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Spotlight: Rakia
1대 1이라면 간단하다.
1대 2라면 힘들다.
1대 3이라면 결사의 각오를 해야한다.
그 이상이라면, 죽음을 준비하라.
에스트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라키아 군의 진지를 활보하고 있었다. 면룡의 반지를 착용해 기습을 가하고, 고의 대궁으로 먼 거리의 적을 저격하기도 하며, 외워두었던 진채의 좁은 골목으로 적을 유인해 각개격파하기도 했다. 뒤를 잡히지 않도록 늘 경계했으며, 언제나 셋 이상의 적과 마주치지 않도록 조절해나갔다.
다행인 것은, 라키아 3만의 군대가 모두 한 곳에 모여 오라리오를 박살내려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라리오를 조금의 틈도 없이 둥글게 에워싸 포위하고 있는 진형이었다는 것이다. 오라리오가 비록 크지 않은 도시긴 했지만, 3만의 병력으로는 빽빽하게 둘러싸는 것은 무리가 있었고, 그 결과,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각 진지의 병력 밀도는 느슨해져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야 중심부에 도달하는데 석 달 열흘은 더 걸리겠는걸...”
자신에게 새까만 기운이 어린 직검을 휘둘러오던 마지막 병사의 목을 쳐낸 에스트가 아르토리우스의 대검을 등에 짊어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라키아 군대의 진형은 성벽 위에서 뛰어내리기 전에 충분히 봐두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지상에서 보는 것과 위에서 보는 것은 차이가 컸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본 지상은, 라키아 군의 진형이 그저 많은 병사들이 얽히고설킨 것에 불과했었지만, 일부밖에 볼 수 없는 아래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각 진지의 무수한 횃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하늘을 덮고 있었다. 그 정도의 차이인 것이다.
조금 더 자세히 볼 걸 그랬나.
[이쪽에서 적이 발견되었다!]
[기습이다!]
“하아...”
에스트는 또 몰려오는 군세를 보며, 또 한 숨을 내쉬더니, 거대한 천막 막사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어차피 모두가 심연에 잠식되어버렸으니, 죽음 이외에는 해답이 없었지만, 그 해답을 내려주는 것은 굳이 에스트 자신이 아니라도 괜찮은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우두머리.
이들을 이끄는 수장. 그리고 이슈타르에게 살생석을 건네었을지도 모르는 자.
그 자를 쳐낸다면, 남은 것은 오라리오의 힘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터다.
[허둥거리지 말고 개들을 풀어라!]
“......뭐?”
[알겠습니다, 소로니우스 님.]
개.
4족 보행을 하는 최고로 성가신 적이다. 재빠른데다가 도약력도 뛰어나며, 어깨높이가 인간의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순발력으로는 쉽게 잡아내는 것이 힘들다. 심지어 냄새를 잘 맡아 적을 잘 추적하고, 한 번 추적하기 시작한 적을 놓치는 일이 없으며, 그 짖는 소리로 아군을 불러 모으기까지도 한다.
아군을 불러 모은다.
숫자의 폭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에스트는 뒷목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고 아직 위기-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될 수 있는 한 병에 담긴 에스트와 체력을 아끼고 싶었던 것이다.
화톳불이라고는 헤스티아 하나뿐이니, 에스트를 재 보충할 장소도 없고, 언제 이들을 이끄는 수장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고, 여러모로 될 수 있는 한 아끼고 싶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오히려 개만 푸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심연에 잠식되었다고는 해도 아직은 인간에 가까운 병사들이다. 우라실의 주민들처럼 인간의 궤를 벗어난 정도는 아니니 그나마 나은 편은 아닌가? 개보다도 각종 신체능력이 뛰어난 우라실의 주민들은 개를 풀지는 않겠지만, 개보다도 더 개같이 달려들었을 텐데?
웃기지 말라고 해. 어느 쪽이던 상황 더러운 건 마찬가지야.
“윽...”
개 목걸이가 짤랑짤랑 흔들리는 소리와, 컹컹하고 사냥개의 짖는 소리가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하늘을 울린다. 에스트는 반쯤 포기하고 집어넣었었던 아르토리우스의 대검을 다시 꺼내들었다. 상황이 영 더러워지면 귀환의 뼈를 사용해 오라리오에 다녀오면 될 일이었다.
그 때였다.
“이쪽일세.”
“......?”
몇 걸음 뒤, 한 천막 막사의 문이 들리고, 안쪽에서 솔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짓말이겠지, 싶으면서도 목은 이미 돌아가고 있었다. 과연 새 깃털을 꽂은 양철 깡통에 눈구멍만 내놓은 듯한 투구가 천막 사이로 빼꼼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솔라...? 어째서 여기에?”
“그건 일단 들어와서 이야기 하지.”
