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Invasion - Capra Demon
베였다.
거대한 마체테가 사정 봐주지 않고 가드가 풀린 벨의 몸을 쳐 날렸다. 은빛 플레이트 갑옷이 박살나 흩어지고, 벨의 가슴팍에는 또 한 줄기의 거대한 상처가 새겨졌다.
산양머리 괴물의 강인한 육체에는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죽이 질기고, 근육이 단단하다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강철의 경도를 넘어서고, 바위 덩어리의 조밀함을 초월하는 정도의 완성된 육체였다. 그렇기에 벨이 뚫을 수 없었을 뿐이다.
명도 헤스티아 나이프로도 어설프게 휘둘러서는 흠집 하나 낼 수 없는 극한의 육체. 더 무시무시한 것은 그 강철 같은 고깃덩어리가 근본적인 방면에서 방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격을 위해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거인을 인간의 크기로 압축시킨다면 저런 모습이 나올 것인가.
“......아, 으윽...”
벨이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럴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데도.
릴리는 진즉에 도망쳤다. 방어구는 방금 박살나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이 되었고, 바젤라드는 첫 일격을 막을 때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뇌창을 쏘기 위한 탈리스만은 벨이 실수로 떨어트렸을 때, 저 괴물의 발굽에 짓밟혀 찢어져버리고 말았다.
승산 없는 전투라는 것을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싸울 이유가 없는 전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몸 상태로 도망치는 건 또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지금 몸 상태로 전투를 속행하는 것보다는 쉬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이 헤스티아 나이프를 역수로 잡고, 팔을 내뻗어 도망치지 않을 것임을 온 몸으로 외쳤다. 싸울 것이라 외쳤다.
산양머리 괴물이 고개를 조용히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것은 아직까지 일어서려드는 인간의 모습이 신기하다는 뜻이었을까.
“도망, 치고 싶지 않아...!”
헛소리 말라는 듯이 곧바로 달려든 산양머리 괴물. 마체테의 칼등이 벨의 허리를 강타한다. 굳이 날 부분으로 베지 않은 것은- 자기 나름대로 흥미가 돌았다는 증거일까.
벨이 비명을 지른다. 허리를 직접 얻어맞기 직전에 나이프로 방어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충격이 허리를 박살낼지, 팔을 박살낼 지의 차이일 뿐이었다.
더는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 손에 무슨 의지라도 있는지, 헤스티아 나이프는 아직도 그의 손에 들려 있었지만, 벌의 침에 쏘인 듯 어깨부터 손가락 끝까지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냐, 아직 더 싸울 수 있어..., 벨은 아직 움직이는 왼손을 곧바로 파우치로 돌려, 마지막 남은 나쟈의 포션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들어서 산양머리 괴물을 주시했다. 팔을 낫게 하려다 목을 당하면 그것보다 웃긴 것은 없다고에스트에게 배웠으니까.
그러다가, 이상함을 느꼈다. 산양머리 괴물은 자신에게서 흥미를 잃은 듯 고개를 돌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째서. 벨은 살아남았다는 것에 기뻐하기보다 앞서, 눈앞의 풍경에 현실감각을 잃은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고했어, 벨.”
“찾았다, 아이즈!”
“시시한 짓거리에는 말려들지 말라니까, 정말로!”
벨을 저지하듯이, 소녀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간질였다. 일어날 필요 없다고, 너는 노력했다고. 이제 쉬어도 좋다고- 다른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그저 한 소녀의 목소리만이 머릿속에 파고 들었다.
검희, 바로 며칠 전에 Lv 6으로 승급한 검사, 아이즈 발렌슈타인이 자신의 세이버를 산양머리 괴물에게 겨누고 있었다. 산양머리 괴물은 벨에게서 완전히 시선을 치워, 아이즈에게 똑바로 향한 채로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번에 나타난 적은 얼마나 강할 것인지. 가늠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 구해줄게, 벨.”
“......구, 해?”
벨이 산양머리의 괴물이 고개를 기울인 모습을 보면서, 아이즈가 진심을 담아서 나직인 말을 따라 입술을 움직였다. 너무나 수치스러워서 그만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다.
구해져?
또다시, 구해져?
누구에게, 또 저 사람에게?
나는 언제까지고 밑바닥에서 앞서 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구원받았다며 은혜를 품고, 수고했다는 한 마디에 기뻐하며, 그저 나아가는 이들을 보면서 동경을 품을 수밖에 없는 거야?
언제나.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똑같이.
나아가지 못하고서, 패배자의 모습으로, 약자의 모습으로!!
저들과 같은 선에 서고 싶어.
같은 풍경을 보고 싶어.
그래, 그 등을 따라잡고 싶어서-!
그래서 모험을 하는 것 아니었냐, 벨 크라네에에에에에에엘!!
“벨? 일어나면 안......”
쨍그랑. 벨이 내용물을 목구멍으로 다 흘려 넘긴 포션 병을 산양머리 괴물의 얼굴에 던졌다. 아이즈는 그런 벨을 제지하려다가, 소년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보았는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더 이상 도움 받고만 있을 수는 없어.”
