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Spotlight : Realis phrase
모험가들 사이에서 웅성임이 퍼져나간다. 정신 나간 녀석인가 하고 바라보는 시선이 대다수였다. 정면에서 거인 살해자, 1급 모험가, 그것도 신까지 대동하고 있는 파밀리아 전원들이 있는 앞에서 저렇게 무례한 요구를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저런 복장을 한 모험가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던 그들에게, 에스트의 모습은 그야말로 별종이었다. 별종이라기보다는 그냥 정신나간 놈이나 마찬가지였다.
"야, 네가 뭘 생각하는 지는 몰라도 우리는-"
"내 알 바 아니야. 나는 두 번 안 말해. 그거 당장 내 놔."
에스트는 1급 모험가의 친절한 설명마저 씹어버리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나름 친절하게 돌려보내려던 베이트는 뒷목을 긁었고, 주변에는 고요함이 퍼져나갔다.
그냥 '내 놔' 뿐이었다면 거기서 끝날 수도 있었지만-
"...그 토마토 자식도 그렇고, 이 자식도 그렇고, 모험가란 자식들이 하나같이 정말-"
"...여기 인간들은 아무래도 불사자 말을 들어 쳐먹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베이트가 머리에 열이 뻗쳐 삼각건을 풀고 몸을 풀자, 에스트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머리를 차게 식히며 품속의 무한의 상자에서 낫 한 자루를 꺼내들었다. 이쪽이 이렇게나 굽히고 나가주었거늘, 들어 먹지를 않고 싸움을 걸어왔으니, 죽여도 저쪽이 할 말은 없을 터지만...
생명수확의 낫. 생명을 취하는 반룡의 힘이 깃든 낫은 에스트의 손에서 요사스럽게도 빛나고 있었다. 비록 과거, 프리실라의 생명을 빼앗는 힘이 불사자인 에스트에게는 통하지 않았지만, 저 인간들에게는 충분히, 아니, 너무나도 과분할 정도로 먹혀들 것이다.
즉, 위협이었다. 당장 안 내놓으면 너희들은 죽을 것이다, 라는 무력시위였다.
"뭐 해. 안 덤비고."
"......윽."
금방이라도 싸울 기세 만만이었던 베이트가 움츠러들자, 또 다시 뭣모르는 모험가들 사이에서 웅성임이 퍼진다. 이 자리에 낫이 아니라 프리실라 본인이 있었다면 모두가 다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아무래도 그저 힘 만이 깃든 무기에 대해서 알아챌 수 있을 만한 건 저 1급 모험가들인가 뭔가 하는, 그나마 격이 높은 녀석들 밖에 없는 듯한 모양새였다.
"뭐 하냐고, 꼬리 내린 개. 직접 죽음을 맞이하니까 몸이 안 움직여?"
"너... 고작 무기 하나 가지고...!"
"아서라, 베이트."
열은 뻗치지만, 이 자리의 그 누구보다도 야수에 가까웠던 베이트는 자신을 몇 번이고 살려준 동물적 직감에 따라,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그의 사정을 보아주듯이 작은 파룸 하나가 베이트를 말리며 앞으로 나섰다.
"당신은?"
"로키 파밀리아의 단장, 파룸 핀 다무나다. 우리 동료의 무례에 대해선 사과하지."
무례는 아무리 보아도 에스트가 저질렀지만, 비위를 맞춰주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핀은 말하면서도 생각했다. 등골이 오싹오싹한 것이 당장이라도 일을 끝내고 저 낫을 치우게 만들 생각이었다.
"너는 말이 통해?"
"...무슨 의도인지는 몰라도, 이것을 원하는 것 같더군."
"그래, 말이 통하는구나."
핀이 어느새 베이트와 피오네에게서 압수한 두 소울의 모습을 보며 에스트는 생명수확자의 낫을 다시 무한의 상자 안으로 되돌렸다. 낫을 보며 메두사를 본 것처럼 굳어있던 로키 파밀리아의 단원들이 하나 둘 씩 막혀있었던 숨을 골랐다. 어중간하게 강했던 레피야나 라울 같은 경우는 거의 호흡 곤란으로 죽어가고 있던 시점이었다.
