는 하책이잖아?”


에스트가 흑기사의대검을 횡으로 넓게 휘둘렀다. 장작의 왕의 의지에 따라, 힘이 약해져가던 잔불이 검을 타고 거세게 피어올랐다. 불길이 공기를 태우고, 저주덩어리를 찢어발긴 뒤, 태워 재조차도 남기지 않는다.

“--------------!!!”

불길이아지랑이를 만드는 틈을 타, 에스트의 등 뒤로 순간이동해온 레아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에스트에게 대검을 내려찍었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인간 따위는 순식간에 노화시켜, 흙더미로 돌아가게 만들 폭풍을 휘감은 레아가, 역으로 장작의 왕에게서 피어오른 잔불을 견디지 못해 다가가는 것마저 힘들어 하고 있었다.


“잔재주는 통하지 않아.”

에스트는 몸을 빙글 돌리며,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대검의 몸에 불길을 담은 주먹을 휘둘러 쳤다. 또   불길이 치솟고, 대검이 깨어져 산산이 조각났다. 대검이 깨어지는 순간, 대검의 부러진  속에서 수많은 고깃덩어리 촉수가 솟아올라 에스트를 찢어발기려 했지만, 에스트는 간단히 뒤로 굴러 피할 뿐이었다.


“복수, 해야 해...”


대검을 냅다 던져버린 레아가 손을 들어, 허공에 구멍을 만들고, 그 속으로 작은 인간성 덩어리 하나를 던졌다. 에스트의 등 뒤에서, 레아가 만들어낸 것과 같은 새까만 구멍이 뚫리고, 몇 배는 거대하게 변한 인간성의 덩어리가 눈치 채지 못한 에스트에게 날아가, 폭발한다.
거대한 흑염의 불길이 인다. 레아는 멈추지 않고 검은 뱀을  마리나 쏘아내고, 부러진 대검의 조각을 모아 다시 손에 들었다. 레아의 손에서 피어오른 검은 화염이 그녀의 고깃덩어리 대검을 감싼다.

“복수, 해야 해-!!”

여전히 멀쩡한 모습의 에스트가 잔불이 어린 흑기사의 대검을 휘두르자, 시꺼멓게 일어 오른 검은 불길과 불에 타기 시작한 바벨의 위층으로부터 내려앉는 먼지가 검의 궤적을 따라 단번에 흩어져 사라진다.

대검에 검은 화염을 붙인 레아가 비명을 지르며 장작의 왕에게 덤벼들었다.
에스트는 흑기사의 대검을 양손으로 잡고, 레아가 달려드는 것을 기다렸다. 회오리치는 죽음과 심연의 바람도, 불길에 휩싸여 떨어지는 바벨의 잔해도, 괴성을 지르는 레아도, 아무 것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레아가 양손으로 잡은 대검이 에스트에게 수직으로 내려찍힌다.
에스트는 흑기사 대검 특유의 넓은 크로스 가드와 칼날 사이의 틈에 레아가 내려찍는 대검을 걸어 멈추고, 손목을 비틀어,  한  레아의 빈 가슴팍을 찔렀다.

레아는 대검을 다시 들어 에스트에게 대각으로 내려쳤다.
에스트는 참격을 검의 날로 막아내고, 막아낸 자세 그대로 검과 검이 맞닿은 곳을 축으로 삼아, 손목만을 뻗어, 레아의 목을 찔렀다.

레아는 대검을 다시 회수해, 에스트에게 수평으로 휘둘렀다.
에스트는 레아가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빠르게 레아에게 달려들어, 검을 잡은 손과 손을 맞부딪쳤다. 레아의 자세가 흔들리고, 에스트는 곧바로 뒤로 한 걸음 빠지며 검을 빙글 돌려 레아의 목을   번 쳤다. 치고, 텅 비어버린 가슴에 마지막으로 흑기사의 대검을 크로스 가드까지 닿도록 찔러 넣었다.

고작 몇 번의 공방.
에스트에겐 여전히 상처가 없었고, 레아는  생을 다했다.

레아에게서 피어오른 흑염의 불길이 장작의 왕의 잔불에게 집어삼켜져, 고작 그을음만 남은 채로 사라져간다. 레아에겐 더 이상 자신의 몸에 옮겨 붙은 불을 끌 힘도 없는지, 그저 검에 자신의 몸을 받친 채 하늘을 향해손을 내뻗고 있을 뿐이었다.


“아하, 하. 그렇, 구나. 아버지가, 복수를 갈망했던 것, 처럼, 너 역시도-”

마누스가 그랬던 것처럼, 레아가 검은 거품처럼 보이는 인간성들에 휩싸여 사라져간다.
새까맣게 물든 소울만이 남아 레아의 심장이 있던 자리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걸로, 끝난 것일까.

에스트는 말없이 소울을 주워들고, 저 멀리 쓰러져있는 벨에게 다가가려 했다.

누군가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장작의 왕이로군요.”