벨이 나이프의 끝을 산양머리 괴물에게 향했다.
옛날이야기의, 아니, 지금 눈앞에 존재하기도 하는 영웅들의 모습을 마냥 동경하기만 하던 어린 소년의 모습은 없었다. 지금, 그는 모험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자신이 영웅이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 호흡, 벨이 쏘아지는 화살마냥 튀어나갔다. 나이프의 끝이 산양머리 데몬의 허리에 빨려 들어가듯이 틀어박혔다. 얕게 살점이 파이고, 피가 방울지듯 맺혔다.
나이프가 변한 것이 아니다. 벨의 육체가, 산양머리 데몬의 육체가 갑작스럽게 변화를 일으킨 것도 아니다.
변한 것은 도망치기 위한 싸움을 그만두고, 나아가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겠다고 결심한 벨의 마음가짐과, 아이즈에게 정신을 팔고 있던 산양머리 데몬의 집중력일 뿐이었다.
“할 수 있어.”
‘아니, 아직 한참 멀었어.’
열기를띈 벨의 목소리와, 그를 부정하는 에스트의 목소리.
커다란 마체테를 마음껏 휘두르지 못할 만큼의 거리 안으로 파고들었다. 첫 상처마저 내었다. 전투의 시작으로는 어울릴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본다면 이제 고작 시작했을 뿐이다.
길고 긴 실을 땋고, 자아내어, 끊어지지 않도록. 벨의 싸움은 그런 것이어야만 했다. 벨 자신도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산양머리 데몬이 오른손의 마체테를 짧게 잡고, 손잡이의 끝부분으로 벨의 머리를 내려치려 했다. 벨은 막을 생각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고, 산양머리 데몬의 올라간 오른팔을 끝까지 주시하다가-, 오른쪽이 휘둘러지느라 틈이 생긴 왼쪽 옆구리 사이로 재빨리 굴러 들어갔다.
처음으로 뒤를 잡았다.
벨은 두 손으로 헤스티아 나이프의 손잡이를 거머쥐고, 그대로 등의 한 점을 찍었다. 가죽을 찢지 못하고 검이 튕겨 나오지만, 아쉬워할 틈은 단 1초도 없었다. 산양머리 데몬이 두 자루의 마체테를 한데 모아, 몸을 돌리며 그 회전력으로 벨의 허리를 썰어내려 했다.
벨은 계속 산양머리 데몬을 주시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두 손의 위치는 언제나 시야 안에 있었고, 절대 놓치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휘둘러지는 그 순간까지, 두 자루의 무식하게 무거운 마체테가 밀어내는 바람이 먼저 허리에 느껴지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눈동자에 담아두다가-
데몬의 두 다리 사이로 굴렀다. 1초만 더 늦었으면 허리가 두 동강났을지도 모를 상황이었지만,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벨은 믿고 있었다. 믿으며, 두 손으로 다시 한 번 헤스티아 나이프의 손잡이를 거머쥐고, 방금 찍어 내렸던 부분을 또 한 번 찍어 내렸다.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 가죽이었지만, 벨은 곧바로 굴러 다음 공격을 피해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상처를 몇 번이나 입고 다시 치료받은 몸이 뒤는 없다고 친절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저 괴물에게 상처를 낼 수단은 없고, 도망치는 것 따위 스스로가 허용하지 않는다.
반면 저쪽은 일격 일격에 인간 하나 쯤은 간단하게 동강내버릴 힘을 가지고 있었고, 한 마리 겨우 죽어봐야 대신할 몬스터가 저 아래에 수도 없이 많을 녀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길 가능성 하나 보이지 않는 싸움인데도, 어쩌면 의미 한 점 없는 싸움일지도 모르는데도.
벨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앞으로, 앞으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저게 레벨 1이라고?”
파룸 소녀, 릴리루카 아데의 구원 요청을 받은 아이즈를 따라서 찾아온 티오네가 벨-언젠가 베이트가 토마토라고 불렀던-의 싸움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그녀 옆에 선 기라성 같은 모험가들- 아이즈 발렌슈타인부터, 핀, 리베리아. 심지어는 남 깔보기 좋아하는 그 베이트 로가마저도, 할 말을 잃고 보고 있었다.
싸움 수단으로만 보면 최저다. 아름다움 따위 어디에도 없고, 격식, 격조, 검도의 완성도와 움직임까지, 무엇 하나 대단한 구석이 없었다. 그저 찌르고, 피하고, 찌르고, 피하고를 반복할 뿐인 싸움이었으니, 아무리 이기면 장땡인 몬스터와의 싸움이라고 해도 역시 최저였다.
하지만, 그 흐름. 일정한거리를 유지하며, 공격해 들어오는 순간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계속해 붙잡으며, 그러면서도 1초, 0.5초, 극한의시간을 끊어내는 그 흐름은 절대로 레벨 1의 그것이라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냐, 그렇다고 해서, 이건 승산이 있는 싸움이 아니잖아!”
