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Spotlight: Chosen Undead
희뿌연 과거.
늙은이는 그녀에게 말했었다.
너의 손등에 나타난 것은 저주받은 불사의 증거라고.
그렇기에, 너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 유폐될 것이라고.
그것이 너의 운명이라고.
=== === ====
==== === ===
농사를 짓고, 동물들을 키우고, 해가 지면 잠에 들고, 해가 뜨면 일어나고.
웃으며 피로한 아버지의 농기구를 대신 들어주는 일도 있었으며, 겨우내 배가 고픈 동생들을 위해서 자신의 식사를 양보하는 일도 있었다.
어쩌다 일이 한적하다 싶으면 마을 중앙의 화톳불을 지키는 가장 늙은이에게 찾아가 위대한 기사왕 렌달이나 커다란 모자를 쓴 위대한 마법사 로건에 대한 옛날 이야기를 듣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들은 이야기를 어린 동생들에게 자장가 삼아서 들려주는 일도 있었다.
태초에 불길이 있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었고, 신이니 거인이니 고룡이니 하는 건 알지도 못했다. 숲 깊숙히 들어가면 커다란 고양이나 커다란 버섯인간에게 쫓기게 된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불사에 관해서도, 가끔 가다 마을 바깥에서 찾아온 행상인들에게서 죽여도 죽여도 다시 일어나는 무서운 '인간을 닮은 괴물' 정도로 간략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을 뿐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어머니를 따라 옷감을 짜고, 해질녘에 아버지를 마중하러 나간 날이었다.
손등에 빨간 원이 그려져 있었다. 소녀는 어디 부딪친 적이라도 있었던가,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피부가 원 내부로 빨려들어가는 모습이 구역질이 날 정도로 불길했지만,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며칠 뒤, 왕국의 기사들과 몇몇의 성직자들이 찾아왔다.
기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마을의 모든사람들을 모아들였고, 성직자들은 그들을 벗게 하여 신체 구석구석을 검사했다. 전염병이라도 돈 것일까. 영문도 모른채 소녀는 검사에 응했다.
검사는 오래 진행 될 필요가 없었다.
백교의 성직자들이 웃는 표정 그대로 굳었다. 기사들은 이미 검을 뽑아들었고, 마을 주민들은 겁에 질린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바이저를 내린 건장한 기사 하나가 다가왔다. 어라, 하는 사이 검집에서 빠져나온 바델 특유의 관통 직검이 소녀의 가슴팍을 찔렀다.
부모님의 울부짖음이 등 뒤에서 가득 울렸다. 뒤늦게 가슴이 아파왔다.
멀어져가는 소리.
아무래도 백교의 성직자들은 그들의 나라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불사자를 위해서, 마을을 통째로 소각하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눈으로, 전염의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당당한 목소리로-
---------------
---------------
에스트는 울부짖으며 바델의 관통직검을 똑바로 내질렀다. 전신이 자상으로 가득했던 화염의 사제는 끝내 단말마를 내뱉으며 거대한 몸을 땅에 뉘였다.
커다란 놈이 쓰러지자, 불을 내뱉는 작은 데몬들이 다가온다. 에스트는 잠시도 몸을 쉬게 두지 않고, 먼저 달려들어 데몬들의 몸을 찢어발겼다. 불길이 몸을 그을려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내질렀다.
던전 벽을 부수고 나타난 소머리 데몬이 에스트에게 달려든다. 무식하게 휘둘러진 거대한 도끼가 대취의 방패에 틀어막히자, 에스트는 망설임없이 작은 데몬들을 내버려두고 소머리 데몬에게 달려가 그것의 가슴팍에 검을 찔러넣었다.
단단하고 조밀조밀하게 짜여진 근육에 검이 틀어박히지 않지만, 개의치 않고 같은 곳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짓찔러넣는다.마치 찔러 죽일 생각이 아니라 부숴 죽일 생각이 가득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Grrrruiaaaaaaa!!!"
한 불타는 나무 데몬이 달려들어 소머리 데몬에게 상처를 내는 것도 개의치않고 냅다 에스트를 쳐 날린다. 태초부터 존재한 나무로 만들어졌다지만, 결국 나무일 뿐인 대취의 방패가 불에 휩싸여 타오르기 시작한다.
비록 방패는 끝까지 놓지 않았지만, 에스트의 팔은 비틀려 부러져 있었다. 기습에 대한 대처가 늦어, 방패의 각도가 좋지 않았던 탓이었다.
"...어째서!"
에스트가 가슴 깊이 응어리진 것을 뱉듯이 외쳤다. 비틀비틀 일어나고는 있었지만, 이미 포위당해 가망이 없어보였다.
불타는 나무 데몬의 뒤로 산양머리 데몬들이 수 많은 불개를 이끌고서 걸어오고 있었다. 땅 속에서 솟아난 카오스 이터들이 그녀의 등 뒤를 에워싸고 있었고, 던전의 높은 벽을 타고 지네 데몬이 스멀스멀 기어내려오고 있었다.
"어째서!"
그녀가 불사자의 도시 하층에서 구한 빈하임의 그릭스는 보기 드물게도 착한 마법사였다. 비록 그의 정체는 빈하임에서 빅 햇 로건을 감시하기 위해서 파견한 암살자였지만, 에스트에게 마술을 가르쳐주는데 성심성의를 다하였다. 그는 스승 빅 햇 로건을 존경하고, 동경하고 있었으며, 그와 같은 위대한 마술사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에스트 역시 그가 그렇게 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카타리나의 기사 지크마이어는 순례자이기 이전에 진정으로 기사였다. 비록 낙천적이며 행동거지가 느렸지만, 모험을 즐기고 은의를 소중히 여기며, 곤란에 빠진 자를 위해 몸을 던질 수 있는 진정한 기사였다.
