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6화 〉Interval (56/71)



〈 56화 〉Interval

"...어라?"

오라리오를 눈앞에 둔 어느 곳의 땅. 호화롭게 꾸며진 천막 내부에서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리가 없을 텐데-하고 미간을 좁힌 소녀는 사금색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돌돌 말며 정상적이라면 곧 일어나야할 일을 기다렸다.

하지만, 몇 분을 기다려도 소녀가 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분명 살생석이 사용되었거늘, 오라리오 쪽에선 심연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아니, 아주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평균보다는 조금 더 커다란 심연의 기운이 단 하나 느껴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소녀가 바란 것이 아니었다.

살생석인 줄 알고 좋아라 받아간 이슈타르가 의식에 그 돌을 사용했다면, 한 명의 인간성이 폭주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최소한 이슈타르 파밀리아 모든 단원의 인간성이 폭주할 것이고, 그들의 인간성이 폭주할 적에 가까이 있었을 이들의 인간성 역시 폭주할 것이다. 오라리오의 절반-까지는 무리더라도, 3할 정도는 단번에 심연에 떨어트릴 계획이었는데, 어째서 단 하나의 인간성만 폭주한 것인지, 소녀는 도무지 이해할수가 없었다.


"아, 깨졌다."

이슈타르에게는 살생석이라 알려졌던 인간성의 돌이 깨졌음을 소녀는 크리에이터의 감으로 느꼈다. 그것이 깨어짐과 동시에, 그나마 느껴지던 심연의 기운 역시 모조리 흩어지고 사라져버려, 더 이상 오라리오에 명확히 감지해낼 수 있을 만큼의 심연은 조금도 남지 않게 되었다.


"수는 하나 뿐이었지만, 꽤나 강했는데..."


본래 모든 이슈타르 파밀리아의 인간성을 폭주시킬 셈으로 만들어진돌이었기에, 나름대로 수고를 기해 만든 물건이었다. 그것을 혼자서 받아들인 탓인지, 평균보다도 커다란 심연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 고작 몇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소녀는 더 이상 인간성의 돌이 깨져버린 것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인간성의 돌에서 태어난 심연이 이렇게 빨리 사라져버린 것에 더 큰 의문이 생겨 있었다.
소녀가 아는 한, 그것을 5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사냥해낼 만한 영웅은오라리오에 없었다. 아니, 이 세계와 모든 종족을 통틀어 본다 하더라도, 열 개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설마 의식 도중에 하나가 갑자기 변해버려서... 집중 공격을 받았다면..."

그거다! 소녀가 속으로 소리쳤다.
이슈타르 파밀리아에 심연에 유독 민감한 아이가 하나 있었고, 그 아이가 의식이 완성되기 전에, 의식 도중에 갑자기 심연에 떨어져,괴물로변해버렸고, 그것을 지켜본 이슈타르 파밀리아의 모든 단원들이 놀라 의식을 멈추고, 먼저 괴물을 처단했다- 그리고 그 이후, 인간성의 돌을 파괴했다. 라고 하면 아귀가 어떻게 맞아 떨어진다. 그걸 재빠르게 홀로 처리할 만한 영웅이 그 자리에 떡하니 있었다는 것보다는 현실적이다.

"으음..."


해답을 얻어낸 소녀가 난감하다는 듯이 신음소리를 흘렸다. 어차피 인간성의 돌은 본의 반 장난 반으로 실행한 일이다. 성공하면 좋았겠지만, 어차피 성공해도 오라리오를 통채로 집어삼키는 것은, 그 도시에 살아가는 모험가들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큰 미련은 없었다. 인간성의 돌보다도 더 확실하게 일을 성공시킬 계획이 있었고, 그녀 아래에 믿음직스러운 군대도 있었기에 더욱 미련을 가질 일은 없었다.


"역시 조금은 아쉽네."

"들어가겠습니다, 레아 실비아 님."


