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Omen of War
오라리오의 밤거리는 휘황찬란하게 빛난다.
오라리오와 던전의 명물, 가지각색으로 빛나는 마석등이 어디에서나 어둠을 내몰고, 빛 아래에선 연극장의 자리를 약속 받지 못한 연회계 파밀리아-특히 무사이-의 아이들이 거리 곳곳으로 나와 자신의 이름 없는 노래를 뽐낸다. 던전에서의 일과를 마친 모험가들이 더해진 인파는 오라리오가 자랑하는 메인 스트리트의 넓음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었고, 길가에 늘어선 많은 고급 요정과 카지노의 접객원들은 인산인해의 혼잡함에도 웃음을 지우지 않고 손님을 맞이했다.
짝이 있는 자는 서로 마주하고서 사랑을 속삭이고, 동료가 있는 자는 한 마음으로 팔짱을 끼고서 노래를 부르며 나아가고, 초조히 기다리던 이는 함박웃음으로 친우를 맞이한다.
어쩌면-,
오라리오의 밤거리를 밝히는 것은 저 마석등이 아니라, 거리를 걷는 자들의 활기가 아닐까, 하고 홀로 밤거리를 걷던 에스트가 생각했다.
아직 지워지지 않은 기억 속에서, 에스트가 걸어 나갈 수 있었던 거리는 언제나 멸망해버린 도시의 거리였으며, 멸망해가는 도시의 거리였으며, 돌아올 이를 잃은 채 검은 태양이 만들어낸 환영만이 남아 배회하던 도시의 거리였다. 어느 쪽도 망자로 가득했고, 그 거리들을 의지를 갖고서 걸어나가는 자들 역시 모두 망자나 다름없는 불사자들이었다.
활기가 있을 리가 없었다.
태양의 기사도, 카타리나의 기사도, 앞은 빛나고 있었을지언정, 그 뒷모습은-, 힘 없이 멸망해가는 세계를 바라보던 그 뒷모습은 언제나 처연한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그 세계를 비추던 것이 거짓된 검은 태양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지.
세계를 비추는 것은 반짝이는 빛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의 활기이기에.
에스트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고개를 내리고, 후드를 눌러 덮어썼다. 신들이 밤하늘에 박아넣은 총총한 별빛마저도 하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피워 올린 열기에 그 빛을 잃고 있었다.
그래, 이곳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지금은 옛날 생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었다.
메인 스트리트에서 빠져나와 주광색으로 빛나는 뒷골목을 걸어나간다. 에스트가 거점으로 삼은 뒷골목은 파밀리아 홈에서 가까운 북쪽과 서쪽 메인 스트리트 인근의 뒷골목이기에, 이번에 찾아오게된 남쪽 메인스트리트 근처의 뒷골목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벨프가 자신의 랭크 업 파티라면 자신이 쏴야 한다면서, 그녀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찾아올 일이 앞으로도 없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여긴가...?"
잘 알려지지 않은 파밀리아의 앰블렘과 새빨간 벌의 문양. 뒷골목이라는 입지 탓인지 풍요의 여주인과 비교하기엔 확실히 작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많은 모험가들이 발에 치일 정도로 안에 들어서서 술을 벌컥벌컥 넘기거나 시끄럽게 소리지르거나 하고 있었다.
안쪽, 분위기에 편승해 큰 소리로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벨과 벨프의 모습이 보였다. 릴리는 조금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아보였지만, 분위기에 압도당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에스트는 짐작했다.
"안녕하세요! 한 분이신가요?"
"오! 오셨구만! 릴리아 쨩, 그 분 이쪽이야!"
"아하하... 안내해드릴게요."
들떠서 기다리고 있던 벨프는 문에 달린 종이 딸랑거리는 순간 에스트를 시야에 잡아내었고, 곧바로 그녀를 불렀다. 파룸 종업원은 처음 보는 손님을 맞이하는 데, 옆에서 쨩이 붙은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이 멋쩍다는 듯이 웃었다.
"에스트 씨. 별 일 있지는 않았죠?"
