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This War Game of Vesta
"오늘도 헤스티아는 나오지 않은 것이냐..."
오라리오의 중앙, 우뚝 솟은 바벨의 30층에서 장장 4일째 계속된 신회. 그 중심에서 아폴론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전쟁 유희를 신청해놓고서, 몸이 아프다는 것을 핑계로 신회에 계속해서 빠지고 있었다.
이것이 시간을 벌기 위한 계책임을 알면서도 아폴론은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전쟁 유희를 벌이기로 한 이상, 쌍방 불가침의 조약이 맺어지니 어떻게 헤스티아를 닥달할 방법도 없었고, 쌍방의 합의로 전쟁 유희의 방향을 정해야 하니,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멋대로 신회의 의제를 결정해버릴 수도 없었다.
"이대로 오라리오 바깥으로 도주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이야아! 늦어서 미안하다!"
아폴론이 이를 뿌득뿌득 갈다가, 혹시 모를 If의 일에 초조해지기 시작한 순간, 대문이 콰앙 열리고, 병에 걸렸다는 핑계를 댄 것 치고는 너무나도 멀쩡해보이는 헤스티아가 미아흐를 대동하고 신회에 나타났다.
드디어 나타나셨나. 아폴론이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헤스티아를 불렀다.
"아프다며 신회를 며칠씩이나 빠진 것 치고는 아주 괜찮아보이는구나, 헤스티아!"
"으음, 너의 권속이 날 너무 무례하게 대하는 탓에, 죽음의 늪을 방황하고 왔다! 간만에 만난 카론과 하데스는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더구나!"
"큰일이었지, 헤스티아. 정말로 강을 건너는 줄 알았어."
병기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기색으로 외치는 헤스티아와, 그런 헤스티아를 옹호하듯이, 그녀를 간병했다던 약학의 신 미아흐가 뻔뻔스러운 얼굴로 대꾸를 넣어주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폴론에게는 무리하게 헤스티아 파밀리아를 밀어붙였다는 변명할 수 없는 팩트가 있었기 때문에, 얄미운 녀석, 하고 속으로 헤스티아의 욕을 뱉을 뿐이었다.
"뭐,그런 건 아무래도 좋데이, 꼬맹이. 아폴론 니도 작작 화 풀어레이. 왔으니까 된 거 아니겠나, 머."
회의의 주재를 맡은 로키가 웃으며 아폴론과 헤스티아의 불꽃 튀는 눈싸움을 말렸다. 로키는 헤스티아가 앞으로 며칠은 더 벌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생각보다 이른 출석에 오히려 놀라고 있었다. 마음을 편하게 먹고 있었거늘, 일찍 나타나주어서 짜증이 덜었다라고 할까-
사실 헤스티아는 벨의 수련을 위해서도 조금 더 날짜를 벌 생각이었으나, 며칠 사이 파밀리아 홈 구석에 틀어박혀서 저주의 목소리를 뱉어내다 못해 아폴론 신상을 만들어 깨부수기 시작한 에스트가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기에 도망쳐나온 격이나 마찬가지였다.
헤스티아 왈, 살인 충동이란 것은 중학생 2학년이나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늘, 실제로 마주하고 보니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로 위험하고 정말로 무서운 것이었다-라고.
"회의 시작하제이."
"우리가 이기면 벨 크라넬을 받겠다."
"...단도직입적이구마."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하자고. 나중에 변명이나 늘어놓으면서 다른 일 생기지 않도록. ...아, 뭐, 좋아. 우리가 진다면 헤스티아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도록 하지."
"좋아, 확실히 들었다, 아폴론. 너야말로 다른 말하기 없기다."
자기가 진다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하지 않고서, 아폴론이 선언했다. 모든 것을 들어주도록 하겠다고. 언뜻 보기에는 파격적인 조건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휘파람 불며 자신감 과잉이라고 그를 야유하지 못할 정도로, 헤스티아 파밀리아와 아폴론 파밀리아 사이의 '외견적의' 격차는 거대했다. 단원이 세 자릿수를 넘기는 거대 파밀리아가 힘을 이용해, 고작 3명 뿐인 파밀리아에서 한명을 앗아가겠다고 하는데, 패배할 경우에는 그 정도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반증이었다.
