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Spotlight: Est
"거기 멈춰!"
에스트가 수정을 밟고 달려나간다. 그녀를 멀찍이서 구경만 하고 있던 큰 모자를 쓴 인간은 어딘가 비틀린 듯한 웃음소리를 흘리더니 옷감채로 빙글빙글 땅속으로 녹아들 듯이 사라졌다.
그러더니, 저 멀리, 절벽의 저 멀리에 다시 솟아났다. 에스트는 이를 악물고 저인간을 잡는 것을 그만 포기할까 생각했다가-
빅 햇 로건은 죽었다.
공작의 서고에서, 시스의 연구에 심취해 미쳐버린 것을 에스트가 자신의 손으로 끝을 내주었다. 그의 길고 길었던 수 백년 여행길을 끝내어 준 것이다.
이 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익..., 거기 딱 기다리고 있어, 로건."
스승이자 친우. 순례를 떠나는 모든 마법사들의 길잡이이자, 에스트가 불사가 아닌 인간으로써 살아가던 시대보다 앞선 시대를 살아가며 수 많은 전설을 남긴 영웅.
에스트는 그를 붙잡기 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절벽을 향해서 한 발자국 내딛었다. 남이 본다면 미쳤다고밖에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허공을 향해서 내딛은 것이었으니.
하지만, 에스트의 몸은 절벽 아래로 잡아끌어내려지지 않았다. 그건 마치 중력을 거스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투명한 길. 역시 에스트가 한 때 몇 번이고 걸어나갔었던 길이었다. 비록 그 때와 비하면 위치와 구성은 역시 달라져있겠지만, 떨어지는 수정 가루가 내려앉는 곳을 밟으면 그만이다.
에스트는 투명한 길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 나갔다. 저 멀리 절벽에서 큰 모자가 킥킥 웃었다. 무엇을그리 쫓느냐고 말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러더니, 품속에서 투명한 구슬을 꺼내어들어, 마법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구슬에 마술의 영역을 벗어났다고밖에 생각할수 없는 거대한 소울이 응축되고, 거대한 수 십 자루의 결정 소울창이 되어 에스트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윽!"
달린다, 전력으로 달린다. 결정 소울창이 내리 꽂히기 전에, 타격 범위를 한끝 차이로 피해낸다. 소울 결정창은 막을 수 있을 만한 위력이 아니다. 오직 기합으로 회피할 수밖에 없는 종류의 지독한 마법인 것이다.
피하면서, 또 피하면서, 에스트는 이상한 것을 느꼈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 수록, 그 의혹은 증폭되어가기만 한다.
"로건이, 아냐?"
"*-=-=^*&%!!"
커다란 모자를 쓴 인간이 수정을 높게 들어올렸다. 치켜든고개, 그는 자신의 얼굴을 숨기고 싶은것인지, 까마귀 부리를 닮은 듯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달라. 에스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로건은 마법을 쓰는 데 영창을 읊지 않는다. 저런 완성품 높은 구슬이 아닌, 훨씬 조잡하게 만들어진 결정 지팡이로도 저것보다 몇 배는 강력한 마법을 뿜어낼 수 있다.
영창이 끝난다. 구슬이 빛을 발하고,로건을 닮은 인간의 발아래에서부터 솟아오른 결정의 칼날들이 에스트를 향해서 쇄도하기 시작한다. 눈앞에 있는 것을 모조리 박살내며 수정칼날의 길로 만들어버리는 마술이라면 딱 하나 있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로건이 마술의 영역으로 끌어내린 하얀 백룡의 숨결이었다.
"머리 좀 썼는데."
보이지 않는 길이 백룡의 숨결에 침식당하자, 간단하게 수정의 원래 모습을 내보이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이대로라면 곧 저 아래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지만, 에스트는 걱정하지 않았다.
조금 더 일찍 썼더라면 위험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면 괜찮아. 에스트는 높게 도약했다. 도약하는 순간, 에스트가 밟고 있던 발판이 중력의 손아귀에 끌려 내려간다.
"......."
"자, 가면을 벗어주실까."
새부리 가면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서 에스트를 빤히 쳐다보기만 한다. 놀랐다는 것일까. 떨어져야만 할 인간이 뛰어올라와 어느새 자신과 같은 자리에 선 것이 대단하다는 것일까.
"아니, 가면을 벗기 싫다면, 내 질문에 몇 가지 대답만 해주어도 좋아."
"......"
"너는 누구지?"
