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화 〉Spotlight: Chosen Undead (3/71)



〈 3화 〉Spotlight: Chosen Undead

“으으......”

“오오! 깨어났느냐?!”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암자색 머리카락의 소녀를 보며 헤스티아가 기쁜 듯이 외쳤다. 비도 많이 맞았는데 통 깨어나질 않으니 혹시 어디가 잘못된 게 아닐까 하고 걱정하고 있던 차였던지라, 기쁨은 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신기한 얼굴로 바라보는 새까만 머리카락의 로리 거유 화방녀를 보았다. 검은양갈래 머리카락에는 윤기가 돌았고, 새하얀 피부는 상한  하나 없이 매끈했다. 하얗고 긴 손가락은 평생 노동을 몰라온 자들의 손 그 자체였다.
분명 고귀한 신분이겠지.

......아니, 어쩌면 신일지도 모르겠다. 소녀는 화방녀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을 느끼며 생각했다. 인간 크기의 신이라니, 신기하기도 했지만. 왕의 4기사 중 하나인 매의 기사 키아란 역시 거인족 주제에 인간과 같은 사이즈이지 않았던가.

“그, 그렇게 뚫어져라 보면 곤란하구나!”

화방녀치고는 너무 활발한 것이 아닐까. 보면 곤란하다고 했으니 굳이 더 볼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계승의 제사장에 스스로를 가둔 아나스타샤처럼 뭔가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소녀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화로에서 스스로를 불태웠던 것까지는 기억했다. 그녀가 과거의 우라실 지하에서 마누스를 쓰러트린 순간을 기점으로 그 후의 기억은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지만, 스스로를 불태운 그 순간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것일까. 물론 답은 찾을  없었다.

이곳은 로드란이 아니다. 이것만큼은 확실하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망자는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으며,  많던 화톳불의 존재조차 단 하나, 눈앞의 고귀해 보이는 소녀가 품은 불길을 제외하고서는 어디에서도 느낄  없었다.

세계는 멸망을 피한 것일까?
지금으로써는 알 수 없다. 이곳이 소녀 자신이 알던 세계가 맞는지도 모른다.

소울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검은 숲의 정원에서 주워최초의 화로로 향할 때까지   번도 벗은 적 없는 아스토라 갑옷은 눈앞의 화방녀가 벗긴 것인지, 소녀는하얀 천 옷 한 벌을 입고 있을 뿐이었다.


“갑옷은 너무 상해 더 이상 쓸  없다고 하더구나.”

“.......”

갑작스러운 친우의 사망선고였다. 거인, 데몬, 영웅, 신, 고룡, 이들 모두를 상대해온 갑옷의 죽음에 소녀는 가슴 속이 살짝 비는 것을 느꼈다.


“그, 내 이름은 헤스티아라고 한다. 네 이름은 무엇이느냐?”

소녀에겐 너무나도 어려운 질문이었다. 이름같은 것, 잊어버린  수 십 년은 족히 흘렀다.
망자가 만연한 시대. 세계가 멸망으로 치닫던 시대. 망자화의 조건은 단 하나, 정신이 죽는 것이기에, 이름이 없거나, 이름을 잃은 자들은 수두룩하게 쌓여있었다. 소녀는 그 중 하나였을 뿐이다.


“없어.”

“이름이 없다니..., 그럼 어디서 왔는지는 기억하고 있느냐?”

“로드란.”

암자색 머리카락은 멸망해 사라진 족속의 상징. 출신은 불명.
애초에, 이름도 삶도 한낱 망자로써 북방의 수용소에 놓아두고 왔다면, 그녀가 새로 태어난 곳은 로드란일 터다.

하지만 헤스티아는 입술을 삐죽일 뿐이었다.
로드란이 어디야. 헤파이스토스의 집에서 니트로써 승화한 화로의 여신은 다독을 사랑하는 여신이었으나, 로드란이라는 지명은 들어본 적이 없다.


“아노르 론도는 알고 있어?”

“그건 또 어디인 것이냐?”


로드란을 모른다면 신들의 도시는 알까나 싶어서 소녀가 헤스티아에게 물어보았지만, 모르는 것은 여전했다.
역시 다른 세계일까. 시간축이 꼬이고 공간축이 뒤틀린 로드란에선 세계를 넘나드는 것쯤이야 간단한 일이었으니, 이렇게 될 수도 있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당장 에레미어스 회화세계만 해도 작은 세계였지만, 로드란과 완벽히 단절된 차가운 세계였다.

“이봐! 헤스티아, 이것 봐! 이건...,”

이야기가 끊어진 순간, 불길같이 타오르는 새빨간 머리카락을 지닌 애꾸눈의 여성이 문을 박차고 방으로 들어왔다. 대장장이 여신의 손에는 소녀와 함께 여행해온 밑 빠진 무한의 상자가 들려 있었다. 헤파이스토스는 소녀가 깨어있었을 줄은 몰랐다는 표정으로 낭패의 표정을 지었다.
소녀가 이를 까득 갈고, 손에 불길을 만들어내었다. 주술왕의 이명이자, 이자리스의 마녀가 탄생시킨 타오르는 불길, 대화염구였다.

“돌려줘.”

“이, 이봐, 그만두거라! 헤파이스토스도 훔쳐간 것 돌려주고!”

