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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화 〉Invasion - Capra Demon (22/71)



〈 22화 〉Invasion - Capra Demon

유난히 던전이 조용하게 느껴졌던 어느 날이었다.

"너의 자질을 보여주지 않겠니?"

벨의 머릿속으로 크게 타오르는 불길이 직접속삭였다.
아마 여인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목소리가 아지랑이처럼 머릿속에 흔들렸다.

아마-라고 덧붙인 이유는,  목소리가 마치 한 순간 크게 타오른 불길과도 같았기에, 들은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분 탓인가?"

"왜 그러시ㄴ..."


그 순간 끼긱, 끼기긱, 하고,
날카로운 물건이 땅을 긁는 소리가 울렸다.

"......"

"무, 무슨 소리였죠, 님?"


유난히 조용한 던전, 불길하기 그지없는 노이즈. 릴리가 초조한 목소리로 벨에게 물었지만, 아무래도 벨은 듣지 못한 것 같아 보였다.
다시 한 번 끼긱, 하고 노이즈. 들이 마신 숨이 채 뱉어지기도 전에 또 한 번 노이즈. 등골을 타고 흐르는 불길한 불협화음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가까워지고 있었다.

벨은 기름칠 되지 않은 낡은 시계 태엽처럼 삐걱이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방금 지나쳐온 외길 통로를 보았다. 멀찍이서부터 들려오던 땅을 긁는 괴로운 소음은 점점 커져서, 이젠 바로 귓가에서 긁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큼 커다란소리가 되어 있었다.


"릴리..."

"네...?"

벨의시선을 따라서, 릴리가 식은땀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 돌연 소음이 멈추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확실하게 보이고 있었다. 불길처럼 새빨갛게 타오르는 네 개의 눈이. 마치 악마의 것이 저럴까 싶을 실루엣이 던전의 어두운 그림자 위로 떠올라있었다.

벨의 가슴이 차게 뛰었다. 등골이서늘하게 식어버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손이 주신님 나이프의 손잡이를 우그러트릴 기세로 힘주어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더니, 실상은 그저겁에질린 손이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기에 머리가 착각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릴리가 냄새를 맡았다. 고아로써 괴롭힘 받으며 익히고 서포터로써 이용당하고 사지에 버려지면서 배운 지독한 냄새였다. 하지만 이상했다. 몇 번이고 맡아온 냄새인데도, 이상하게도 오늘만큼은 더욱 지독했다. 지독하기 그지없었다.

아냐,  번은 맡아본 적이 있던  같아. 릴리가 속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릴리가 단 한 번 마셨던, 소마 신이 만든 술의 냄새였다.


"도망쳐, 릴리."

"네? 그게 무슨 소리세요,  님?! 도망치려면 같이-"

릴리가 말을 끝내기 전에, 외길 통로 안쪽에서, 두 마리의 시뻘건 개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중층에서나 볼  있는 불 뿜는 개, 헬 하운드와 닮아 있어서, 릴리는 저것들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걸까 생각을 했다가-

두 마리의 개를 부리듯이, 근육질의 괴인이 뒤따라 걸어나왔다. 피투성이가 된 두 자루의 거대한 마체테를 질질 끌면서, 눈앞의 어리고 약한 이들이 겁먹는 모습이 무엇보다 기쁘다고 말하는 것처럼 천천히 걸어나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아, 악마야. 저런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릴리가 떨면서 중얼거렸다. 산양의 해골을 뒤집어 쓴 것인지, 아니면 산양 해골의 머리를 가진 것인지 모를 괴생명체의 모습은 옛 이야기에 나오는 악마의 것과 터무니없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


"릴리! 도망쳐! 지금 당장!"

"하, 하지만... 님!"

릴리는 아직도, 아직까지도 자신이 아닌 나를 걱정하고 있는 걸까- 벨이 속으로 답답하다는 듯이 생각했다. 스스로도 이렇게 과격한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상황이 그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릴리가 때를 맞추어 변신해서 도망친다면 벨 자신도 도망칠 수 있을 테니까.


"바, 발이..."

릴리가 다리를 후들거리며 벨에게 말했다. 소마를 눈앞에 둔 것처럼, 소마의 향기를 맡은 것처럼, 몸은 마비되고, 다리는 흔들리고, 정신은 무너져간다. 주저앉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쾌락과 공포의 차이지만. 무엇이 다를까.

"윽..."

벨 역시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산양 해골의 사이로 비치는 네 개의 붉은 눈빛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포식자를 마주한 피식자의 본능적인 공포 정도라면 이겨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것이었다. 고양이를 마주한 쥐. 아니, 고양이를 마주한 털실뭉치!

"릴리, 부탁이야... 어서."

"죄송해요, 벨 님... 죄송해요..."

"릴리!"


벨의 외침을 들은 산양머리 괴물이 천천히 고개를 갸웃하고 비틀었다. 저것을 어떻게 가지고 놀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 모양새였다. 괴물 발치의 새빨간  두 마리는 침을 질질 흘리며, 주인님이 내릴 명령을 받들어지금부터 벌일 만찬의 생각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만 같아 보였다.

해골이 씨익 웃었다.
아니 웃지 않았다. 그렇게 착각했을 뿐이다.
물론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벨이 그만큼 궁지에 몰려 있었을 뿐이었다.

"뇌창!!!"


탈리스만에 전기가 맺히고, 나뭇가지 굵기의 창이 날아가 빨간 개의 발밑에 박힌다. 공포에 머릿속이 녹아내린 상태에서 명중을 바라는 것이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행동이 개들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벨 님!!"

"컹! 컹컹!"


