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Omen of War
검은 정장에, 단정한 포니테일. 여장이라기보다는 남장. 에스트가 옷을 다 차려입고 나가니,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미아흐가 귀부인만 세 명이군-이라고 악의 하나 섞이지 않은 말로 헤스티아에게 태클을 걸었던 것이다.
결국 이렇게 입을 것이었으면 처음부터 헤스티아의 인형놀이에 어울려 줄 것 없이, 체스터의 롱코트를 입고 왔어도 되었을 텐데- 하며 에스트는 자신의 모습에 별 감흥없는 감상을 품었다. 물론 체스터의 롱코트는 옷이라고 하기에는 방어구에 가까우니, 어느 쪽이 더 편하냐고 한다면야 이쪽이 훨씬 편하기야 편했다.
이랴, 이랴 하는 소리. 마차 바퀴의 덜컹거림이 줄어들다가 이내 멈추었다. 말이 힘차게 우는 소리가 들려오자, 여기까지 오는 내내 기대된다면서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띄우고 창밖 구경에 몰두해 있던 헤스티아가 고개를 휙하고 돌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같은 표정으로 에스트를 빠안히 바라보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걸까. 에스트는 가슴 속에 물음표를 띄웠다. 그렇게 기대하던 표정이었으니, 도착하자마자 마차에서 뛰쳐나갈 줄 알았더니, 왜 뜸을 들이고 있는 걸까. 영문을 몰랐다.
"......지이이."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윽.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하게 두어야겠느냐?!"
물어보니 갑자기 화냈다. 더더욱 영문을 모르겠다.
그렇게 기묘한 시선이 이어지기를 몇 초, 에스트는 이대로 마차 안에서 시간을 죽이는 것도 마부에게 실례라고 생각했다.먼저 문을 열고 나서려다가-, 문에 달린 창문을 통해 막 마차에서 내리는 미아흐와 나자의 모습을 보았다.
미아흐가 먼저 문을 열고 내려오더니, 뒤돌아보고서 마차에서 내려오는 나자의 손을 붙잡아 내려오는 것을 도와주었다.
"아하... 그랬구나?"
"뭐, 무엇이냐, 그 표정은. 괜히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냥."
에스트가 열려던 문을 마저 열고 마차에서 내렸다. 구두가 땅에 또각, 하고 맑은 소리를 내는 순간 에스트는 몸을 돌려 마차 안에서 볼을 부풀린 채 앉아있는 헤스티아에게 손을 뻗었다. 그저 미아흐가 했던 행동을 따라한 것뿐이었지만, 에스트의 동작에 망설임은 한 끝 만큼도 없었다.
남을 따라하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었기에.
"그만 내려오시지요, 귀여운 레이디."
"이익...! 기대하던 것이 나오긴 나왔는데 어째 더욱 열 받는구나!"
헤스티아는 화를 내면서도 에스트의 손을 붙잡고 마차에서 내려왔다. 에스트는 킥킥 웃으면서 볼을 더 크게 부풀리고서 앞서 나가기 시작한 헤스티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귀여운 레이디? 큭... 쿡쿡..."
"너 임마..."
곧바로 반응이 돌아온다. 재밌네. 에스트가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나저나 왜 계속 귀엽다고만 하는 것이냐! 아름답다고 해도 좋지 않느냐!"
헤스티아가 마린 블루색 드레스를 자랑하듯 스커트 자락을 흔들었다. 그 말에, 웃고만 있던 에스트가 갑자기 정색했다. 각도에 따라서는 조금 파랗게 질렸다고 볼 수도 있을 정도로 굳은 얼굴이었다.
"안 돼."
"응?"
"나 말야, 더 이상은 아가씨의 수식어로 '아름다운'을 쓸 수 없게 되었어."
에스트는 체스터의 가면 저 편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아가씨의 모습과 헤스티아의 얼굴을 비교해보고, 몸을 살짝 떨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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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내부는 으리으리했다. 눈 가는 곳마다 휘황찬란한 조각이니 그림이니 장식이니 하는 것들이 걸려 있었고, 샹들리에니 보석 촛대니 하는 것들 덕분에 사방이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천장은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보아야 할 정도로 높게 지어져 있었고, 바닥은 더러움을 모르는 새빨간 카펫이 정갈하면서도 화려한 모습으로 깔려있었다.
"아노르론도 같아..."
"응? 뭐라고 했느냐, 에스트?"
"아니, 혼잣말."