벨이 걱정 섞인 목소리로 에스트에게 물었다.
추정 레벨 7 정도 되는 적에게 마지막 타격을 넣은 것은 막 레벨 2가 된 리틀 루키와, 레벨 1의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듣보 소녀였다. 심지어 둘 다 헤스티아 파밀리아 소속이다-라는 것이 모험가들에게 알려지자, 헤스티아가 비리를 저지른 것이 아니냐는 말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고, 끝내 길드가 나선 것이었다.
벨이야 아르고 노트가 길드에게 알려져 있으니, 한정적인 상황에서는 레벨 7의 몬스터에게도 데미지를 줄 가능성이 있다-해서 조사에서 벗어났지만, 에스트 같은 경우는 쉽게 혐의를 벗을 수 있었던 게 아니었다. 레벨이 1이며, 전 랭크가 I50언저리인 에스트가 어떻게 레벨 4인 아스피 알 안드로메다가 데미지를 주지 못한 몬스터를 화살꽂이로 만들 수가 있느냐, 가 주된 문제였다.
요컨대, 영세 파밀리아인 헤스티아 파밀리아에서 스테이터스를 숨기고 탈세를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다 박살내고 왔어."
"예?"
여섯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동그랗게 변한다. 박살내었다, 무엇을? 길드를?
길드를 상대로 싸움을 거는것은 오라리오 전체에게 전쟁을 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비록 길드 자체는 아무런 힘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길드가 무너지는 순간, 오라리오의 균형이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한 로키 파밀리아와 프레이아 파밀리아가 들고 일어나 싸악 쓸어버리고 말 것이다.
"길드 말고, 길드 바깥에서 시비 털던 녀석들."
"요컨대, 조사받는다고 늦어진 게 아니라..."
"그것들을 길드 눈이 안 닿는 뒷골목까지 끌고가느라 늦었다는 소리...입니까?"
벨프가 설마, 하면서도 말을 끝까지 이었다. 에스트는 뭘 새삼스럽게 묻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나타내었다.
"그 자리에서 박살내면 헤스티아에게 혼나잖아."
그 모습에 릴리는 머리를 붙잡았고, 벨프는 녀석들이 박살난 것이 참 고소하다는 듯이, 혹은 에스트의 의외의 일면이 재미있다는 듯이 와하하 웃었으며, 벨은 착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딱히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에스트 본인의 입에서 나온 것만 해도 벌써 6번의 싸움이 벌어졌던 것이다. 열폭하던 모험가들이 얼마나 많이 찌그러졌는지 셀 수도 없었고, 굳이 캐물어서 세고 싶지도 않았다.
"벌꿀주 네 잔과 한 통, 불길 소세지, 불길 훈제 닭, 불길 잉어찜 나왔습니다. 맛있게 즐겨주세요."
"뭐, 뭐, 그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더 듣기로 하고, 일단 건배하죠."
벨프가 벌꿀주가 담겨나온 나무잔을 들었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잔을 들었다.
기쁜 날이니까.
"건배!!"
술잔을 마주치고, 에스트는 나무잔에 담긴 술을 아주 조금만 홀짝였다.
듣자 하니, 새빨간 벌의 문양에 어울리게도 아주 새빨간 벌꿀주가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것 같았다. 특히나 드워프들은 잊고 있던 고향의 맛이라면서 껌뻑 죽는다는데, 쉽사리 취해서는 안되는 체질인 에스트로서는 남들처럼 술을 벌컥벌컥 들이킬 수는 없었다.
지크마이어는 잘만 들이키고 있었던 것 같지만, 안전을 위해서라도 자제하는 쪽이 편했다. 스스로를 잊는다는 것은 불사자에게 무엇보다도 맹독이었기에.
왁자지껄하게 웃는다. 벨프가 상급 단야사가 되었다는 것과, 헤스티아 파밀리아가 부담하게 된 벌금. 헤르메스 파밀리아도 벌금을 부담하게 되었다가, 랭크를 숨겨 탈세를 자행하고 있던 것까지 걸려 완전 걸레짝이 되어버렸다던가. 이야깃거리는 많았고, 마실 것도 많았으며, 먹을 것도 많았다.
