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Spotlight: Rakia
폭풍우가 몰아친다.
빗줄기는 지금도 싸우고 있는 이들의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 내렸으며, 이따금씩 내려치는 번개는 새까매진 하늘을 밝게 비추었다. 흑마가 이끄는 채리엇은 진창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전장을 휩쓸고 있었고, 라키아의 생기 없는 병사들은 시뻘건 안광만이 투구 속에서 빛날 뿐이었다.
“둘러싸이지 말아라, 애송이들아!!”
가레스가 거대한 도끼를 휘둘러 다가오는 병사들을 쳐날리며 외쳤다. 베이트는 팔 한쪽을 포기해 두 기의 채리엇을 분쇄했고, 히류테 자매와 아이즈는 발을 맞추어 두 기의 거울의 기사를 쓰러트렸다. 리베리아는 이동포대로서 세 자리를 넘는 숫자의 병사들을불태워버리거나 얼음 동상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실로 용감무쌍한 모습이었다. 전설 속의 악룡도, 위대한 백호도 그들에 비하면 색이 바래져버릴 것이다.
그럼에도 라키아의 병사들은 겁을 먹지 못했다. 마치 외과적 수단으로 이성과 자각을 담당하는 뇌의 부위를 절제해버린 것처럼, 앞의 동료가 죽어나가도 꾸역꾸역 걸어 나간다. 하나가 죽어 엎어진다면 그 뒤를 열이 뒤따르고, 열이 베여 쓰러진다면 그 뒤를 백이 뒤따른다.
영웅 하나가 병사 백을 쳐죽인다면, 천의 병사가 죽음으로써 그 영웅을 끝끝내 쳐죽이겠다는 생각이다분해보였다.
병사를 도구로 사용하는 지휘관. 지금 라키아의 병사들을 지휘하는 이는 분명 성격이 더러울 것이 분명할 것이라고, 전장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만큼이나 영웅이라 불리우던 자들에게 부담을 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하고, 잔인하며, 비인간적인 전략이나, 효과적이었다.
“아이즈, 이 녀석들 언제까지 몰려올 생각인걸까...?”
“글쎄...”
질린다는 목소리로 물어오는 티오네의 질문에, 아이즈는 평원을 가득 덮은 병사들의 물결을 보며, 역시 질린다는 듯이 대답해주었다. 언뜻 보아도 저 대군은 라키아의 전력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였다.
뒤를 포기하고, 전력으로 오라리오를 떨어트릴 셈인 걸까. 그렇다면 이번 총공격을 막아낸다면, 저들도 깨끗이 포기하고 라키아로 돌아갈 것인가.
아이즈는그런 생각을 하다,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투창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다시 결심했다. 몇 번째인지 모를 다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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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아앗!!!”
오탈이 기합을 내지르며 허무의 위병이 휘두른 전쟁망치를 대검으로 받아내어, 그대로 튕겨내었다. 전신이 근육덩어리인 멧돼지 수인의 근력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고, 허무의 위병은 자세가 흔들려 넘어지려 한다.
하지만, 오탈은 공격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자세가 흔들려 쓰러지려하는 허무의 위병의 뒤에 서있던 또 다른 허무의 위병이 쓰러지려하는 위병의 팔과 허리 사이로 전쟁망치를 쑥 내지른다. 연격을 이어나갔더라면 전쟁망치에 꿰여 즉사했을 것이 분명했을 것이라며, 뒤로 빠진 오탈이 숨을 골랐다.
한편에선 솔라가 세 번째 허무의 위병에게 뇌창을 집어 던지고 있었다. 위병은 뇌창이 솔라의 손끝에서 던져지는 것을 보자마자 전쟁망치를 휘둘러 뇌창을 두 쪽으로 갈라버리면서 곧바로 질주해, 몸을 돌리며 솔라를 휘둘러 치려했다. 혀를 찬 솔라는 몸을 던져 구르는 것으로 전쟁망치가 휘둘러지는 것을 피하고, 곧바로 작은 틈을 타 위병에게 태양의 직검을 휘둘렀지만, 어느새 몸을 가린 위병의 방패에 깡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검이 튕겨져 나올 뿐이었다.
“너무나도 기계적인 움직임이다...”
