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Spotlight: Est
"언니. 언니."
익숙한 목소리에, 나무를 깎던 에스트가 잠시 회화수호자의 곡검을 내려두고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 갈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단발 반묶음 머리로 정리한시앙스로프 소녀가 쪼그려 앉아서 에스트의 눈높이에 맞추고 있었다.
미아흐 파밀리아의 유일한 멤버, 나자 에리스에스였다.
"무슨 일이야?"
평소에는 푸른 약포에서 떠나질 않는 이 은팔의 소녀가 어째서 점원일도 내버려두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일까. 에스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애초에 그리 깊은 인연도 아니었다. 나자가 오라리오의 뒷골목에서 조각을 팔던 에스트에게 여긴 위험하다며 넌지시 조언을 던져주었던 것을 시작으로, 미아흐와 헤스티아가 알고보니 친한 사이였다-라는 이유로 알음알음 알게된 사이였을 뿐이다.
"그게... 언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부탁?"
"오라리오 바깥에서 블루 파필리오 비슷한 몬스터를 목격했다는 정보를 얻어서..."
요컨데 자신을 따라가서 그 몬스터를잡아달라는 소리였다. 몬스터에게 두 다리와 팔한 쪽을 엉망진창으로 뜯어먹혔던 나자는 트라우마 때문에몬스터를 사냥할 수 없으니까.
에스트는 잠시 생각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고, 할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누군가를 돕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없으니까.
"그런데 왜 하필 나야?"
의역하자면 왜 벨이 아니라 자신을 찾는 것이냐-라는 뜻이었다.
"언니가 무척 세다는 건 나 잘 알고 있어."
"응?"
"뒷골목의 히어로. 그거 언니지?"
뒷골목에서 강도에게 습격을 당하면 어디선가 나타난 가면을 쓴 누더기가 구해준다. 혹은 뒷골목에서 로리거유 신의 조각상을 파는 소녀를 만나면 뒤를 조심할 일은 없어진다- 같은 도시전설이 오라리오 거리거리 사이로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자의 말을 들은 에스트의 가슴 속에 고민이 피어올랐다. 최근 들어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무력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항상 삼인귀에게서 빼앗은 아버지의 가면을 착용하고 무력진압을 시도했는데, 이렇게 간단하게 걸려버리면 가면을 착용한 의미가 없지 않나 싶었던 것이다.
"...아들의 가면으로 바꿔야 하나."
"응? 아들의 가면?"
"아냐,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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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 밀림.
오라리오에서 동쪽으로 쭈욱 나아간 곳에 존재하는 거대한 밀림의 이름이었다. 밀림을 둘러싼 알브 산맥의 모습조차도 가려버릴 정도로 거대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모습은 처음 보는 사람의 눈 정도는 간단하게 압도할 장관이라 할 수 있었다.
바깥은 분명 낮인데도, 겹겹히 쌓인 나뭇가지와 이파리들이 하늘을 모조리 가려버린 탓에 숲 내부는 마치 밤이 내린 것만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에스트에게 있어선,검은 숲의 정원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언니는 온적 없었지?"
"응?"
"전에 한 번 언니만 빼고 다 왔었거든."
벨이랑, 릴리랑, 신 헤스티아까지.
에스트는 그 소리에 기억을 더듬었다. 어떠한 기억도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자신이 던전에서 이자리스의 데몬들과 함께 썩었던 며칠 사이에 일어났던 일이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그 때는 발견하지 못해서 블러드 사우르스의 알을 채취하기만 했지만... 이번에는 꼭 찾을 수 있을거야."
나자가 지도를 꺼내었다. 에스트는 황동의 장갑에 손가락 끝까지 집어넣은 다음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정비한 뒤,나자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나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지도는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동굴에 대해서 기록한 지도인데, 상당히 많은 모험가들이 그곳으로 모험을 떠났다가 돌아와, 동료들에게 환상적인 광경을 보았다고이구동성으로 외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팀을 이루어 여럿이서 떠나간 경우에는, 단 한 명도 돌아올 수 없었다고 한다. 즉, 홀로 떠났던 이들만이 돌아올 수 있었다고 전해지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면, 나자 혼자서 오거나 나 혼자서만 왔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오컬트 적인 이야기는 별로 믿지 않지만, 그래도 지켜야한다는 것에 살짝, 아주 살짝이나마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에스트가 속으로 생각했다.
뭐, 어차피 도착한 것 같고.
어느새 나자가 발을 멈추고 있었다.
"우와..."
나자가 탄성을 질렀다. 길게 이어지는 어두운 동굴 길 끝에 나타난 최심부의 대공동空洞은 푸른색으로 빛나는 투명한 수정으로 가득 들어차 있었던 것이었다.
무심코 하늘-이라고 부르게 될 정도로 엄청나게 높은 천장에 자라난 엄청나게 커다란 수정들은 빛을 사방팔방으로 반사하고 있어 동굴 내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을뿐더러, 작은 수정가루들을 눈처럼 하늘하늘 떨어트리고 있었고, 바닥에는 푸른 수정들이 가득 들어차 있어서 마치 유리길을 걷는 것만 같은 기분을 주고 있었다.
물론 18계층의 리빌라 마을의 하늘에도 수정이 가득 들어차 있긴 했지만, 그쪽이 리빌라 마을 덕분에 현실적이지만 따뜻한 마을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면, 이쪽은 때묻지 않은 유리알 속의 세계를 보는 느낌이었다.
"언니. 이런 건... 어라, 언니?"
"......아냐, 아니겠지."