에스트는 그가 무사히 모험을 끝마치고, 그의 노래가 후대에 걸쳐 내려갈 수 있기를 바랬다.
혼돈의 공주, 이름 없는 이자리스의 딸은 이자리스를 덮친 저주의 불길에서 몸을 아슬아슬하게나마 지킬 수 있었던 소녀였다. 비록 반신은 데몬으로 변했지만, 일단 아슬아슬하게나마 살아 남았으니 원하는 삶을 살아가면 될 터 였을 것인데, 그녀는 망자의 마을에서 살아가는 망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마을에 만연한 병들을 스스로의 몸속에 새겼다. 스스로를 잃었다.
에스트는 그녀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젠가 스스로를 위해서 살아갈 날이 오기를 바래기도 했다.
"어째서!!!!"
에스트가 비통한 목소리로 외쳤다. 언젠가 대성할 마술사는 꽃봉오리가 채 터지기도 전에 센의 고성에서 져버리고 말았고, 이름을 날려야 할 기사는 무의 세계가 남긴 잔해에서 자신의 딸에게 최후를 맞이했으며, 언제나 보답받지 못한 삶을 살아온 이형의 소녀는 자신의 언니를 둘이나 빼앗아간 무뢰배의 손에 그 목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어째서.
어째서.
그들이 어째서 그리 되어야만 했는가.
어째서 그리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는가.
자신 때문이다. 모두 자신의 잘못이었다. 저주받아 잊혀져버린 불사자 하나가 그들을 망쳐버리고 만 것이었다.
꿈도 목표도 미래도 모르는 불사자가 시련이니 사명이니 하는 헛된 희망에 목을 걸고서 주위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보지도 않고 내달려왔기에 그리 되고 만 것이다.
그래,
자신이 어째서 태초의 불길에게 이끌렸는가?
자신이 어째서 멸망해가는 세계를 보며 떠나가려던 발길을 멈추었는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에스트가 검을 휘둘러 산양머리 데몬의 목을 쳐냈다. 개 두 마리고 사지를 물고 늘어지는 것을 밟아 죽이고 카오스 이터가 뿌린 부식액을 막기 위한 방패로 내던진다. 지네 데몬이 휘두른 거대한 팔을 막기 위해서 쓰지 못하게 된 팔을 버리고, 계속해서 내달려 나무 데몬의 가슴팍에 검을 찔러 넣는다.
죽고 싶었다.
그만 죽고 싶었다.
'하지만, 나조차도 나를 잊는 건 무서워-'
그것이 죄였다.
자신의 존재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스러져 갔나.
죄 깊은 자신은 아직도 이렇게 죽지 못해 살아있거늘, 불이 꺼져가는 세계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저렇게나 덧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세계가 이어지기를 바란 것이 아니다.
사명을 완수하기를 바란 것도 아니다.
그저 이 불길이라면 나를 잊고 나를 잃기 전에 뼈 한 줌, 소울 한 조각 남기지 않고 태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저주받은 자신을 그렇게 태워버리는 것으로 저 세계가 다시 색을 되찾는다면, 그것이 분명 합리적인 정답일 것이라고.
뿌리부터 자기위안으로 썩어있었다. 자살을 원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지 세계를 구한다는 헛소리로 자위하고 있었다.
자살을 위해서 달려온 자신과,
그런 자신을 위해서 아낌없는 도움을 건네었다가 결국 쓰러져버린 이들.
"나는... 나란 녀석은...!"
그런데, 어째서.
이름도 없던 자신이 어째서 에스트가 되어 있는가. 어째서 포기를 모른 채 아직도 살아가고 있는가.
화톳불의 따뜻함을 바라고 있었다.
감사받는 것의 따뜻함을 갈구하고 있었다.
평안함에 빠져 어느새잊어버린 사랑을 바라고 있었다.
그것이 죄였다.
== ==== === =====
= === ======== ==
"무슨 일 있어?"
오라리오의 높은 벽. 오늘따라 유난히 상태가 좋지 않은 벨 크라넬의 모습을 보며 아이즈가 물었다. 검도 곧지 않고, 움직임도 굼뜨고, 그 외에도 여기저기 상태가 상당히 안 좋아 보였던 것이다.
"죄, 죄송해요, 아이즈 씨."
"으응. 딱히 똑바로 하라고 책하는 게 아니야."
그냥 궁금할 뿐. 아이즈가 덧붙였다.
벨은 자신이 그렇게 심려끼치는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하고 아이즈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서 입을 열었다.
"그, 저희 파밀리아의 단장님이 며칠 째 돌아오시질 않고 계시거든요."
"걱정?"
"네. 걱정되요. 강하신 분이라지만 그래도..."
벨이 말을 흐렸다. 저번처럼 사흘이나 나흘 정도 지나면 훌쩍 돌아올 것이라고 헤스티아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미 일주일이 넘었음에도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아침만 해도 해맑음의 대명사, 신 헤스티아가 알바처에서 나오지 말라고 통보를 들을 정도로 침울한 기색으로 에스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벨도 파밀리아 홈에 남아서 주신님을 위로해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헤스티아가 초췌한 모습으로 자신 때문에 너의 일을 잊지 말거라, 오늘도 발렌뭐시기가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라고 말하는 탓에 반쯤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이었다.
"...금방 돌아왔으면 좋겠네."
"감사합니다, 아이즈 씨."
아이즈의 위로를 받고도, 벨은 뒤숭숭한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에스트가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