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4화 〉Spotlight: Est (24/71)



〈 24화 〉Spotlight: Est

죽었다.


에스트는 물속에서 떠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떴다. 며칠동안 보지 못했지만, 이미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폐성당의 천장이 보였다.
죽음 직전에 의식이 컷되는 탓에 제대로 기억나진 않았지만, 희미한 기억을 헤집어보면 아마 데몬의 왕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배후에서 나타난 커다란 벌레에게 저항조차 못하고 그대로 붙잡혀 으직으직 뜯어먹혔던 것 같았다.

그리고 돌아왔다.
과거로 돌아온 듯한 익숙한 감각에, 에스트는 가슴이 아렸다.

상황 파악이 대충 끝난 에스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았다. 벽 한쪽 구석에 놓여진 헤스티아의 침대와 헤스티아가 보였다. 헤스티아는 이상하게도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었던 것이다.
침대에 누가 누워있는 것일까. 에스트는 조용히 발을 움직여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에 누워 있던 것은  크라넬이었다. 벨은  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호흡은 고르고, 상처는 다 나아 더는 없어보였지만, 그 모습에서 엄청난 사투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 때문이야. 에스트가 자책했다.
잘못한 것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탓이라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불사의 저주를 몸에 새긴 몹쓸 녀석이니까.
가까이에 있는 모든 이들을 파멸로 몰아가지 않으면 견디지를 못하는 몸이니까.

"...지금 당장 떠나야 해."

"으윽... 에스트..."


에스트가 입을 열어 작게 결심을 내뱉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헤스티아가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쓰고 잠꼬대를 뱉었다. 에스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가슴 속의 상자에서 인간성 하나를 꺼내들어 터트렸다. 헤스티아에게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화톳불에게 기도를 올려 망자였던 자신의 육체에 인간의 피부를 덧씌웠다.

덧씌우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에스트는 자신이 무엇을 저지른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

생기를 되찾은 자신의 손을 보면서 에스트가 이를 빠득 갈았다.
떠나기로 했으면서.  이상 관련되지 않기로 결정했으면서.

헤스티아가 망자인 자신의 모습을 보고 겁에 질릴 것이 무서웠던 것이다.
그녀가 썩어가는 시체의 얼굴을 마주하고, 혐오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본심이 여기까지 와서도 떠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벨이 저렇게나 다쳐있는 모습을 보고서도 여전히 여기 남아있고 싶다고 말했다.

"크윽...!"

에스트는 신음소리를 흘리며, 상자를 열었다. 무한의 창고 속에서 그녀가 충동적으로 꺼내든 것은  많은 인간성들이었다. 수 많은 생자와 사자들에게서 힘으로 빼앗아온 죄의 증거들이었다.
에스트는 그것들을 모조리 땅에다 내던져 깨트려버렸다. 더 이상 뒤가 없어진 그 순간, 에스트는 단검 한 자루를 꺼내어 자신의 목을 향해서 휘둘렀다.
이대로 죽는다면, 이대로 망자가 되어 다시 일어나게 된다면.

 때야말로 나는 떠날 수 있을까.

"아, 안 돼!  된다, 에스트!"

잠에서 깨어난 헤스티아가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며 쿠당탕 달려들어 에스트의 팔을 와락 붙잡았다. 에스트의 힘이라면 헤스티아가 붙잡건 말건 목을 쳐버릴 수 있었을 텐데, 단도를 든 손이 굳어버린  움직이질 않았다.

"안 된다. 에스트. 그만 두거라."

"...헤, 스티아."

"절대 이런 생각을 해선  된다. 스스로를 괴롭게 한다니... 안 돼, 절대로 용납 못한다, 에스트..."

"하지만..., 하지만...,"


에스트의 가슴 속에서 서러움이 터져나왔다. 무엇 하나 스스로의 손으로 결정할 수 없었던 불쌍한 불사자가, 드디어 자기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어, 그대로 해보이겠다는데, 어찌하여 이 착한 신은 그것을 막으려 드는가. 어찌하여 나의 육체는 생각이 이끄는대로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는가.

이런 나라면 죽으면 좋을 텐데. 그저 모두에게 잊혀져버리면 좋을 텐데!

"하지만이라니! ...그것은 착각이라는 것이다, 에스트. 네가 무슨 생각을 하건 지금만큼은 모두 잘못되었다! 그러니 제발  검을 내려놓아다오. 부탁이다. 신으로써 간청하마..."

"나 때문에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나는 여기 있으면  돼."

"그것이 무슨 소리냐, 에스트!"

"내가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벨이, 헤스티아가...!"

언젠가는 죽고 말거야.
벨은 마음이 꺾인 전사처럼 동경하던 미래를 잃고 떨어져, 비참하게.
헤스티아는 이런 저주덩어리를 받아들인 댓가로 스스로마저 잃은 채로.

"에스트. 먼저 용서를 구하마."

"헤스티-?"

갑자기 얼굴을 굳히고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헤스티아. 그 순간,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에스트의 고개가 휘익 돌아갔다. 뺨이 얼얼했다. 고개를 돌려보면, 작은 신이 자신의 아이를 때린 자세 그대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니라."

"안 돼."

"아니! 이곳 이외에는 없느니라!"


적어도 지금의 에스트에게 있어서는 이곳 이외에 어디에도 없었다.
오는 자 말리지 않고, 가는 자 붙잡지 않는다. 헤스티아는 에스트와 벨이 그만 퇴단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몇 시간 엉엉 운 다음 얼마든지 보내줄 의향이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곳이 있고, 살아갈 곳이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자신의 아이가 눈앞에서 파멸을 향해 치닫고 있다면- 절대로 보내줄 수 없었다.

"헤, 헤스티아..."

에스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선택받은 불사자의 눈물도, 장작의 왕의 눈물도 아니었다. 헤스티아에게 이름을 받은 약하디 약한 소녀의 눈물이었다.


"무서워."

"무엇이 무서우느냐."

"헤스티아가, 벨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아서..."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화로를 관장하는 신으로써, 언제나 기다리고 있겠다. 두려워지면 찾아오거라. 도망치고 싶다면 얼마든지 도망쳐 불을 쬐거라. 벨도 옆에서 같이 쬐고 있을 터이니."

"무서워."

"또 무엇이 무서우느냐."

"약한 내가. 길을 찾지 못해 어쩔줄 몰라하는 내가."

"괜찮다, 에스트. 스스로가 약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아이가 가장 강한 법이란다. 그러니 너는 네가 가고 싶은 길을 나아가거라. 그것이 곧 길이 될 테니까."

"...헤스티아."

에스트가 가슴을 움켜잡았다. 아무래도 아까 전부터 서러움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처음부터 화롯불의 여신이 나누어준 마음의 따뜻함이었던 것 같았다.
그것조차 이해하지 못한 자신은 얼마나 메말라있었나. 얼마나 과거에 얽매여 있었나.

"나는 무엇을 하면 좋은거야...?"

"네가 원한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나는 재앙이야. 저주야. 가까이 있는 것을 파멸로 몰아 넣을 뿐이야. 무엇을 해도 서툴러서, 결국 모조리 부숴버릴 뿐이야."

"착각이다. 너는 그런 아이가 아니니라."

"어째서 헤스티아는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거야?!"


에스트가 외쳤다.
헤스티아는 눈을 감고, 간단하게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믿는 나의 아이이기 때문이란다, 에스트."


헤스티아가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라 비틀어진 장작 아래에서 꽃이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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