하지만, 에스트는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에스트의 가슴속에, 어쩌면 황동의 갑옷이 아니라 하벨 기사의 갑옷을 입고, 하벨의 대방패까지 들고 왔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마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에스트는 일찍이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있었다. 이것은 동굴에 결정이 자라난 것이 아니라, 결정이 동굴을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다.
태양의 도시 아노르 론도보다도 위. 신들의 거처와 태양의 왕녀의 침실보다도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은 신들의 영역이 아니였다. 그곳에 있던 것은 미쳐버린 비늘 없는 하얀 고룡이 수 많은 인체 실험을 자행해온 서고탑과, 하얀 고룡의 거처-
"결정 동굴..."
"알고 있어?"
"아냐, 아닐거야."
에스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백룡은 죽었다. 불사를 가져다주는 원시 수정을 자신의 손으로 파괴해버리고서 더욱 미쳐 날뛰던 것을 에스트가 직접 심장을 뽑아 죽였다. 에스트의 상자 속에,시스의 꼬리를 자르고 얻은 월광의 대검이 고이 모셔져 있는 것만 보아도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나자."
"응, 언니."
"블루 파필리오랑 비슷한 몬스터, 라고 했었지."
"응. 비슷하다면 특성도 비슷하겠지? 약의 실험에 쓰일 수 있을 거야."
에스트는 침묵했다. 은의 의수를 단 소녀는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고 있다.
아니, 시스가 없다면 결정들도 더 이상 퍼져나가지는 않을테니 딱히 위험하고 심각하다고 딱 잘라서 말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자가 말하고 있는 것을 들어보면, 아무래도-
펄럭. 날갯짓소리. 저 멀리 끝이 보이지 않는 균열 아래에서 커다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올라와, 거대한 결정탑 위에 앉았다. 아름다운 네 장의 날개를 지닌 나비는 다리라고 할 만한 기관이 존재하지 않았고, 더듬이로 보이는 기관은 창 두 자루를 배배 꼬아놓은 것만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어쩐지 생명체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자는 감탄성을 흘렸다. 달빛을 닮은 아름다운 나비. 레벨 2가 되도록 던전에서 구른 나자였지만, 그래도 저렇게 아름다운 몬스터는 본 적이 없었다. 무해할 것만 같은 인상에 아름답기까지. 나자는 자신의 트라우마마저 잊고서 나비의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았다.
"...저걸 잡을 생각이었던거야?"
"아, 아아, 으응. 언니."
월광 나비. 에스트는 나비를 보며 허탈한 듯이 말했다.
그래, 수정 동굴에 사는 나비라고는 저거 하나 밖에 없지.
나자가 벨을 부르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돌아가자, 나자."
"하지만, 저걸 잡아야지 재료를..."
"죽을걸."
홀로 이곳에 찾아온 모험가는 살아나간다.
여럿이 이곳에 찾아온 모험가는 죽는다.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홀로 온다면 나비의 아름다움에 반해, 어떻게 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나비가 떠나감과 동시에 집으로 돌아가려 할 것이다. 하지만, 여럿이 오면 나비의 아름다움에 반해, 사냥할 생각을 하고 말겠지. 여럿이니 사냥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착각에 빠져서.
"...크기만 커다랗지 딱히 강해 보이지는 않는데."
"실제로도 딱히 강하진 않지만, 지형이 안 좋아."
월광 나비는 생긴 것만큼이나 연약하다. 오랫동안 날지 못하고, 얼마간 하늘을 누빈 다음에는 반드시 어딘가에 앉아서 쉬어야만 한다.
비록 에스트가 검은 숲의 정원에서 만난 월광 나비는 누군가-아마시스-에게 신성의 불씨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기라도 한 것인지 검은 숲의 정원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또한 검은 숲의 정원에는 월광 나비가 신성의 불씨를 지켜가면서 앉아 쉴 만한 곳이 없었기에 당시의 약했던 에스트조차도 쉽사리 정리할 수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다르다. 월광나비가 얼마든지 날면서, 얼마든지 화력을 쏟아내고, 얼마든지 이쪽의 공격이 닿지 않는 곳에서 쉴 수 있는 것이다.
날개가 없는 인간이 상대할 만한 생명체가 아니다. 소울 창을 쏜다 해도 멀찍이 도망가버리면 맞출 자신이 없었다.
"언니라면 될 줄 알았는데."
"나라고 만능은 아니야. 그저 할 수 있는 것만 할 뿐이야."
"음... 어쩔 수 없나."
나자가 침울한 듯이 입을 삐죽였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인간성이 많을 시절의 에스트가 혼자라면 어떻게든 시도해볼지도 모르겠지만, 나자라는 덤까지 있어선 절대 무리다.
"그럼 돌아가죠. 여기까지 끌고온게 미안하기도하니까 언니에겐 오라리오에서 밥이라도 한 끼 살게."
"나자, 바깥에 나가 있어줘. 나는 잠시만 여길 탐색하고 갈게."
"혼자서?"
나자가 에스트를 보았다. 탐색을 하면 같이 해도 괜찮을것인데, 왜 굳이 혼자하려는 것일까. 이 아름다운 동굴에 매료된 것은 나자 자신 역시 마찬가지인데.
"나가줘."
"으응..."
하지만, 에스트의 명령아닌 부탁에, 나자는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고, 수긍하고 말았다. 에스트가 짓고 있던 표정은 어쩐지 뒤가 없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에스트의 시선은 저 멀리 수정 뒤에 숨어있는 자의 모습을 따라가고 있었다.
빅 햇 로건의 모자를 쓴 인간의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