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Spotlight: Rakia
두 개의 목을 가진 군마가 수 백 필.
거울의 방패를 든 거대한 기사가 열 둘.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는 흑철의 갑옷을 입은 병사가 수 만.
검은 나뭇가지 지팡이를 든 마법사가 천.
라키아 왕국의 여섯 번째 오라리오 침입은, 그 외견부터가 이전 다섯 번의 침입과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만에 다다르는 병사들에게 모두 튼튼한 갑옷을 제련해줄 수 있을 만큼의 철이 없었기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 많은 철을 모두 다 힘써 단조할 대장장이도 없었기에, 언제나 가죽제 갑옷에 철제 흉갑만으로 돌격해오던 병사들은 모조리 어디가고 없었다. 다섯 자리 수의 병력들이 모두 장인의 손에서 태어난 철갑으로 몸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고, 그들이 든 검과 창의 날은 양산된 무기들 사이에선 비길 데가 없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또한 선두에 서서 수 백 기의 전차를 이끄는 두 개 머리의 군마는 마치 지옥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검은색의 입김과 콧김을 내뿜고 있었으며, 금방이라도 미친 듯한 모습으로 뛰쳐나갈 듯 붉게 충혈된 눈으로 평원너머 저 멀리에 우뚝 선 오라리오의 시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팡이를 든 이들은 어떤가. 엘프나 르나르같은 마법 사용자 종족과는 달리, 인간이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무던한 노력이 필요하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평범한 인간을 위한 마법서들도 모두 소실되어, 현대에 이르러서는, 신들이 내린 팔나의 힘을 받지 않고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었다.
그럴 것인데, 기껏 해봐야 레벨 1을 넘지 못할 병사들 사이에, 지팡이를 든 이들이 어찌하여 저렇게 많단 말인가. 던전이 존재해, 엑세리아를 마음껏 쌓을 수 있는 오라리오의 모험가들과는 달리, 라키아 왕국의 병사들은 엑세리아를 쌓을 곳이 없다고 해도 좋다. 야생 몬스터들은 약하기 그지없으며, 그 숫자도 만을 넘는 병사들에게 충분한 엑세리아를 공급해주지 못할 만큼 적다. 결핍된 엑세리아로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평생을 갖다 바쳐도 부족할 터인데, 저렇게 젊은 장병들 사이사이로 어떻게 저만큼이나 되는 숫자의 병사들이 자신만만하게 지팡이를 들 수 있는 것인가.
“요거요거, 쪼까 위험한 거 아닝가 모르것네.”
오라리오의 시벽에 걸터앉은 로키가 대평원에 늘어서 있던 병사들이 흩어져 병영을 짓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좋은 장비가 늘어나고, 마법사가 늘어난다고 한들, 레벨 1이나 2가지고는 천이 모이건 만이 모이건 용을 쓰러트릴 수 없다. 레벨 6의 모험가가 용에 비견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들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손 하나 대지 못할 것이 분명했지만, 그래도 주신으로써의 걱정이 풀풀 피어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점마들은 아직도 눈치 못 채고 앉았으니, 돌아버리것구만.”
시벽 아래, 오라리오의 내부.
전쟁 특수를 기대하고 있는 상업계 파밀리아들을 보면서, 로키가 크게 한 숨을 내쉬었다. 여태까지 라키아 왕국의 원정이라 하면, 오라리오의 모험가들 사이에선 전쟁 특수를 일으키는 좋은 먹잇감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여태까지 다섯 번 그랬다고 해서 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오라리오의 안일함에 한숨이 나왔다.
아니, 뭐, 로키 자신도 시벽 바깥을 내다보기 전까지는 그리 생각하고 있었지만서도-, 저것들이나 뭐 도움도 되지 못하는 신놈년들이 안일해빠지는 건 그렇다 쳐도, 길드나 모험가들까지 축제판 벌어진 듯 놀고 있으니 더 답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걸, 로키. 저들 덕분에 네가 긴장하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
“마,리베리아, 니도 보이제? 엔간하면 무리하지 말아래이.”
“장비도 달라지고, 기강도 눈에 띄게 변했어.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카다 정말로 뒈지는 수가 있대이, 리베리아. 우리가 오기 전의 고대 하계 아들은 우리 같은 거 없이도 용이고 악마고 다 잘 잡고 다녔데이.”
“로키?”
