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Spotlight: Rakia
오탈은 회상했다.
병사들이 거울의 기사라 부른 자와 1대 1의 장을 가지게 되었을 때 였다. 마법이라도 걸린 듯, 몇 번을 쳐도 깨어지지 않던 단단한 갑옷에 마침내 금이 가게 만들었을 때 였다.
거울의 기사가 거대한 거울방패를 땅에 내려찍었다. 공격도, 방어도 포기한 이상한 행동이었지만, 그런 이상한 행동을 취한 만큼이나 신중하기로 결정한 오탈은 거울의 기사에게서 몇 걸음 뒤로 떨어졌다.
거울 방패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경면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꽤 장신의 오탈보다도 신체 절반 정도는 더 키가 큰 거울의 기사가 방패로써 사용하던 거울이니 만큼, 오탈의 키보다도 커다란 거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얇은 거울 속에서, 거울의 안쪽에서 누군가가 경면을 두들기고 있었다. 명백히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있었다.
오탈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유리가 깨어지고 방패 속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푸른색의 기운을 뿜어내는, 유령과도 같은 느낌이 드는 자였다. 가시가 빽빽이 자라난 갑옷을 입고, 더 많은 적의 상처를 보기 위해서 설계된 듯한 검과 방패를 든 기사와 거울의 기사의 협공에, 오탈은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고, 어떻게든 포위망을 풀고 후퇴하던 도중에 솔라가 나타나 구해준 것이었다.
"가시의 기사라면... 커크인가?"
"커크라면 죽었어. 세 번 정도."
최하층, 병자의 마을, 폐허도시 이자리스.
다크 레이스임에도 불구하고 혼돈의 딸에게 반해, 심연을 걷는 것을 포기하고 혼돈의 딸의 안식을 위하여 인간성을 바쳐오던 괴이한 다크 레이스가 출현했던 지역들을 떠올리며 에스트가 대답했다. 혼돈의 딸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으면 심연에서 벗어난 다크 레이스 주제에 세 번이나 되살아나 싸움을 걸어 왔던 것인지..., 그 때는 그의 마음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것 같았었지만, 지금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기사는 커크의 자손이 될 수도 있겠군.”
“.......”
“자손일세. 무엇이 이상한가?”
무엇이 이상하냐는 듯이 되물어오는 솔라를 빤히 보다가, 불사가 짊어진 무게를 새삼 깨닫게 된 에스트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불사의 저주를 받은 에스트에게 있어서, 그녀가 아직도 회상할 수 있는 마지막 기억이 남아있는 장소가 북방의 수용소였으며, 그 이후에는 곧장 불사자들의 순례길인 로드란을 죽지 못해 살아갔을 뿐이었다.
그야 사방이 불사자고 망자들이었으니, 한정된 수명을 가지고, 악착같이 대를 이어나가는 인간들의 삶에게서 사상이 멀어져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 벨 때도 그랬지만,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오탈, 자네는 어떻게 할 셈인가? 오라리오에 돌아갈 생각이라면 기쁘게 도와줄 수 있네.”
“이곳에서 싸우겠다.”
“죽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만.”
“싸우다 죽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무인이 가장 바라던 최후가 아니겠는가.”
마음 깊이 복수를 갈망하는 오탈의 눈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일생 잊고 있었던 패배와 깊은 상처가 온 몸에 걸쳐서 새겨져 있었고, 지금도 욱신거리고 있었다.
프레이야 님을 생각한다면 돌아가는 것이 옳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돌아갈 수 없었다. 패배한 무인으로서의 오탈은 지고한 여신 프레이야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흐음... 그렇다면, 이걸 보게나.”
솔라가 품속에서 곱게 구겨진 쪽지 한 장을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렸다. 마리우스가 아스피에게 건네었고,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던 아스피가 헤르메스의 명으로 솔라에게 전달했던 그 쪽지였다.