던전이 무너지고 생성된 이자리스의 불길으로 곧장 통하는 구덩이에, 한 소녀가 떠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나체의 소녀는 병적일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심연의 냄새도.

“......제 이름은 유펠리아. 슬픔의 사도이자, 던전이었던 것입니다.”

“던전이었던 것...? 심연의 덩어리가, 헛소리를-”

“저도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우라노스가 저를 여기 쳐박았습니다. 혼돈을 덮는 뚜껑이 되라면서.”

잔잔한 목소리에 잠깐의 파문이 일었지만, 여전히 유아한 모습의 유펠리아가 허공에서 내려와, 바벨의 땅을 밟는다. 그녀가 땅을 밟는 것만으로 바벨의 바닥들이 무너져 한없이 깊은 혼돈 속으로 떨어져 가고, 반대로 유펠리아의 병적으로 하얀 피부에는 조금씩, 조금씩 생기가 돌아온다.

“그래서. 너도 나와 죽이고 죽이기를 바라는 거야?”

“아뇨. 저는 천 년 정도 땅에 박혀있었습니다. 그 동안 저 불길을 제 몸으로 막아내다 보니, 저 아래 흔들거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저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저것은 모든 것을 삼킵니다. 이윽고,이 세계가 파멸하는  순간이 올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럼-”

“장작의 왕이여, 저 앞으로 나아가소서.  불길에게, 마녀의 원념에 끝을 고하시옵소서.  힘으로는 불가능했던 일에, 종지부를 찍으십시오.”


유펠리아가 에스트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소울을 에스트에게 진상하듯 높게 들어올렸다. 에스트는 그런 유펠리아를 노려보다가, 검을 집어넣었다.

“너를 어떻게 믿지?”

“......저는  할 일을 하겠사옵니다. 성 바깥의 망령들을 데리고, 세계의 끝으로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장작의 왕이시여, 앞으로 나아가소서.”


이자리스의 불길로 이어지는 깊은 구덩이에,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허공에 떠오른다. 왕의 그릇에서 최초의 불길로 향하는 계단과도 같게 느껴져서, 에스트는 어딘가 마음이 아렸다.

 길을 가게 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가겠어.”


에스트는 유펠리아의 소울을 받아들고, 앞을 향해 걸었다.
끝을 내기로 했다.

돌아올 곳이 있다.

기다리는 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에스트는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그윈이 걸어갔던 계단. 흑기사가 방황하던 길. 그것과 닮았다.

계단의 양옆으로 익숙한 얼굴이 지나간다.
모두가, 순례의 길 도중에 만났던 이들의 모습이었다.

마음이 꺾인 전사, 아스토라의 아나스타샤, 솔론도의 페르투스, 하벨, 빈하임의 그릭스, 늪의 로렌티우스, 여신의 기사 로트렉, 안드레이, 오스왈드, 제냐의 도날, 가시의 기사 커크, 혼돈의 마녀 쿠라그, 알을 짊어진 엔지, 흑철의 타르카스, 왕자 리카드, 암월의 여기사, 거인 대장장이, 백묘 알비나, 우라실의 비아트리스, 바모스, 성기사 리로이, 패치, 빈하임의 리케르트, 봉인자 잉그와드,

우라실의 땅거미와 엘리자베스.

그윈의 네 기사와 처형자, 그리고 잿빛 늑대 시프.
검은 태양 그윈돌린과 태양의 왕녀 그위네비아.
반룡 프리실라.
솔론도의 성녀 레아.
빅 햇 로건.
혼돈의 딸.

이자리스의 쿠라나.

아스토라 상급 기사.


태양빛의 왕, 그윈.

그리고, 나 자신.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야.”


시뻘겋게 끓어오르는 용암, 부러진 채 꽂힌 나선검.
에스트의 모습을 한 자가, 아스토라 상급기사의 갑옷을 입은 이가 에스트를 기다렸다는 듯이 천천히 일어선다.


“지금의 너에겐 니토의 조각도, 시스의 조각도, 4인, 아니지, 3인의 공왕의 조각도 모두 모였을 터야. 그 정도라면 이 불에게 먹이로 주기엔 충분하겠지.”


에스트를 닮은 이가 에스트에게 말한다.
잔불이 아닌, 새까만 심연의 불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이자리스는 여기 있으니, 그윈은 어디 있을까?”

“.......”

의문이었다. 그윈의 소울은 어디에  것인가.
의문이었다. 자신을 덮은 심연의잔재는 어디에  것인가.

최초의 화로에 모두 불타 사라졌다고 하면 이야기는 쉽고 빠르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가 쉽게 나아갈까?

언제나 그래왔듯이, 최악으로 치닫는 것이다.


“이름 없는 불사자, 나의 반신. 네가 불을 이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아주 오랫동안.”

마지막 한 조각이 웃었다.

흑염이 어린 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선 그녀의 등 뒤로, 이자리스의 혼돈이 모여, 검은 태양이 되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