거리를벌린 오탈이 중얼거렸다. 몇 번 검을 나누어보았지만, 저 위병이라는 것들에게선 조금의 인간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생명체답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그저 주어진 명령대로 행할 뿐인 꼭두각시와도 같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아니, 꼭두각시라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지.”
멀어진 오탈의 위치를 파악하겠다는 듯이, 먼저 끼기긱 황동의 투구가 돌아가고, 인간이라면 눈이 있을 부위가 오탈을 포착하자, 그 다음에서야 위병의 전신이 느긋하게, 하지만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꼭두각시라면, 인형사의 호흡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형사의 움직임을 붙잡는다면 간단히 꼭두각시의 움직임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이치로, 인형사가 명령하는 것보다 빠르게 움직인다면 꼭두각시가 행동하는 것보다도 더 빠르게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그런 것도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면 마석등이 제 시간에 켜지고 꺼지는 것과도 같이, 자연스러우면서도 기계적인 움직임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수많은 패턴을 섞고 뒤섞어, 움직임을 읽을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기에, 따라갈 수는 있을지언정, 넘어설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흐읍!!”
말없이 다가온 첫 번째 위병이 양손으로 잡은 전쟁망치를높게 들어올려, 그대로 오탈에게 내려찍었다. 오탈은 전신의 근육에 힘을 넣고서, 한 쪽 손은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 쪽 손은 대검의 면에 대어, 그대로 떨어지는 망치를 받아내었다. 두 팔이 으깨질 것 같은 고통이 뒷목을 당겼지만, 아직 버틸 만 하다고 가슴속으로 자기 자신에게 호통을 친 뒤, 어깨근육에 힘을 주어, 전쟁망치를 받아낸 대검을 앞으로 밀어 쳤다. 위병의 자세가 흐트러지자, 뒤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또 다른 위병이 전쟁망치를 휘둘러 쳐왔다.
오탈이 혀를 차며 또 한 번 물러선다. 이번에는 회피가 조금 늦은 것인지, 전쟁망치에 스친 근육이 파열해 안쪽에서부터 피멍이 퍼렇게 들어간다.
계속 이런 상황이었다. 방어를 흩트리는 것은 가능했으나, 나머지 한 위병의 공격을 걱정하느라 다음 공격으로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오탈에게 자신이 상처를 입는 것을 감안하고 공격을 이어나간다고 해서, 방어가 무너진 위병 하나를 확실하게 쓰러트릴 수 있는 장담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옆에서 솔라와 1대 1의 싸움을 하고 있지만, 튼튼하게 방어를 하며 장기전으로 이끌어가는 위병의 존재가 오탈을 앞으로 한 발 더 내딛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자신이 공격받는 것을 감안하며 공세에 들어간 순간, 방패를 들어 올려 자신의 공격을 막는 것이 아닐까. 방패를 들어 올리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방패를 들지 않는 것으로 유인을 하고 있는 것인지, 위병의 비인간스러운 기계적인 움직임이 오탈의 판단에 혼란을 주고 있는 탓도 컸다.
“......어떻게든 승부수를 걸긴 걸어야 할 것인데-”
“-태양 있으라!”
우렁찬 솔라의 외침에, 오탈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솔라가 위병이 휘두른 전쟁망치를 한 끗 사이로 피해낸다. 그가 자신의 투구에 꽂아 두었던 새의 깃털이 전쟁 망치에 직접 맞아 찢어져 흩날릴 정도로 아슬아슬한 거리로 공격을 피해낸 솔라가 황금빛으로 빛나는 태양의 직검을 위병의 가슴팍에 찔러 넣으려고 했다. 위병이 방패를 슬쩍 들어, 직검을 막아내었다.
위병이 방패를 친 탓에 검이 미끄러진 솔라에게 연격을 가하려던 순간이었다.
“하아아아아앗!”
높게 들어 올려진 솔라의 주먹이 위병의 방패를 이어서 내려찍으려 한다. 위병이 맨손으로 방패를 내려찍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며, 계속하던 작업을 마치려 휘두르던 전쟁망치를 마저 휘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주먹에는 탈리스만이 들려 있었고, 탈리스만에는 번개가 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맨주먹이 방패를 치기 직전의 순간, 충전이 다 된 주황색 태양의 창이 앞서 위병의 방패를 박살내어버렸다.
그래,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할 셈이냐.