에스트가 아스토라 직검을 새부리 가면에게 겨누고서 물었다. 새부리 가면은 수정 구슬을 들고서 부들부들 떨다가, 입을 열었다.
"너도, 너도 내 마술을 빼앗으러 온 거냐."
"응?"
"너도 빼앗으러 온 거구나. 너도 온 거구나. 너도 빼앗는구나!"
잔뜩 쉰 목소리로 주억거리더니, 수정을 쓰다듬었다. 에스트의 주변으로 수 십개의 수정 기둥이 솟아오르더니, 깨어지며 하나 하나가 모두 새부리 가면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화한다.
글렀어. 에스트가생각했다. 결정 마술은 이성을 깎아먹는 마술. 이 인간도 제정신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던 것일까.
"좋아."
에스트는 마음을 바꾸었다.
"일단 죽이자."
일단 죽여보기로. 죽이고 나면 뭐라도 단서가 나오겠지. 소울을 살펴보던가, 녀석이 남긴 물건을 조사해보던가. 여기는 오라리오가 아니니까 누굴 죽인다고 해서 헤스티아에게 혼날 일도 없다.
"*-=-=^*&%!!"
본체가 보라색으로 잔뜩 응축된 결정 소울 창을 꺼내어 에스트에게 던진다. 수정 기둥에서 변화한 분신들 역시 본체의 움직임을 따라서 푸른색의 결정 소울 창을 만들어 에스트에게 던진다.
에스트는 조금 까다롭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망설임 없이 본체에게 달리기 시작했다. 분신이건 뭐건, 본체가 죽으면 그만-
"앗, 잊고 있었다."
에스트의 검이 닿기 직전, 까마귀 가면이 처음 그랬듯이 땅속으로 빨려들어가듯이 사라진다. 텔레포트. 육안의 전도사도 그렇고 이놈도 그렇고, 시스의 수정과 관련된 녀석들은 하나같이-!
에스트가 욕지기를 내뱉으며 분신들이 이미 엉망진창 쏘아내었던 결정 소울 창을구르고 또 굴러서 피해낸다. 속도도 느리고 궤도도 뻔히 보이는 것이 전투에는 익숙하지 않아 보이긴 했지만- 양이 이렇게 많아서야 계속 구석으로 몰릴 뿐이다.
"......그런 거네."
결정 소울 창을 어떻게 피해낸 다음 뒤를 돌아본 에스트는 없어져버린 분신을 다시 만들고 있는 까마귀 가면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저 새부리 가면은 분신을 유지하면서 순간이동을 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즉, 순간이동하기 직전에 분신들을모조리 취소한 뒤, 순간이동-, 그 다음 다시 분신 생성, 이라는 패턴을 가진 것이겠지.
답이 보인 것만 같았다.
에스트는 보라색 소울 창을 뽑아내기 시작하는 본체에게서 일부러 거리를 두고, 무진장 날아오기 시작하는 소울창을 피해내기 시작했다.
천천히, 하지만 침착함을 잃지 않고. 마음을 가라앉힌 뒤 최소한의 체력만을 이용해 모든 결정 소울 창들을 피해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강력한 마술이라고 해도, 맞추지 못하면 의미가 없으니까.
"...*-=-=%^-**&%."
모든 공격을 피하기만 하는 에스트를 보며 약이 오른 것인지, 새부리 가면이 새로운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본체 새부리 가면의 머리 언저리에 다섯 개의 동그란 소울 구체가 떠오르는 것을 본 순간, 에스트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결정유도 소울 구체. 일직선으로밖에 나아가지 않는 결정 소울 창과는 다르게, 꽤나 유도성을 가진 마술이었다. 소울창으로 맞출 수가 없다면, 저걸로 따라잡겠다는 심산이겠지.
이해해. 에스트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실책이야.
에스트가 본체를 향해서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계속 피하기만 하던 것이 어째서 갑자기 공세로 전환했는지, 저 마술사는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만 같아 보였다. 그저 결정 소울 유도 구체를 믿고, 또 다른 보라색의 결정창을 준비할 뿐이었다.
분신들이 쏘아낸 결정창을 피해내고, 정면으로 틀어박히는 보라색의 결정창을 몸을 살짝 돌리는 것으로 피한 뒤, 어느새 벌써 새부리 가면의 바로 앞. 바로 눈앞까지 도달한 인간의 모습을 보며 새부리 가면은 당황한 듯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호흡 계산, 체력 계산, 수 많은 분신들이 쏘아내는 결정창의 사선을 파악한 뒤 최소한의 회피운동. 너무나도 기계적이고 합리적이지만,그렇기에 아름다워보이는 몸놀림이었다.