티오네가 자신이 어쩌면, 하고 떠올렸던 생각을 지워버리며 버럭 외쳤다. 몇 번이고 베고, 몇 번이고 찔러도 저 무식한 근육에는 상처가 하나도 없다. 어쩌면 멍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검이 명검이건,소년의 움직임이 놀라운 수준이건, 이건 절대로 이길 수 없어. 근력이 모자랐다. 저래서야 몇 번이고 반복해서 괴롭히는 모기일 뿐이다.
그리고 조금 대단한 수준인 민첩도, 곧 산양머리 괴물에게 따라잡힐 것이다. 몬스터와 인간의 크기차이, 거대한 마체테와 나이프의 무기 차이가 지금 소년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유리하게 만들어주고 있었지만, 승률이 마이너스에서 0%가 된 것뿐이다.
“아악!!”
한 순간, 산양머리 데몬이 검을 잠시 쉬이고, 왼발을 축으로 삼아서 몸을 빙글 돌리며 뒤돌려차기를 벨에게 날렸다. 발을 움직여 공격에 사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두 손을 시야의 기점으로 삼고 있던 벨은 가슴팍에 날아오는 불시의 일격을 피해내지 못하고 쳐 날려지고 말았다.
“모험가님...! 모험가니이임...! 벨 님, 제발 벨 님을 구해주세요...!”
“윽.”
릴리가 눈물을 가득 흘리며, 더는 못 보겠다는 듯이 베이트의 다리에 매달렸다. 베이트는 혀를 한 번 차고, 앞으로 나아가려다가-
“뇌...창!!”
찢어진 탈리스만의 조각. 그것을 쥐어든 벨이 그의 목숨을 확실히 끊으려 달려오던 산양머리 데몬의 가슴팍에 뇌창을 날렸다. 파직하고, 털이 살짝 그슬렸지만, 그것으론 피해를 주기엔 너무나도 모자랐다.
데몬을 멈추게 하기에는 충분했지만. 벨은 이번에야말로 전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불타 흩어져버린 탈리스만을 흔들어 버리고서 달렸다.
“으아아아아아!!”
“무슨 생각이냐, 멍청이가!!”
“안 돼, 글렀어!”
벨이 정면을 향해 달려간다. 그 모습에, 앞서 나가있던 자들, 벨이 원하고 또 원한 이들이 혀를 찼다. 힘이 부족한소년은 괴물의 일격을 받아낼 수도, 흘려낼 수도 없어.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괴물이 든 마체테는 두 자루다. 피한다? 비록 벨의 민첩이 높은 수준이라지만, 산양머리가 제대로 반격할 수 없었던 ‘마체테의 사거리’ 내부에서 벗어난 지금도 민첩만 믿고서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이즈마저 자기도 모르게 검을 뽑아든 그 순간, 벨이 굴러 일격을 피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려찍는 두 번째 공격이 뒤따라 날아들었다. 그것마저 피했을 때, 산양머리는 사선으로 검을 들었다. 더 이상 피할 수 있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벨은 처음으로 눈을 질끔 감고, 왼손을 높게 들어올렸다. 그의 손 안에서 다 찢어지고 불타버린 탈리스만의 조각-누군가의 머리카락-이 마지막으로 조잡한 전기를 번뜩였다. 산양머리는 자기도 모르게, 벨의 손을 날려버릴 생각으로 휘두르던 마체테의 검로를 바꾸어버리고 말았다.
벨이 손을 내렸다. 그것만으로도 너무나도 허무하게 산양머리의 필살의 일격이 빗나가버린다. 벨은 이미 산양머리의 품속에 다가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산양머리의 배에 일격을 날렸다. 벨이 가장 처음 상처를 내었던,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 자리였다.
콰직. 어째서인지 나이프가 절반까지 산양머리의 뱃속으로 파고들어간다. 가죽을 찢고 살점을 도려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육까지 뚫을 수는 없었던 그 순간이었다.
산양머리의 등에서 피가 튀었다. 벨에게 계속해서 맞아왔던 그 부위가, 충격을 누적하고 있다가, 강철같은 근육이 충격을 받는 순간 내부에서 터트리듯이 내뱉어내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집요함의 승리였다.
어떤 강한 상대도 죽을 때 까지 맞으면 죽는다고 했던가. 정말 그 말이 맞았-
“안 돼, 벨!!!”
아이즈가 외쳤다. 확실히 위험을 느낀 것인지, 산양머리가 마체테를 내버리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벨의 목을 찌르려고 하고 있었다. 산양머리의 증오를 품은 시뻘건 눈빛이 아직 안 죽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에이나 씨의 에메랄드 색 보호대로 손톱을 막아 세웠다. 막아 세우다 못해 에메랄드 보호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손이 반쯤 잘려나갔다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로 찢어지지만, 벨은 이미 산양머리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나이프에 전기가 맺혔다.
탈리스만은 신앙의 증거. 그렇다면, 무엇보다 돈독한 신앙의 증거가 있다면-
“....뇌... 창.”
생각 외로 커다란 상처네. 벨이 산양머리의 등에 난, 마치 폭발한 것처럼 보이는 상처를 보며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직후, 전기를 잔뜩 머금은 나이프가 산양머리 데몬의 등을 내리찍었다.
산양머리의 척추가 박살나 으스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