쪽지에는 라키아 군의 모든 정보가 적혀 있었다. 병사의 숫자, 병장기의 숫자, 마법 사용자들의 숫자, 각 부대 병영의 위치와, 군량미의 위치, 심지어는 주신 아레스의 거처까지도, 모든 것이 적혀 있었다.
“나는 아레스를 토벌하는 것이 가장 빠른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네.”
“맞는 말이야. 계약의 주체를 베어버리면, 일단은 병사들의 힘이 약화되겠지.”
“신을 벨 셈인가...?”
당당하게 신을 쳐죽이겠다고 선언하는 두 명의 불사자를 보며, 프레이야에게 콩깍지가 제대로 끼었다고는 해도 아직은 인간의 감성을 지닌 오탈이 잠시 머뭇거렸다. 프레이야의 명령이라면 원 없이 쳐죽일 수 있겠지만, 역시나 스스로의 의지로 행하기에는-
“그렇지, 오탈. 그대는 저 병력에 당당히 맞선 경력이 있다고 했었지?”
“......저런 것들이랑? 숫자도 열세일 텐데?”
에스트가 오탈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만큼 자신의 힘에 자신감이 있었다는 소리였겠지만, 지금 오탈의 모습을 보아선 역시 힘의 함정에 빠진 모습이었다. 오탈 자신도 사전 준비가 부족했다는 것을 인정하며 입술을 깨물고서 에스트와 솔라의 말에 수긍을 표했다.
“머리가 둘 달린 흑마가 이끄는 채리엇 수 십 대가 앞서 평원을 휩쓸었다. 그 시점에서 가네샤 파밀리아는 궤멸해버렸고, 각 파밀리아의 지휘통계는 망가져버렸지. 우리 파밀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채리엇이라. 여기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다행이네.”
“채리엇...”
“그 다음은 마법사들의 일제 영창이 이어졌다. 적 마법사들의 지팡이에서 새까만 불길이 쏟아져, 우리 측의 병력을 쓸어버렸지. 불의 모습을 한 주제에, 불태우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물리력으로 적을 압살하는 이상한 마법이었다.”
우라실의 암술이다. 에스트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암술이 맞다고 한다면, 자신 역시 두 번 이상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방패를 든다고 해도 세 번 막아내는 것이 고작일 터인데.......
하늘을 덮을 만큼 많은 마법이 떨어지고, 푸른 평원이 간단히 붉은 시체의 터가 되어가는 모습을, 에스트는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다음은 병장기를 꼬나든 일반 병사들이 몰려왔다. 스테이터스, 레벨, 팔나, 엑세리아, 그 모든 것을 무시하는 듯, 병사들이 겨우 살아남은 모험가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흐음......, 채리엇이라.”
오탈의 입에서 처음 채리엇의 이름이 나온 시점부터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던 솔라가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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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에서 나온 에스트는 병사들의 눈에 띄는 것도 개의치 않고서, 왼손에 불덩이를 쥐었다. 수색을 그만두고 쉬고 있던 병사들이 놀란 모습으로 각자의 병장기를 들기 시작하자, 에스트는 한참 느리다며 그들을 비웃고, 그대로 손에 쥐고 있던 불덩이를 던졌다. 거대한 불덩이가 작렬하고, 병사들은 잿더미가 되며, 용암의 파도가 남은 병사들에게로 흘러내려간다.
“적이다! 당황하지 말고 모두 집결하라!!”
“네놈, 어디 숨어있던 것이냐!”
“이렇게 튀어나오다니, 꼬챙이로 만들어 주마!!”
에스트는 이 정도 화려하게 했으면 확실하게 주목을 끌만도 하겠지, 하고 웃었다. 이 많은 병사들을 눈앞에 두고 떨지 않고 웃는 모습에, 병사들은 열이 뻗친 것인지, 용암을 건너 에스트에게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에, 잠깐.”
“죽어라, 침입자아아!!!”
“너, 다리가 녹고 있다고?”
“크아아아아아아!!!”