"헤스티아가 없는 게 아쉽네."
"...저희 주신님이 '얌전히 일이나 하러 가'라고 말했거든요."
"아..."
그럼 그렇지. 그 헤스티아가 하계의 아이들이 노는 곳에 내가 들 수는 없구나! 하면서 빠질 리가 없었다. 분명 엉엉 울면서 가게의 주인장에게 질질 끌려갔겠지. 그 모습이 쉽게 상상이 되어서, 에스트가 쿡쿡 웃었다.
그 때였다.
"야아! 저거 그 헤스티아 파밀리아 아냐?!"
"키야아, 토끼 새끼. 거 도망치는 거 하나는 잘 하게 생겼네. 분명 도망치고 도망치다 막타만 쳐먹은 비겁자 새끼일 게 틀림없어."
"막타를 쳐먹기는 개뿔이. 저건 한 거 아무 것도 없어. 내가 봤어! 그때 막타를 친 건 엄청 커다란 갑옷을 입은 전사였다고."
갑자기 피어오른 큰소리에, 벨이 슬쩍 돌려 옆 테이블을 보았다. 어디 사는 누구인지 모를 인간들이 모여서 케헤헤 웃고 있었다. 주점 안의 다른 모험가들까지 선동하는 한 녀석은 벨도, 벨프도, 릴리도, 아무도 본 적 없는 사내였다.
"참아요, 벨 님. 주가가 또 올랐다고 생각하시고, 그냥 참으세요."
"모험가들이 헛소리하는 게 언제나 그렇지. 참어."
벨프와 릴리가 벨을 다독인다. 벨 역시 이미 몰드와의 분쟁으로 이미 한 번 겪어보았기에, 잠자코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다.
"옆에 여자는 어떻고? 레벨 1이 뭐가 잘났답시고 18층까지 내려갔는지 원. 로키 파밀리아 그 잘난놈들의 등짝에 붙어서 떨어지는 떡고물을 핥아먹으려고 했던 게 분명해."
"최강의 레벨 1? 아, 그거 신 헤스티아가 치트를 친 게 분명하겠지! 꼬맹이 신이 자기 파밀리아 뒤떨어지는 게 분하니까 부들부들 떨면서 치트를 치고 있는게 훤히 보인다, 야."
"인정, 완전 인정."
"꼬맹이 신, 가슴은 크더라."
"야, 우리 신님은 뭐하냐, 저깟 가슴만 크지 뇌에 든 거 하나도 없고, 위엄이랑 존엄 거 전부 다 감자돌이에 말아먹은 꼬맹이년도 치트를 쳐대는데, 우리 신님은 씨발 무능해요."
"그 말 취소해!"
순간, 벨의 이성이 뚝 하고 끊어졌다. 의자가 데굴데굴 구르고, 릴리가 안된다면서 외치지만, 이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벨의 머리는 작렬하고 있었다.
벨이 더없이 존경하고, 숭배하는 신과, 따라잡고 싶어하는 저 끝의 목표를 한꺼번에 어디에 누구인지 모를 말뼈다귀가 모욕한 것이다. 자신을 욕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지만, 그녀들을 모욕하는 것을, 벨로서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말 당장 취소해."
"헤헤... 정곡이구만! 신이 그딴 녀석이라는 것을, 너도 참을 수가 없는 거지?!"
벨의 기세에 눌린 파룸 남성은 덜덜 떨면서도 외쳤다. 어딘가 절박한 목소리이며, '너도'라며 자신 역시 자신의 신에게 불만이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었지만, 그것은 불붙은 벨에게 기름을 붓는 꼴이었다.
파밀리아로써, 권속으로써, 계약을 맺은 신을-. 남의 신을 모욕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섬기는 신마저 쓰레기로 몰아가는 저 파룸 남성이야말로 벨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분류의 인간이었다.