방패가 부서진 위병은 놀란 기색도 없었다. 계속해서 휘둘러진 전쟁망치는 솔라의허리를 강타하기 직전이었다. 겨우 방패가 부서진 것뿐이었다.
“저릿한가?”
“??!!”
탈리스만에서 또 한 갈래의 번개가 뻗어 나와, 위병의 가슴팍을 불태운다. 빗물에 푸욱 젖어있던 위병의 전신에 전기가 퍼져나가고, 위병의 움직임이 잠시 마비된 듯 흔들린다. 솔라는 씨익 웃으며 비교적 느리게 다가오는 전쟁망치를 굴러서 피하고, 태양의 직검을 시꺼멓게 타버린 위병의 가슴팍에 찔러 꿰뚫는다. 태양의 직검에 어린 번개가 또 한 번 위병의 전신을 타고 나가고, 위병은 쓰러졌다.
위병이 무릎을 꿇자, 솔라는 태양을 찬미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위험하다!!”
오탈의 고함소리만 아니었다면, 분명 밤과 비구름에게 자리를 내준 태양을 찬미했을 것이다. 솔라는 고개를 돌려 오탈을 보았고, 오탈과 대치하던 위병이 어느새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없지 않는ㄱ-”
방금 쓰러트려 무릎을 꿇은 위병의 상반신이 우직거리며 솔라의 눈앞에서 날아간다. 무릎을 꿇고 있어도 솔라의 시야를 가득 가릴 정도로 거대한 키를가진 위병의 상반신이 날아갔다는 것은-
“쿠억?!”
동료의 사체를 찢어낸 위병의 전쟁망치가 솔라의 머리를 강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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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트가 거울의 기사가 휘두른 대검을 슬쩍 피해내고, 그대로 흑기사의 대검을 휘둘러 기사의 허리를 쳤다. 무지막지한 경도를 지닌 갑옷과 흑기사의 대검이 마주쳐, 종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텅 빈 라키아의 병영을 울렸다. 갑옷에는 금이 갔지만, 흑기사의 대검은 이가 나간 흔적도 없었다.
여태까지 여러번 맞은 듯, 거울의 기사가 입은 갑옷에는 여기저기 금이 가 있었다. 하지만, 검을 휘두르는 기사의 움직임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흔들림이 없는 채였고, 아직은 무너지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있았다.
하지만, 에스트는 달랐다. 몸을 억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훤히 보였고, 호흡은 거칠어져 있었으며, 오른팔은 바싹타버려 축 늘어져 있었다.
비오는 날에, 번개가 흐르는 검을 휘두르는 기사라, 상성이 더럽게 나쁘잖아. 에스트가 마비된 몸을 질책하며 거울의 기사의 공격을 피해낸다. 오른팔은 처음 검과 검을 맞댄 순간 완전히 타버려서 지금까지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른팔 정도로 전격에 대한 정보를 캐낼 수 있었으니 충분한 값이지만......”
또 한 번 들어오는 대검을 피하고, 흑기사의 대검으로 허리를 강타한다. 잘 쓰지 않는 왼팔로 검을 잡고 있었기에 부족한 근력은 몸을 회전하며 치는 것으로 메꾼다.
다행히 저 기사가 사용하는 검술은 한눈에 다 들어올 정도로 정직했고, 피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았다. 방패 없이 왼손의 검으로도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그렇지.”
쓰러트릴 수 있을 것만 같다-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담는 그 순간, 거울의 기사가 방패를 땅에 내려찍었다. 에스트는 이마에 실핏줄을 띄우며 대검을 잠시 등에 짊어지고, 에스트 병을 꺼내어 화톳불의 기운을 충분히 마셨다. 검게 괴사했던 에스트의 오른팔에게서 생기가 돌기 시작할 때쯤, 방패의 거울이 깨어지고, 거울 속에서 츠바이핸더를 든 카타리나 특유의 양파 갑옷을 입은 기사가 튀어나왔다.
“......지크마이어.”
닮은 것이라고는 양파스러운 갑옷과 츠바이핸더 뿐. 눈앞의 인물은 지크마이어가 아니란 것을 잘 알면서도, 에스트는 그리운 이름을 입 밖에 꺼낼 수밖에 없었다.
옛 추억도 잠시, 충분히 숨을 고른 에스트는 검을 다시 들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