개가 달려들었다. 벨은 뇌창을 한 더 던지려다가, 달려든  번째 개에게 팔을 물려 탈리스만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남은  손으로 나이프를 꺼내들려고 했지만, 나머지 한 마리의 붉은 개가 그의 가슴팍을 머리로 박치기하여 넘어트리고야 말았다.

"안 돼!"

릴리가 카누에게 빼앗길 뻔 했었던 마검을 품에서 빼들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붉은 개를 겨냥해, 힘을 해방시켰다. 마검에 깃든 불길이 뱀처럼 쏘아져 붉은 개를 꿰뚫었-


"거, 거짓말?!"


거짓말같이 꿰뚫지 못했다. 자극을주기에는 충분했을지 모르지만, 화가  탓에 벨의 목을 물려는 것을 그만두고 릴리에게로 관심을 돌리려던  개들을 산양 머리의 괴물이 검을 들어 하던 일을 계속 하라는 듯이저지한 것이다.

"윽..., 어서 나이프를..."

"히, 히익..."

개에게 상황을 맡겨두고서 아무 것도 하지 않던 산양머리의 괴물이 검을다시 질질 끌기 시작한다. 끼긱끼긱. 뇌를 직접 날붙이로 긁는 듯한 시끄러운 소리에 개들과 힘싸움을 하던 벨이 괴물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보기 위해서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히, 히끅..."

벨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산양머리의 괴물은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져버린 릴리를 향해서 가고 있었다. 절망한 이의 표정을 감상이라도 하는 것인지 일부러 검을 끌며, 일부러 천천히 다가가는 모습이 너무나도 가증스러웠다.

안 돼. 벨이 속으로 외쳤다.
이대로 릴리가 죽는 건, 소중한 사람을 또 하나 잃게 되는 건, 그 무엇보다도 무서워.

괴물의 시뻘건 시선도, 시뻘건 개의 유황 냄새나는 아가리도.
릴리를 잃게 되는 것보다는 무섭지 않아.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에 비하면-

벨의 가슴속에서, 한 줄기 불길이 피어올랐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벨이 비명과도 같은 기합소리를 내질렀다. 목을 물려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딱딱거리는 개 한 마리의 아가리에다가 주먹을 짓찔러넣었다. 에이나에게서 선물받은 에메랄드 빛 팔목 보호대가 삐걱삐걱 비명을 질렀다.
그대로 혀를 붙잡고, 뽑아낼기세로 당긴다. 개 한 마리의 힘이 느슨해진 사이에, 나머지 개  마리의 힘을 억지로 밀어내어 억지로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일어나자마자 곧바로보호대 속에 수납해두었던 바젤라드를 뽑아 개의 목을몇 번이고 찌른다. 으직, 으직, 쥐덫처럼 팔목을 물고 늘어지는 개가 지쳐 추욱 늘어질 때까지  번이고,몇 번이고 짓찔러 넣는다.
마지막 남은  한마리가 기회를 보다가 숨을 들이마신다. 벨은 중층의 헬 하운드를본 적은 없었지만, 그 행동이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대강깨달을  있었다.


"뇌차아아아아앙!!!!!!!!"


저것을 어떻게 막을지.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떨어트린 탈리스만을 주워들어 곧바로 불개에게 쏘아내었다. 이번에 쏘아낸 번개의 창은 다행히도 빗나가지 않았고, 간단하게 불개의 사지를 관통한 뒤, 폭발했다.


"벨 님!! 뒤를 봐요!!"

"윽?!"

자신의 수하를 쓰러트린 적을 더 위험한 적으로 판단한 것인지, 산양머리 괴물은 이미 릴리를 표적으로 두고 있지 않았다. 역수로 쥐어 땅에 질질 끌기만 하던 검 자루를 정수로  뒤, 벨에게 휘두르고 있었다.


"악-?!"

릴리의 조언은 너무 늦어 있었다. 산양머리의 괴물이 휘두른 거대한 대검이 바람을 가르고, 당황에 빠진 벨이 방어를 위해서 자기도 모르게들어 올린 바젤라드를 박살내고 저 멀리 날려버린다. 벨에게서 흩뿌려진 피가 가득 튀어, 벨이 날아간 궤적에 한 줄기 시뻘건 흔적을 남겼다.

개 두 마리를 쓰러트릴 때까지만 해도 솟아오르던 열기가, 단숨에 영하로 수직강하한다.

"벨 님! 벨 님!"

공포보다 벨에대한 걱정이앞선 지금은 쉽사리 움직일 수 있게된 몸을 질질 이끌고, 릴리가 울음을 터트리며 벨을 불렀다. 산양머리 괴물이 막아선 탓에, 벨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미동이 없는 몸은 금방이라도 만지면 차갑게 느껴질 것만 같아서- 너무나도 무서웠다.

산양머리 괴물이 드디어 너의 차례다 라고 말하는 듯이 벨에게서 완전히 몸을 돌리고 릴리 앞에 섰다.

릴리는 멍청이에요. 처음 님이 도망치라고 했을 때, 도망쳤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니까, 이건 벌이에요. 벨 님의 말을 듣지못한 멍청한 파룸에게 몬스터 씨가 내리는 벌-

"뇌창,...!"


산양머리 괴물의 어깨에서 전기가 튀겼다.
쓰러졌을 터인벨이 탈리스만을 흔들어 번개의 창을 쏘아내고 있었다. 포션을 마신 것인지 출혈은 더뎌져 있었지만, 커다란 상처가나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아플텐데, 무서울텐데, 동료를 위해서 도망치지 않고 산양머리 괴물을 막으려 하고 있었다. 상처를 보면 가슴이 아팠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보면 눈물이 더 쏟아졌다. 릴리는 멍청이같이 착한 자신의 은인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벨... 님..."

"도망쳐, 릴리. 네가 도망쳐야 나도 도망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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