서기를 맡고 있던 무사이, 역사 기록자의 칼라이아가 깃털펜을 허공에 휘적여, 빛나는 글씨가 모든 이들에게 보이도록 했다.
아폴론 - 벨 크라넬
헤스티아 - 헤스티아가 원하는 모든 것
"저 하늘에 빛나는 태양에 걸고."
"아케론, 코퀴토스, 플레게톤, 레테, 그리고 스틱스에게 걸고."
아폴론과 헤스티아가 차례로 서약했다. 서약에 자신의 상징을 거는 건 치사하지 않냐며 여기저기서 아폴론을 야유하는 소리가 나왔지만, 어차피 이렇게 많은 신들이 보는 앞에선 뭘 걸던 간에 이미 계약은 끝난 것이었다.
"자, 카믄, 전쟁 방식은 뭘로 할끼고?"
"1대 1. 일기토다."
"거 좋구마이. 투기장에 단 둘만을 몰아넣고서 싸우게 한다... 키야, 끓어오르겠는데?"
헤스티아의 제안에 여기저기서 찬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헤스티아의 상황을 잘 아는 헤파이스토스와 타케미카즈치가 그 여세를 몰아 바람잡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아폴론은 넘어가지 않았다. 며칠 전, 그의 파밀리아에 단독으로 쳐들어와, 열이 넘는 단원을 못 쓰게 만든그 여자를 생각해서라도 1대 1 일기토는 절대 거절이었다.
"파밀리아 숫자가 적은 건 너의 나태함 때문이다. 내가 사정 봐줄 일이 아니야."
"...윽."
헤스티아가 신음성을 흘렸다. 안 될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태만함을 근거삼아서 찔러 들어올 줄이야. 물론 벨과 에스트와 단란하게 살아가는 파밀리아 생활이 마음에 들었기에, 딱히 파밀리아 단원을 늘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지만, 그래도 찔린 부위가 시큰시큰했다.
"제비뽑기 해, 그냥."
옆에서 시큰둥한 눈으로 보고 있던 헤르메스가 중얼거렸다. 그 수를 왜 생각하지 못했냐는듯이, 금세 신들이 제비를 만들어 헤스티아와 아폴론의 앞으로 대령했다.
"내가 뽑지."
"거절한다."
"...윽, 미아흐, 뽑아다오!"
"절대 거절한다. 네 입김이 닿은 신따위, 인정할까보냐."
아폴론과 헤스티아는 눈싸움을 다시 시작했다가,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빨리도 깨닫고, 한 목소리로 한 신의 이름을 불렀다.
""헤르메스!""
"나? ...뭐, 그럼 뽑을까?"
방랑자 신. 누구보다 이 오라리오의 형세에 관련이 없다고 여겨지는 남신이 머쓱한 표정으로 제비에 다가왔다. 아폴론과는 천계에서 소를 훔치고 리라를 만들고 하다가 어째 친해져버렸고, 헤스티아는 벨 크라넬 관련으로 연이 있고... 어쩔까, 고민하던 헤르메스는 그냥 머릿속을 텅 비워버린 채로 상자에 손을 넣어, 제비를 하나 뽑았다.
"...음."
"무엇이냐, 헤르메스!!"
제비를 보는 헤르메스에게, 헤스티아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일기토. 일기토가 안된다면 시가전이라도...
"공성전."
"Tlqkf."
"아하하하하하하!!! 태양도 나의 편을 드는구나! 네 빈약한 파밀리아로는 수성이 불가능하겠지! 좋다, 공성은 양보하마!!"