벨이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옆에서 날아온 발이 파룸 남성의 얼굴을 짓이긴다. 벨만큼이나, 혹은 그보다도 훨씬 더 깊게 자신의 주신을 열렬히 사모했던 벨프 역시 그의 만행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발이 미끄러졌네."
"씨, 씨벌! 저 새끼 죽여!"
"이거 저 새끼들이 먼저 때렸다! 아앙?!"
테이블이 넘어지고, 음식들이 하늘을 난다. 일어선 것은 쓰러진 파룸 남자를 제외하고도 네 명, 벨과 벨프는 수적 열세는 개나 주라는 듯이 몸과 몸을 부딪치고,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술병이 하늘을 날고, 여기 저기서 싸움에 굶주린 모험가들의 환호성이 울려퍼진다.
다행인건지, 아니면 남을 쉽사리 모욕하는 자는 결국 그 정도의 그릇임을 증명하는 것인지, 수적 우세를 점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싸움의 전황은 벨과 벨프 쪽이 승기를 잡는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같은 레벨이라고는 해도 히든 스테이터스가 잔뜩 쌓인 벨과 대장장이 벨프의 주먹을 버티고 멀쩡히 서 있는 쪽이 이상할지도 모른다.
"아아, 이래서 모험가들은...! 어라, 에스트 씨? 뭐 하세요?"
"...가면 찾아."
릴리가 싸움을 보며 귀를 닫고 질색이라는 듯이 외쳤다. 그런 그녀에게 상자를 뒤적이는 에스트가 보였던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뒷골목의 정세에 나름 박식한 릴리는 금방 깨닫고 말았다.
"잘도 저질러 주었군, 리틀 루키."
동료들이 모두 쓰러지자, 쓰러진 테이블 앞의 의자에 마지막까지 앉아있던 마지막 청년이 일어섰다. 찰랑거리는 갈색 머리카락, 곱고 흰 피부, 휴먼임에도 불구하고 엘프에게 지지 않는 외모를 가진 미청년이 일어서자, 주점에 웅성거림이 퍼져나간다.
Lv3, 제 2급 모험가이자, 아폴론의 총애를 받는 청년- 히아킨토스.
싸움 구경을 하던 대부분의 이들보다 한 수 위의 실력을 가진 이였다. 그런 그가 나선다면 아무리 리틀 루키라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을 터다. 그런 실력 차이를 만끽하듯이, 히아킨토스는 느릿하게 시선을 돌려 쓰러진 동료들의 모습을 한 번 보고, 벨에게로 그 바다색의 눈동자를 돌렸다.
그런 그의 입가에,가학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벨은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깨닫고, 주먹을 세게 쥐었다. 실력차는 명백하지만,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우리 동료를 상처입힌 죄는 깊다. 그 죄를-쿠어어어오억?!"
히아킨토스가 우아하게 말을 이어나가던 중에, 정면에서 날아온 무엇인가에 얻어 맞아 땅을 몇 번이나 구른다. 훌륭한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오똑한 코는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부러졌으며, 새하얀 이빨은 몇 개나 부러져 나무 바닥 위를 구르고 있었다. 그는 일어나려 했지만, 몸을 누르고 있는 거대한 크고 아름다운 황금의 망치 때문에 몸을 들 수 조차도 없었다.
"커, 헉...! 누, 누구냐! 누가 감히, 이 히아킨토스를...! 아폴론 파밀리아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컥-?!"
아버지의 가면을 쓴 에스트가 다가가 황금의 망치를 들어올렸다. 과연 사람이 들 수 있을 것인가 싶을 정도로 거대한 황금의 망치였지만, 에스트의 손 안에서는 무게가 없다는 듯이 간단히 들렸다. 히아킨토스는 영문도 모르는 채로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보며 감사함을 느꼈다.
"구, 구해주어서 고맙다, 이 예는..."
"뭐래."
에스트는 피식 웃으며 스모우 해머를 손에서 떼었다. 크고 아름다운 황금의 망치가 또 한 번 히아킨토스의 가슴 위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