에스트가 고개를 저었다. 다리가 녹아 쓰러져 용암 바다에 그대로 엎어지는 자가 있는가 하면, 용암 바다를 무사히 건너고도 전신이 불길에 휩싸여 쓰러지는 자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다리갑옷이 녹는 것에서 그친 듯인지, 열이 넘는 병사가 무사히 용암 바다를 건넜고, 스물이 넘는 병사가 넘어서고 있었다.
“정말, 미치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구나.”
“크아아아아!!”
“그 열정을 살아가는 데 쓰면 좋았을 것을.”
에스트는 불덩어리를 하나 더 쥐고서, 그대로 선두의 병사들에게 던졌다. 용암을 건너온 그들은 바로 눈앞에서 작열하는 거대한 불덩어리에 아연한 모습 그대로 재가 되어 사라지고, 흐르는 용암의 강이 두 개째 생성된다.
용암이 흘러 천막 막사를 태우고, 연기가 하늘로 치솟기 시작한다. 이미 땅거미도 사라지고, 어둠만이 내려와 땅을 뒤덮었기에, 용암의 불길, 용암의 열기 모든 것이 유아등이 되어 다른 진지의 병사마저 끌어들인다.
어느새 눈떠보면, 세 자릿수를 넘는 병사들이 자신을 에워싸고 있었다. 용암의 강이 두 갈래나 되자, 건너는 것을 자중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언제 지휘 병력이 나타날지 모르고, 그들에게 건널 것을 명령할지 모를 상황이었다.
“......너무 화려하게 했더니, 뒤가 남지 않게 되어버렸네.”
“곧 마도사와 기사들이 올 것이다. 네놈은 이제 끝장이야.”
“으응, 그런 것 같네.”
제정신을 대부분 잃은 병사들과 다르게, 대화를 나눌 정도의 정신은 있어 보이는 병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에 동의를 보여주었다.
“혼자였다면 말이지.”
“태애애애애애애야아아아앙 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안세에에에에에에!!!!”
목 두 개를 가진 검은 말과, 그것이 이끄는 채리엇이 천과 나무로 이루어진 천막들을 모조리 분쇄하고, 병사들마저 벌레 죽이듯이 쳐죽이며 달려온다. 기수 자리에 서 있는 솔라는 태양을 찬미하고 있었으며, 바로 옆에서 고삐를 잡은 오탈은 필사적으로 말을 조종하려고 고삐를 당기고 있었지만, 두 머리의 말은 레벨 7에 다다른 오탈의 근력으로도 제제하기가 힘들 만큼 괴물 몬스터였던지라, 쉽게 조종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음? 오탈. 여기서 멈추게.”
“그게, 말이, 쉽지-!‘
“저기, 여기서 멈추어야만 하네. 그래야지 픽업을-”
“무리다!”
"고삐를 줘보-게? 맙소사, 자네 이런 걸 어떻게 쥐고 있었던 건가?!"
쿠르르르, 강철의 바퀴가 센의 고성의 돌덩어리가 굴러가는 듯한 무시무시한 소리를 낸다. 맹자의 조종도, 태양의 기사의 조종도 조금도 듣지 않는 새까만 폭주마가 발과 몸통에 닿는 병사들을 족족 쳐죽이고, 바퀴에 달린 칼날이 병사의 사지를 찢어낸다. 심지어 용암따위는 개의치도 않다는 듯이 그대로 짓밟고 달려 나간다. 오히려 발굽에 불이 붙어 더 무섭고 멋있는 모습으로 보이게 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대로 가버렸다.
가버렸다.
“......어, 잠깐.”
“네, 네놈은 이제 끝장이다!!”
앞서 만들어낸 용암의 강은 벌써 굳어가고 있었고, 뒤늦게 만들어낸 용암의 강은 채리엇이 한 번 밟고 지나가는 탓에 그 바닥을 내보이고 있었다.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의 정신을 가졌던 병사가 외쳤다. 동시에 수 십 명의 병사가 달려들기 시작했다.
에스트는 그 모습을 보다가, 곧바로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