헤르메스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헤스티아의 입에서 걸쭉하게 검열된 욕설이 흘러나오고, 아폴론이 쾌활하게 껄껄 웃었다. 진형전도 돌파전도 아니고, 최악 그 자체가 흘러나왔다. 한 전략가는 공성을 하는 입장에서 수성에 돌입한 적을 깨부수기 위해선, 3배에 달하는 병력이 필요하다 했거늘, 헤스티아 파밀리아에게 있는 병력이라고는 아폴론의 1/3배도 아니고, 1/33배보다도 낮은 숫자의 병력 뿐이었다.
그렇다고 수성을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헤스티아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으음, 이거 모처럼만의 전쟁 유희가 재미없겠는데."
"뭐야, 헤르메스. 불만 있냐?"
"그래, 이런 걸로 하자. 다른 파밀리아에서 몇 명 정도 헤스티아를 도와줄-"
"개소리 마라, 헤르메스. 네가 소를 훔치는 방식은 잘 알고 있어."
아폴론이 일갈했다. 최악의 제비를 뽑아줘버려서 미안한 감정에 헤스티아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말문을 열었거늘, 단번에 깨갱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재미 없으면 곤란하데이, 아폴론. 1대 100이데이? 우리 아이즈 땅이 와도 못 이긴데이?"
"하. 그렇게 치면 1대 75나 1대 50이나 다를 것이 뭐가 있나! 아니면 뭐냐. 설마, 헤스티아에게 99의 지원을 해주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로키."
"내가 저 꼬맹이에게 무슨 정이 있다고 그캐야하나, 아폴론. 입 조심하래이."
"흥... 트릭스터 놈이..."
"혹시 겁이라도 먹은거야, 아폴론?"
로키와 아폴론 사이에 자그마하게 피어오른 불길이 흩어져 사라지려는 순간, 옆에서 명백하게 비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또 누구냐. 아폴론이 고개를 돌렸다. 벨 크라넬을 위해서라면, 완벽한 승리를 얻어야만 했다. 그를 위해선, 이 의제에서부터 완벽한 승리를-
"프레이야?"
"간만에 신회에 놀러 나왔는데, 겁쟁이 신이랑 가난한 신의 싸움이라니... 재미없어. 돌아갈래."
"자, 잠깐... 겁쟁이라고?! 누가, 내가 말이냐!?"
프레이야의 목소리를 듣고, 아폴론의 이마에 혈관이 튀어나왔다. 벨이 사랑스러운 만큼, 프레이야도 달콤한 것이었다. 이대로 겁쟁이 낙인이 찍힌다면, 하계에서도, 설령 천계에 올라가서도, 프레이야의 맛을 볼 일은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
"조, 좋다! 한 명 인정하마! 대신, 오라리오 바깥의 모험가로 한정하지!"
"그나마 겁쟁이는 아닌가... 좋아, 조금 더 구경해줄게."
프레이야는 인심쓴다는 듯이 일어섰던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녀 역시 무료했던 것이었다.자질을 가진 아이는 보이지 않고, 파밀리아는 최강에 군림한 채로 정체해버렸다. 간만에 유희를 즐길만한 일이 발생했는데, 쉽게 넘어가는 건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다만, 헤스티아, 너의 아이가나흘 전에 우리 파밀리아를 습격한 것, 잊지 않았겠지!"
"에... 에...? 그... 그렇긴, 하지..."
'그, 그걸 걸고 넘어질 생각이냐!!'
헤스티아의 페이즈가 명백하게 흐트러졌다. 그것은 에스트를 관리 못 한 헤스티아의 잘못이 무진장 컸다. 아폴론이 헤스티아의 결석을 용납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헤스티아 역시 아폴론이 무슨 말을 해도 용납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우리 아이 열 다섯이 못 쓰게 되었다. 모두가 아직 미약하고 미숙한 아이였다! 약한 녀석을 노려서 치다니... 졸렬한 것도 정도가 있지!"
"네가 말할 처지냐, 아폴론!"
"하여간, 우리도 외부에서 모험가 하나를 데려오도록 하지. 이의는 없겠지!!"
"이익... 좋아, 멋대로 해보라고!!"
헤스티아가 악을 쓰듯이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