소녀가 입을 세모모양으로 삐죽이고서 사금색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돌돌 말고 있을 때,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천막이 들리고, 갑옷을 입은 건장한 장신의 귀공자가 들어왔다.레아라고 불리운 소녀는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들어온 귀공자의 행태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그를 쏘아보았다.

마리우스 빅트릭스 라키아. 이 귀공자는 라키아 왕국에서 유일하다고 좋을 정도로 희소한 '냉정과 침착'을 둘 다 겸비한 사내이자, 어리석은 왕과는 달리 무척이나 현명한 왕자였다.
레아가 이 청년이 조금만 더 멍청했으면-하고 생각한 적이 몇 번인지 모른다. 덕분에 즐겁긴 했지만...


"무례해요, 마리우스."

"왕께서 부르십니다."

무척이나 사무적인 말투. 마리우스는 레아의 말에도 개의치 않고, 할 만만 이어나간다. 레아는 그런 마리우스에게 아름다운 미소를 건네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

"아레스님을 알현하길 바랍니다. 신탁을 받아, 군문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해서."

"...마리우스."

레아가 눈을 감고서, 소년을 타이르는 선생과도 같은 말투로 마리우스를 불렀다. 무척이나 자상한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는 '몇 번을 더 말해야지 알아들어 줄 것이냐'라고 말하는 것 같이, 날카로운 바늘이 숨겨져있었다.

"아레스의 병은 쉽게 나을 병이 아니랍니다. 마리우스도 잘 알고 있지 않나요?"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마리우스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레아에게 말했다.
하지만, 레아는 마리우스의 입에서 그리고-가 흘러 나오는 순간, 마리우스가 이가 빠득이는 소리를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사무적이고 이지적이며 무감각했던 청년은 어디 간 것인지, 증오의 눈길이 마리우스의 눈동자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런 마리우스의 모습이 너무나도 기뻐서, 달콤해서, 레아는 무심코 젖어버릴 것만 같았다.
...같았지만, 마리우스에게 들키지 않도록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네년은 언젠가 반드시 끌어내리고야 말겠다, 주술사."

"네에, 네에, 마리우스 군, 부디 끌어내려 주세요."

해바라기가 피어나는 것만 같은함박웃음을 띤 레아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여 마리우스에게 인사했다. 아름다운 미소를 보면서도, 역겨운 구더기를 보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린 마리우스는 그대로 천막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바깥에 나가버렸다.


"주술사라니. 그런 천박한 아이들과는 다른 걸."


레아는 마리우스에게 반박하듯이 홀로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암술사인 것도 아니었지만.


"후훗."


레아는 웃음을 흘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선 천막 안쪽을 향해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천막 안쪽은 빛 한 줄기 새어들어오지 않아, 이상하리만큼 어두웠지만, 레아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모습으로 어둠을 향해 걸어들어갔다.
레아가 바깥에서 보이는 천막의 모습보다도 더  거리를 걸어나가자, 어둠 속에서 신 하나가 나타났다. 팔다리를 묶인 채, 의자에 앉혀진 신은 죽은 듯이 침묵하고 있었다.

군신 아레스.
한때는 아름다운 미모를 가졌던 남신의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망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레스, 오늘 마리우스 군이 찾아왔어요."

"......"

레아가 부르지만, 아레스는 대답하지 않는다.
어쩌면 들리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레아가 천천히 아레스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두 팔로 안았다. 그제서야 아레스는 누군가 온 것을 알아챈 것인지, 괴성을 지르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의자가 들썩이고, 비명소리가 계속해서 높아지지만, 누구 하나 이 어둠 속에 찾아오지 않는다.

"■■■■■!!!!! ■■■■-!!"

"그 아이, 약한 주제에 나를 끌어내리겠다느니 뭐라느니..."

"■■■■■■■■■■■■■■■!!!!"

"귀여워요, 정말."

레아가 미소지었다.
이형의 괴물이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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