"원한다면 주도록 하지. 대신, 정보를 공유해 줄 수는 없겠는가?"
"...정보?"
핀은 소머리를 한 몬스터와 부식액을 내뿜는 촉수 몬스터에 대해서 떠올리며 조건을 붙였다. 소머리 몬스터는 단 한 마리 뿐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체액으로 장비를 못쓰게 만들었던 눈 많은 촉수 몬스터는 몇 마리고 튀어나왔었다.
이 가면을 쓴 소녀는 아무래도 그것들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이 영문모를 털난 물방울 같은 것에 바로 반응했겠지.
리더로써, 다음 원정에 대한 준비는 확실하게 했어야만 했다.
"먼저, 그대의 이름을 듣고 싶다만."
"에스트."
들은 적 없다.
위험하기 그지없는 낫에 대한 것을 제외하더라도, 심층 몬스터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기에, 분명 저명한 파밀리아나 사라져간 유명한 영웅의 이름이 튀어나올 것이라 생각했던 핀에게는 의외의 일이었다.
"에스트, 그대는 이것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그건 영혼. 모든 생명의 업보. 쌓아 올린 것."
"엑세리아 같은 건가?"
"틀리진 않았네."
핀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 정체불명의 소녀가 하는 말이정녕 옳다면, 던전의 몬스터들은 모험가들이 신들에게서 팔나를 받는 것처럼, 던전 깊은 곳에 있을 무언가에게 힘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핀은 던전의 특성상 언젠가는 몬스터들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긴 있었다. 그렇다면, 소머리를 한 몬스터는 별 볼 일 없던 미노타우로스가 이 힘을 받았기에, 좀 더 강한 힘을 얻고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소녀의 말에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어딘가가 너무나도 크게 어긋난 것 같아서-
"니는 그걸 어찌 아노?"
"로키 님...!"
가는 실눈을 더 날카롭게 뜨고, 잠자코 앉아있었던 로키가 물었다. 에스트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핀에게 다가가, 빼앗듯이 핀의 손에 올려져 있던 소울 두 개를 채어가, 손으로 으스러트렸다. 아무리 예상 외의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다지만, 레벨 6, 최강의 일각인 핀 디무나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소울을 빼앗기는 모습에, 그 자리의 모두가 질릴 수밖에 없었다.
하얀 물방울을 닮았던 작은 소울 두 개에게서 하얀 기운 같은 것들이 에스트에게 빨려들어간다. 먹어치운다고 해도 좋을 만큼, 단 한 조각도 남겨놓지 않고 빨아들였다.
"소머리 데몬... 카오스 이터..."
둘 다 몇 번이고 죽이고 되살아나고 죽였던 괴물들이다. 에스트에게 있어서, 그들이 헌납하는 소울의 양은 이미 외울 정도나 마찬가지였다.
...소머리 데몬 쪽은 약간 다른 것 같기도 하지만, 저네들이 몇 번이고 소 머리를 강조했으니 맞겠지. 에스트는 대충 넘겼다. 중요한 건, 둘 다 이자리스와 관련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솔라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자리스의 하나가, 어쩌면 자신이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있는 것처럼, 이자리스 그 자체가 살아서 이곳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니, 니는 뭐꼬...!"
금방 자기 입으로 영혼이니, 생명의 업보라느니, 쌓아올리는 것이라느니, 라고 했었던 주제에, 던전에서 태어난 것의 영혼을 먹어치우는 에스트를 보며, 로키가 기겁한 듯이 물었다. 저래서야 마석을 직접 씹어먹은 것이나 다를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흔하디 흔한 불사자."
한 마디를 던진 에스트가 벙찐 인간들을 뒤로했다.
던전에 볼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