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After War
승자 헤스티아는 아폴론 파밀리아에게서 홈을 포함한 모든 것을 빼았는다. 파밀리아는 해산하고, 원흉 아폴론을 오라리오에서 영원히 추방한다.
승리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아폴론은 패배 뒤에도 비굴하게 헤스티아의 발목을 붙잡고서 한 번만 봐달라고 질질 끌려다니거나 엉엉 울거나 장난이었으니까 철회해달라고 헤스티아에게 매달렸다.
물론 아폴론 때문에 홈이 깔끔하게 날아가버린 헤스티아의 분노는 상상을 초월해 있었다. 울고 불고 매달리는 아폴론의 말은 단 한 마디도 들어주지 않고, 단호하게 아폴론에게 퇴거명령을 내렸다.
역지사지?
그런 말을 할 거라면, 대형 파밀리아의 주인으로서 소형 파밀리아가 겪을 고초를 조금도 생각하지 못한 시점에서 명분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야지.
"만세다! 이것이 바로 기쁨이로구나!"
"만세! 태양 만세!"
"만세! 태, 양... 만세?"
"만세! 만만세!"
아폴론 파밀리아에게서 빼앗은 거대한 파밀리아 홈을 보며 헤스티아가 두 팔 들고 외쳤다. 옆에서 그걸 보고 있던 헤스티아의 아이들 역시 와와 기쁨에 겨워 만세 삼창을 했다.
"일단 리모델링부터 하자꾸나!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해보거라!!"
헤스티아에게는 그나마 아폴론 파밀리아의 옛 단원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어 줄 정도의 아량이 있었다. 파밀리아를 잃고 방랑 모험가가 되어 힘들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가야 할 단원들을 위해서, 자비를 맘껏 베풀어 아폴론 파밀리아의 창고에 있던 금전들을 모두 나누어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폴론 취향의 파밀리아 홈을 완전히 갈아엎을 수 있을 만큼 많은 돈이 아폴론의 개인창고에서 또 발견된 것이었다.
이런 금전을 또 언제 만져볼까.
하지만, 헤스티아는 망설임 없이 그 돈을 전부 아이들을 위해서 쓰기로 했다.
"목욕탕! 릴리는 커다란 목욕탕이 갖고 싶어요!"
"저..., 저도, 염치 없지만 그 의견에 동의하겠습니다..."
"오오! 그럼 나는 개인 대장간이 가지고 싶구만!"
"저는 대련장이 가지고 싶습니다, 주신님!"
"그래그래, 마음껏 말하여라! 저 창고 안에는 사람 한 둘 정도는 간단히 헤엄칠 수 있을 만큼의 발리스가 쌓여 있느니라!"
"리, 릴리는 다른 거 말고 그걸 하고 싶어요! 돈에서 헤엄치고 싶어요!"
여기저기서 돈 쓸 계획으로 눈이 발리스 모양으로 바뀌어가던 사이, 미코토는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둘러보다가, 벨을 불러 그에게 귓속말로 질문했다.
"벨 님, 에스트 님은 어디에 계신지..."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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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오라리오 바깥이라고는 해도, 시, 신을 공격할 셈이냐, 미친 개가!!"
아폴론이 비명질렀다.
오라리오 바깥으로 추방된 주신을 따라가기로 결정한 오레스테스와 히아킨토스는 사이좋게 기절해 쓰러져 있었다. 모든 것을 잃고, 종자마저도 잃고, 완벽하게 홀몸이 된 아폴론은 습격자의 모습을 보며 덜덜 떨었다. 떨면서도 큰소리를 칠 만큼의 기운이 남아있다는 것이 과연 신 답다면 신 답긴 다웠다.
"흥흥흐흥흥흐흥-♪"
봉인자의 핏빛 로브를 입고, 봉인자의 가면을 쓴 에스트가 생명 수확자의 낫을 어깨에 짊어지고서 콧노래를 부르며 저벅저벅 아폴론에게 다가갔다. 에스트가 앞으로 한 걸음 걸어나갈 때마다, 아폴론이 한 발자국 뒤로 움츠러들었다.
"너는 내가 가장 마지막에 죽이겠다고 약속했었지."
"신을 죽이면 어, 어떻게 될지 알고서 그,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건 사실이다."
한 발자국,돌부리에 발이 걸린 아폴론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에스트는 씨익 웃으며 낫을 뻗어, 아폴론의 뒷목에 날을 걸었다. 아폴론은 수확당하는 보리의 기분을 느끼며, 아르카넘을 해방하려 했다. 어차피 죽기 직전에 천계 송환을 당하던가, 아르카넘을 해방해 천계 송환을 당하던가, 똑같은 일이지만, 아폴론은 최대한 덜 아픈 쪽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르카넘이 나오질 않았다.
"뭔가 뜻대로 되지 않은 얼굴인데?"
"히, 히이이익?! 무, 무슨 짓을 한거냐, 이 괴물!!"