그렇다면 유도 소울 구체는 어떻게 피할 셈이냐. 새부리 가면은 그렇게 말하는 듯이, 순간 놀라 뒷걸음질 친것을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는 듯이, 패기 넘치게 수정구슬을 앞으로 내질렀다. 그의 손짓과 동시에, 결정 구체들이 쏘아진다.
"분신과 텔레포트를 동시에 사용할 수 없다면-"
에스트가 말했다. 소울 구체 하나를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것으로 흘려 넘겨버리며, 한 발자국 더. 몸을 회전시키는 것으로 가슴을 향해 날아들던 또 하나의 구체를 피하고 한 발자국 더. 머리를 향해 날아드는 세 번째 구체를 피하며 새부리 가면의 몸이 검이 닿는 거리 안으로.
"결정 소울 구체를 유지하면서 텔레포트를 쓸 수 있을까?"
분신은 자기가 원할 때 취소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소울 결정 구체는 다르다. 쏘아내기 전까지는 시전자의 소울 한 켠을 집어먹고 있는 것이 저 구체들이다.
결국 실전 부족이라는 것이다. 에스트는 망설임 없이 검을 내질렀다. 새부리 가면이 뒤늦게 품속에서 레이피어를 꺼내들려 하지만, 에스트의 검은 어느새 레이피어의 손잡이를 잡은팔과 가슴을 동시에 찔러 고정시켜버리고 있었다.
검이 반월을 그린다. 새부리 가면의 팔이 잘려 하늘을 날고, 가슴에 커다란 선이 그어진다. 에스트는 연이어서 치켜올린 검을 한 번 더 내려긋고, 새부리 가면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럼, 어디 한 번 조사해볼까."
새부리 가면이 확실하게 쓰러진 것을 확인하고, 에스트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 순간이었다.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 분신들 사이에서, 쓰러진 녀석과똑같은 새부리 가면과 똑같은 커다란 모자를 쓴 녀석이 에스트에게 백룡의 숨결을 쏘아내었다.
그윈이 시작하고, 에스트가 이어나간 불의 종말이 당도한 시대,
영웅 빅 햇 로건의 유지를 이어나간 늙은 결정의 마술사는,
쌍둥이라고 전해지고 있었다.
간단한 이야기였다.
결정, 백룡의 숨결이 한껏 방심하고 있던 에스트의 팔을 집어삼킨다. 시스가 자신의 동굴을 결정으로 침식했듯이, 에스트의 팔을 집어삼킨 결정이 에스트의 전신으로 퍼져나가려한다.
"윽?!"
에스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팔을 잘라내었다.
2차전 시작이라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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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언니!"
동굴 바깥에서 기다린지 벌써 몇 시간. 슬슬 지루하기보다 걱정이 되기 시작하던 나자의 앞에 에스트가 나타났다. 황동의 갑옷은 여기저기 결정에 파먹혀 있었고, 왼팔은 아예 보이지를 않고 있었다. 언젠가의 나자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지독한 모습이었다.
"나자. 어서, 헤스티아에게..."
"자, 잠깐만!정신 좀 차려봐!"
에스트는 한 마디만 남기고서 쓰러졌다. 나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에스트를 마차에 태우고서 갑옷을 벗겼다. 이런 증상은 어찌해야 좋을지감이 잡히질 않았지만, 일단 약이라도 뿌려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뭐, 뭐야, 이게."
잘 벗겨지지 않는 황동의 갑옷을 벗기자, 상황은 더욱 끔찍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스트의 하얀 피부를 뚫고 솟아난 보라색 결정들이 조금씩이지만 살을 뜯어먹으며 자라고 있었다. 무한의 상자도 경첩이 수정 때문에 봉인당해 있었고, 살아남은 오른팔은 갑옷을 벗길 수 없을 정도로 수정에게 먹혀가고 있었다. 이 모습으로 보아선, 얼마 가지 않아 에스트가 통채로 수정인간이 되어버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다려봐... 이럴 때는 무슨 포션을 써야 하는 거야...!"
나자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포션들을 뒤적거리다가, 에스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기억해내었다. 헤스티아에게 가라고.
헤스티아에게 간다면, 어떻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엑세리아를 쓸 수는 없지만, 이 수정, 차갑게 보이니까 화톳불에 녹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나자는 죄책감과 걱정에 빙글빙글도는 머리로 마부자리에 앉았다.
어서 오라리오에 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