“팔나에 너무 의지하지 말아래이. 늬들이 강하긴 하지마는, 그래도 목이 댕강 떨어지면 죽고, 심장이 뽀사져삐면 뒈지는 연약한 하계 아들인건 변하지 않는데이.”
리베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설교하는 주신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한 주신의 모습을 보는 건 오래간만이었기에, 마음 깊이 새겨듣기로 했다.
“까놓고 말하자카믄, 저걸 보고 나니 늬들 누구 하나 내보내고 싶지 않게 되었다마는.... 이슈타르 때 누명을 프레이야 금마하고 다 같이 디지버 쓰는 바람에 이캐 되었다 안카나. 길드 아 새끼들은 유도리가 없어가꼬...”
로키의 눈은 저 멀리서 무기와 방어구를 정비하는 아이즈에게 꽂혀 있었다.
“알았나, 리베리아. 명령, 아니지, 부탁은 세 개데이. 하나, 뒈지지 마래이, 둘, 뒈질 거 같으면 도망쳐래이, 그리고 숨으래이. ...숨어서 보다가 운 좋으면 걍 엉덩이에 불난맨치로 오라리오까지 바뜩 튀어온나, 마 반격 이따구 짓 하다가 늬들 뒈져삐면 내 절대로 늬들 용서 못할거래이.”
“잘 알아들었다, 나의 주신 로키여. 절대로 살아남도록 하겠다.”
“니만 알아들으면 되나. 가서 점마랑 점마랑, 글고 저거..., 아이쭈땅은 니가 잘 살피보고. 내 말 죽어도 안 들어쳐먹는게 저거 아이가.”
“알겠어, 알겠어, 로키 어머님.”
“엄마 카기엔 아직 이른 나이다! 그 말 당장 취소해라!”
전쟁 발발 하루 전날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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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스 님, 경비를 보던 소로니우스가 찾아왔습니다. 적 정찰병을 잡았다고 합니다.”
“들여라.”
천막이 열리고, 흑철의 갑옷으로 전신을 두른 경비병 하나가 푸른 머리칼의 여인 하나를 질질 끌고 들어와, 바닥에 내팽겨 쳤다.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를 쓰던 마리우스는 놀랍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설마 했던 만능자, 페르세우스인가.”
“마리우스 빅트릭스 라키아...!”
헤르메스 파밀리아의 단장, 아스피 알 안드로메다는 경비병이 붙잡아두었던 두 손이 자유로워지자마자, 이를 갈며 허리에 매달아 두었던 조제 폭탄 몇 개를 꺼내어 던지려다가, 레벨 4의 행동보다도 조금 더 빠르게 휘둘러진 경비병의 창대에 뒷목을 얻어맞고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스피는 입속에 들어오는 흙의 맛에 아연한 표정을 지으며 땅을 굴렀다. 비록 뒤를 생각하지 않고 지른 행동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레벨 1에 불과할 경비병이 자신의 움직임을 따라잡은 것이었다.
“나가게, 소로니우스.”
“마리우스 님.”
“나가게. 그리고, 레아 님에겐 알릴 필요 없다. 내가 정리할 테니. 마침 여자도 필요했고.”
“......알겠습니다.”
저 경비병이 쓴 투구 속에, 어떤 얼굴이 존재하는 지를 잘 아는 마리우스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경비병에게 손을 흔들어 퇴거 명령을 내렸다. 경비병은 적을 충분히 무력화시키지도 않고 자신을 내보내는 장군의 모습에 반발하려다가, 추가 명령에 군말 없이 나섰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마리우스!!!”
“비명은 자제해주게. 그리고 지금 상황에선 무슨 짓을 할 거냐, 가 옳지 않나? 만능자?”
“개소리 지껄이지 마. 내가 아는 라키아 왕국의 왕자는 여자 때문에 일을 그르치진 않아-!”
“혹시 모르지. 그 왕자가 힘에 취한 나머지 여자에게 눈을 돌릴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다던지.”
마리우스는 자조하듯이 중얼거리더니 자신이 쓰던 편지에 마침표를 찍고, 그것을 접어 작은 쪽지로 만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짓을 했느냐고 물었던가? 대답해주지. 아무 짓도 안 했다.”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고작 레벨 1의 병사가 나의 투명화를 눈치 채고, 그것도 모자라서 수 십 명이나 단숨에 몰려들어 붙잡아낸다고?! 웃기지 마시지!”