컹컹 짖는 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선 철문이 달린 성곽에 들어가도 쉽게 안심하지 못할 텐데, 고작 천막 안으로, 그것도 적들이 병영으로 사용하는 천막 안으로 들어오라는 솔라의 모습을 보고 어이가 증발할 것만 같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나? 물론이지! 하지만 표정을 감출 필요는 없네. 모두 그래왔으니까.’
“으그그긋...”
에스트의 머릿속에서 한 때 들었던 솔라의 목소리가 되감기되고, 그는 항상 진심으로 나아가는 사내였음을 다시 한 번 가슴 속에 되새겼다. 그러고도 에스트는 여전히 지금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잠시 망설였다가, 신음소리를 흘리며 천막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천막 안에 발을 내딛는 그 순간, 에스트는 이상하게도 고향에 온 기분이 들었다.
“오래간만일세, 친구여.”
에스트의 눈은 간만에 만났다며 인사를 해오는 솔라의 뒤에 고정되어 있었다. 병사들이 텅 빈 병영 천막의 중앙에, 검이 꽂힌 화톳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어째서 화톳불이 여기에...?”
“흉내를 조금 내본 것일세.”
자세히 보면 화톳불에 꽂힌 검은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나선 모양의 검이 아니라, 솔라의 애검인 태양의 직검일 뿐이었다. 흉내라고는 하지만, 애초에 자신의 검을 불붙은 장작 위에다가 그냥 꽂아놓은 것밖에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헤스티아의 앞에 섰을 때처럼 고향에 온 기분이 드는 것일까.
어째서 병사들과 개들이 눈치 채지 못하고 저 멀리 사라져 가는 것일까.
“나선의 검의 파편일세. 장작 아래에 숨겨서 불씨로 사용하고 있어.”
“나선의 검의 파편...”
그 검이 부술 수 있는 물건이었을 줄은 상상도 못한 에스트가 솔라가 뱉은 말을 계속 되뇌었다. 부술 수 있다면, 파편이 있다면, 확실히 화톳불 비슷한 것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무엇을 그리 고민하나, 친구. 태양에게 찬미를 한 번 드리면 고민이 싹 다 풀릴 것이야.”
“......생각을 말자.”
이 남자라면 어쩐지 신앙 하나로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져서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나저나, 이런 곳에서 보게 되다니, 의외인걸.”
“지인이 힘을 빌려달라고 편지를 또 보내왔지 뭔가.”
헤르메스라고, 예전에 내가 오라리오에 있던 시절에 아주 친하게 지내던 신 하나가 있네. 아니지, 오라리오 바깥에 나온 뒤로 더 친해졌던가! 하하하.
껄껄 웃기 시작하는 솔라를 보며, 에스트는 헤르메스가 도대체 무슨 일만 생기기만 하면 튀어나오는 것이 아주 바퀴벌레를 닮았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지금 상황에서는 두 말하면 입만 아픈 귀중한 전력이지만,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다.
"그대도 여기 온 것을 보면, 내 견식이 아직 죽지는 않은 듯 해 다행이라 생각하게 되는군."
"으응. 확실해. 농밀한 암술의 흔적, 가득히 풍겨져나오는 심연의 냄새... 다른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어."
"그렇군... 다크 레이스를 자칭했던 자의 분석이라 할 만 해! 하하하!"
"...윽."
솔라는 전쟁 유희 적에 다크 레이스의 갑옷을 입고 인간성을 빼앗던 에스트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한 것이었겠지만, 에스트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 때도 크게 잘한 것은 없었을 뿐더러, 솔라와 헤어진 이후, 마누스를 쓰러트리고 그 파편을 가득 뒤집어 써버리는 탓에, 친우들을 모조리 참살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오르고 만것이었다.
"으음, 노, 농담일세.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게나."
"아냐, 괜찮아. 내 잘못이니까."
에스트는 고개를 저으며 간이 화톳불 앞에 앉았다. 파편으로 만들어진 화톳불인 탓에 열기가 약했고, 약한 어둠을 쫓는 정도의 빛 밖에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다면, 에스트는 보충할 수 없겠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려나-
"으, 윽..."
"누구야?!"
천막 안쪽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에스트가 곧바로 등에 메고 있던 대검을 들어 소리가 흘러나온 쪽을 향해 겨누었다. 에스트를 따라 같이 화톳불 앞에 앉았던 솔라가 진정하라는 듯이 한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군세들 속에서 홀로 싸우던 용감한 자일세."
"멧돼지 수인...?"
머리에 붕대를 맨 오탈이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유일한 레벨 7이자, 오라리오의 사람들이라면, 아니, 이 세계 어디에서 살아가건, 풍문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 하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다는 프레이야의 맹자를, 불사자 두 명은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