"괴물은 괴물이지. 죽지 않으니까."
에스트가 아폴론의 가슴팍에 발을 올렸다. 아폴론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두 팔로 에스트의 팔을 밀어내며 살기 위해서 발악하기 시작했다. 아르카넘이 발현되지 않는 지금 상황이라면 천계 송환의 술식도 발동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목을 베였다간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 죽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 살려줘, 살려다오... 미안하다, 죄송합니다... 살려줘, 살려주서에에엑"
에스트의 발에 힘이 들어간다. 아폴론이 뒷목에 맞닿은 낫의 차가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차가움이 어느 순간 살을 파고들어 따뜻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순간, 아폴론은 자존심도, 신으로서의 위엄, 근엄 다 내다버리고 에스트에게 빌기 시작했다.
에스트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의 가슴에서 발을 떼었다. 눈물과 콧물이 가득한 아폴론의 얼굴이 조금씩 조금씩 펴지기 시작한다.
"에, 에헤헤, 에흐흑, 으흐흑..."
실성한 듯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모를 소리를 뱉어내기 시작한 아폴론을 보며, 에스트는 잠시 들어 올렸었던 발을 그대로 내려찍었다. 아폴론은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찍는 에스트의 발을 보며, 눈을 크게 뜬 채로 기절해버렸다.
목이 낫의 날에 베이기 직전에, 낫을 치워두었던 것이었다.
"고마워, 솔라."
"...별 것 아닌 일이었네."
에스트가 낫을 빙글 돌려등에 짊어지며, 이 자리에 없는 인물의 이름을 부르자, 나무 뒤에서 숨어있던 솔라가 걸어나왔다. 이미 양 어깨에 히아킨토스와 오레스테스를 짊어지고 있던 그는 조용히 에스트를 스쳐지나가, 아폴론을 오레스테스의 위에 들쳐메었다.
침묵의 금칙. 솔라가 사용한 기적의 이름이었다. 이것이 아폴론의 신력 행사와 송환 술식의 가동을 막아낸것뿐이었다.
"이 녀석들은 내가 있던 곳에 데려가도록 하겠네."
"...오라리오에는 오지 않는거야?"
"벨과도 간만에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그대와도 회포를 풀고 싶지만, 공교롭게도 감자의 수확철이 다가오고 있어서 말이지. 늦으면 맛이 없어진다네."
"농사꾼이 다 되었네."
"오래 살다 보면 이렇게 되기 마련일세, 오랜 친구여."
에스트는 씁쓸한 표정으로 솔라의 모습을 보았다. 그를 말릴 생각은 없었다.
옛날부터 그래왔다. 모든 이들은 자신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연이 된다면 다시 만나게 될것이고, 아니라면 영영 헤어지게 될 뿐이다. 불사자의 인연이란 그 뿐이다.
"걱정말게. 다시 만날 날이 다시 올 걸세."
"걱정한 적 없어."
에스트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아, 그렇지. 이걸 받게나."
솔라는 사람 셋을 짊어지고, 살짝 힘겨운 모습으로 품속에서 소울 하나를 꺼내어 에스트에게 넘겼다. 아주 새까만 색을 지닌 그 소울은, 한 때 보았던 아르토리우스의 것과 마누스의 것을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30년 정도 전인가..., 흑룡을 지배하려고 하던 자의 것이네. 나는 그녀를 토벌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대신 흑룡은 나의 옛 친구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말았지."
"...이걸 왜 나에게?"
"나보다는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이 옳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네."
"일단..., 일단은 고마워."
에스트는 심연에 잠식된, 아니, 심연 그 자체인 듯한 소울을 무한의 상자에 넣으며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런 것이 있었다면 다크 레이스의 코스프레를 하던 자신을 맹렬하게 공격해온 솔라의 분노도 이해할 만 했던 것이었다.
"이만 가보겠네."
"...솔라."
"무엇인가?"
떠나려던 솔라를 에스트가 자신도 모르게 붙들어 세웠다. 솔라가 농사꾼이 다 되어버린 것처럼, 자신도 어쩌면 헤스티아에게서 너무 온기를 많이 받아버린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될 정도였다.
"태양은 찾았어?"
"태양은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 있네."
...농사꾼이 아니라 철학자가 되어버렸나.
솔라는 아주 오랜 여행길을 걸어온 끝에, 나름대로의 답을 낸 듯한 모습이었다.
대답을 마친 솔라가 등을 돌려 멀어져간다. 에스트는 역시 두 번 그를 붙잡지 않고, 등을 돌려 오라리오로 향했다. 귀가가 늦어지면 헤스티아가 화를 낼것이다.
"...장작의 왕에게 태양이 있기를."
에스트가 등을 돌린 것을 확인한 솔라는, 오라리오를 향해 떠나가는 에스트를 향해, 딱 한 번만 더 발을 멈추고서, 그녀의 축복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