“그래, 웃기는 일이지. 하지만, 라키아 왕국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저 당했을 뿐이지.”
“당했다고...? 무엇을?”
“무엇이건 간에.”
왕자가 쥐고 있던 주먹을 펴자, 손바닥 위에 작은 검은 색의 불길이 피어올랐다. 불길에는 푸른색도 있고, 붉은색도 있으며, 노란색, 주황색도, 또한 광물의 적절한 배합에 따라 초록색, 분홍색등의 각양각색의 불길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아이템 메이커, 아스피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검은색의 불길이라니. 검은색만큼은 무슨 수를 써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또한 아이템 메이커로써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놀랍지? 마녀가 우리 왕국에게 준 것일세.”
“마녀?”
“레아 실비아. 어느 순간 아레스 님의 무녀를 칭하며 나타나, 우리나라를 뿌리부터 삼키기 시작한 마녀의이름이다.”
마리우스는 아직도 떠올리고 있다. 아름다운 소녀가 궁전에 나타난 그 날을.
힘을 원하지 않느냐면서. 오라리오를 떨어트리고 싶지 않느냐면서. 움직이지 못하는 모든 이들 앞에서 전쟁에 굶주린 어리석은 신을 유혹한 소녀의 모습을.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달콤해서, 간단히 가슴에 파고들어왔었다.
마치, 어둠과도 같이-
“그 마녀는 주신 아레스 님부터, 길가에서 놀고 있던 어린 소년에게 이르기까지, 우리 왕국의 모든 이들에게 힘을 나누어주었다. 다섯 번의 원정에 지쳐가던 우리 국민을 구휼하고, 멍청한 주신님과 나의 왕, 아버지에게 제동을 걸어 정치를 안정시켰지. 그러자 당연히도 국고는 차올랐고, 병장기는 늘어났으며, 국민 모두가 안정된 국경 속에서 행복하게 제 할 일을 할 수 있었어. 나도 그때까지는 그 마녀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그것이 뿌리를 물들이는 일이었음을 생각지도 못한 채로, 말이지.”
“뿌리를 물들여...?”
“모두의 신뢰를 받게 된 순간에, 레아는 아레스 님에게 말했다. 이제 소원을 이룰 차례라며, 오라리오를 떨어트릴 때가 왔다면서-”
그 날 이후로 아레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병사들은 레아의 가호를 받았다던 갑옷과 융화하기 시작해, 갑옷 그 자체인 생명체가 되어버렸으며, 검은 화염의 힘에 크게 심취한 장군들 중에서는 머리가 비대해져 괴이한 모습으로 변하게 된 이도 있었다. 땅 자체가 썩어 들어가기 시작해, 많은 수확을 거두어온 농지가 갑작스레 갈라져 밑이 보이지 않는 절벽으로 변하며, 마을 하나, 도시 하나에 해당하는 인구가 갑작스레 사라져 마을이나 도시가 유령화하는 일이 몇 번이고 발생했다.
그런데도, 마녀의 숨결은 이미 왕국 전체를 붙잡고 있어, 누구 하나 큰 불만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이나 아레스 님과 나의 아버지는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겠지만...”
“나에게 이런 것을 알려주는 이유가 무엇이냐, 마리우스.”
“식견이 좁구만, 만능자. 저 깊숙한 어둠 속, 한 천막에 레아가 있다면 이해할 것이냐?”
마리우스는 그리 말하며 아스피에게자신이 접은 쪽지를 건네주었다. 그 순간, 아스피는 마리우스가 오라리오의 힘을 빌어 레아라는 자를 제거해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편지 속에도 아마 같은 내용이 적혀있을 것이다.
“이런, 여자와 시간을 너무 많이 보냈더니, 연초를 한 대 피고 싶어졌어.”
능글맞은 목소리로 그리 말한 마리우스는 오라리오 산 오크 어금니 곰방대에 약초를 가득 채우더니, 손에서 피워 올린 검은 불을 붙이고서, 천막에서 나섰다. 바깥에서 일부러 안쪽의 아스피에게 들으라는 듯이, ‘오라리오의 동태를 파악하러 가겠다, 거기 근위병과, 그쪽의 근위병, 나를 따라 오거라.’하는 큰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바깥에서 발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아스피는 날개달린 신발을 기동시키고, 곧바로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