신들이 가득한 것도 그렇고, 분위기로 먼저 사람을 압도하려는 것도 그렇고, 아노르 론도의 건물들과 이 건물들은 닮은 점이 많았다. 어느 쪽이 더 낫고, 어느 쪽이 더 덜하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닮은 꼴을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여기 천장은 거인족이 사는 것도 아닌데 저렇게 높게 올릴 이유가 뭐가 있었을까, 하고 에스트가 중얼거렸다.
천장..., 회화 수호자..., 낙사..., 윽, 머리가.
"괜찮느냐? 아까부터 혼잣말이 많구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을 뿐이야."
에스트의 머리 속에서 펼쳐져나간 마인드 맵이 '은기사 저격구간' 쯤에 다다랐을 때, 다행히도 헤스티아가 재빨리 끊어주었다. 만약 헤스티아가 끊지 않았더라면, 에스트는 추억에게 압사당해 한 번 정신적으로 죽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머, 왔네."
"벨을 데리고 올 줄 알았더니, 의외인걸.."
"내리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는가 걱정했다고, 헤스티아."
"헤파이스토스! 타케!"
친우의 부름에 기쁜 기색 만만으로 헤스티아가 달려갔다. 에스트에게 있어선 나자와 미아흐를 제외하면 별달리 접점이 없는 이들이었기에, 헤스티아를 알아서 놀게 내버려두고 정원 구경이나 갈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나자가 그런 에스트의 생각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인지, 손을 흔들어서 불렀다.
"타케가 데려온 것은 미코토구나. 그 때는 신세 많이 졌다."
"아, 아닙니다, 헤스티아 님."
검은 머리카락을 비녀로 고정하고, 동양풍의 옷을 입은 소녀가 당치도 않다는 듯이 헤스티아에게 손사래를 쳤다.
이름은 아마도 야마토 미코토. 하늘을 날던 파란머리와 엘프 점원 류 리온과 함께 벨을 구하기 위해서 18층까지 내려갔었던 이들 중 한 명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비록 그 당시에는 에스트가 다 죽어가고 있었던 탓에, 그녀와 함께 싸우는 일은 없었지만, 18층에서 다시 지상으로 올라올 때 본 적이 있는 듯한 얼굴이긴 했다.
"그런데, 헤파이스토스의 아이는? 보이지가 않네."
"츠바키? 녀석, 날 내버려두고 정원에 놀러갔어. 걔도 참 괴짜라니까."
...뭔가 마음이 통할 것 같아.
에스트가 중얼거렸다. 저번 헤스티아의 감자돌이 노점 앞에서 아이즈 발렌슈타인과 만났을 때 들었던 기분이기도 했고, 최하층에서 탐식의 드래곤을 사냥하기 직전에, 그리고 계승의 제사장에서 불사의 도시 사이의 다리 아래에서 제나의 도날을 만났을 때 두 번이나 느꼈던 기분이기도 했다.
"뭐야, 뭐야?! 많이 모였잖아! 나도 끼워 줘!"
"...뭐야, 저거랑 언제 그렇게 친한 사이가 되었냐, 헤스티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딱 봐도 헤파이스토스를 찾아온 것 아니겠느냐."
"나도 볼 일 없는걸. 미아흐, 너야?"
"아니, 글쎄... 조금도 짐작가는 일이 없어. 나자, 혹시 있느냐?"
"아뇨, 손님으로도 오신 적 없으세요."
헤르메스,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마자 침몰 위기. 뒤에서 아스피가 자업자득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썩어도 준치, 썩어도 신이라고.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곧장 심해로 침몰해버렸겠지만, 헤르메스는 반쯤 망가져버린 웃는 얼굴을 끝까지 지켜내고서 계속 말을 이었다.
"으음. 나자 쨩 아름답네~! 미코토는 전통 복장이구나. 나 알아, 기-모노라는 거지?! 아, 헤파이스토스, 아까 츠바키 살짝 보고 왔는데, 오늘도 쾌활한 게 아주 좋더라!"
""...윽.""
"하하. 헤르메스도 오늘 멋진데."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 신도 예외는 아니다. 신 본인을 칭찬했더라면 효과가 덜했겠지만, 일부러 권속을 칭찬하는 것이 역시 처세의 신 답다고 할 만했다. 헤파이스토스도 타케미카즈치도 할 말을 잃은 채 신음소리를 흘리고 있을 때, 미아흐만이 칭찬에 웃음과 칭찬으로 화답해주었다.
"잠깐, 우리 에스트에 관한 건 왜 없느냐!"
"...미안 헤스티아. 레-디를 두고 기사님을 칭찬할 수는 없잖아. 뭐어... 오늘도 아름다워, 헤스티아."
"뭐냐, 그 레-디라는 건! 뭔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화가 난다!"
헤스티아가 버럭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