“훔치지 않았어! 무엇 하나 빼간 것 없어. 지금 바로 돌려줄 테니 그 불길을 집어넣어.”


헤파이스토스가 식은땀을 흘리며 바닥에 무한의 상자를 내려놓았다. 소녀는 주먹을 쥐어 불길을 지워버리더니, 천천히 다가가 무한의 상자를 챙겼다. 헤파이스토스의 말대로, 사라진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에스트는 어디 있어?”

“에스트?”

“갑옷 벨트에 매달아둔 초록색 병.”

“아, 그건 내가 가지고 있었다. 미안하네. 그, 이 녀석이 나에게 반응을 해서 말이야.”

헤스티아가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초록색 병을 소녀에게 돌려주었다. 그윈과의 전투에서 모조리 소모했을 화톳불의 기운이 여태껏 본 적 없을 정도로 가득 차올라 있었다.
아직은 정신력도 체력도 문제없었지만,  정도라면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얼마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겨낼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겨났다.


“도대체  때문에 일을 키운거야, 헤파이스토스!”

소녀가 자신의 상태를 다시 점검하기 시작하자, 헤스티아가 조용히 헤파이스토스에게 외쳤다. 강도질이나 도둑질이라고 오해받아도  말 없는 상황인지라, 일이 잘못되면 모조리 헤파이스토스에게 떠넘길 심산이었다.


“저 아이, 생각보다 위험해.”

“무엇이 말이냐? 불길 말이냐?”


계약 상태도 아니건만, 아무런 촉매도 없이 간단하게 마법을 발현시켰던 것을 기억하며 헤스티아가 물었지만, 헤파이스토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 상자, 크기는 작아 보여도, 안은 바깥보다 더 커.”

“그것이 위험한 것이냐? 그런 물건은 이 오라리오에도 몇  있지 않느냐?”

“저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면 그런 말은 못 할 걸.”

누군가의 혼을 사용해 만든 듯한 무기들.
이미 공정이 끝나 혼의 주인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수 없지만, 분명 희대의 괴물들과 영웅의 혼으로 만들어졌을 것이 분명한 정도를 자랑하는 불길함.
어쩌면, 신조차도 재료로써-

하지만, 헤스티아는 간단히 헤파이스토스의 조언을 받아넘겼다.


“시끄럽다, 헤파이스토스! 나는 이미 결정했다!”

“헤스티아! 나는 너를 위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나도 이미 알고 있어, 헤파이스토스.”


소녀가 에스트 병이라고 불렀던 초록빛 병을 만졌을 때, 헤스티아 역시 소녀의 어딘가가 잘못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병은 언제 어디에서 살았을지 모를 누군가의 꿈틀대는 혼을 재련해 만든 병인 것이다. 그것도 액체를 담기 위한 병이 아니라, 온기를 담기위한 병이었다.

그렇기에 헤스티아는 저 소녀를 자신만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긴 것이었다.
어째서인지, 저 온기는 자신만이 담을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있었다.

화로의 여신으로써, 하계의 아이들에게는 어느 하나 해줄 수 없었던 그녀에게 확실하게   수 있는 것이 하나 생겼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이 상태의 옹고집 헤스티아를 꺾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헤파이스토스는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지만, 저 상태의 헤스티아를 가까운 곳에서 몇 번이고 보아온 친우로써,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후우, 맘대로 해.”

“허락해주는 건가!?”

“네 일을 내가 왜 허락해줘야만 하는 건데.  알아서 하라고. 내 도움은 기대도 하지 말고.”

“에에, 헤파이스토스, 삐진 건가?”

당연히 삐지지, 그럼. 헤파이스토스는 속으로 중얼거리고서 자신의 작업장으로 돌아가버렸다.
둘만 남은 방에서, 헤스티아가 소녀를 보았다.


“혹시 나를 알고 있느냐?”

“아니, 몰라.”

질문을 했는데도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며 헤스티아가 살짝 입술을 내밀었다. 헤파이스토스 바보자식. 헤스티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를 ‘불 지키는 이’라고 부르지 않았느냐?”

파밀리아가 없는 헤스티아의 인지도는 땅을 친다. 기껏해야 헤파이스토스의 몇몇 아이들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헤스티아를 보자마자 화로를 수호하는 여신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당신 같은 인간을 몇 명 알고 있을 뿐이야.”

“오호라.”


어쩌면 자신이 신계에 있을 시절, 헤스티아라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자신에게 가호를 빌던 몇몇 무녀일지도 모르겠다고, 헤스티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간 감각이 무뎌진 신은 그런 무녀가 마지막으로 나타났던 것도  백 년 전이라는 것조차 잊고서 그저 신기해할 뿐이었다.

“에스트, 그대는 나의 권속이 될 생각이 없는가?”

“에스트?”

“그대의 이름이다. 이름이 계속 없는 것도 곤란하니 말이다.”

헤스티아의 말에, 소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이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투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순례의 시작에, 아스트라의 상급 기사에게 받은 에스트 병이 자신의 이름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똑같이 명사에서 따온 이름이지만 ‘우라실의 땅거미’ 같은 이름보다는 양반이기도 하고.


“좋아, 에스트. 나의 권속이 될 생각은 없는가!?”


하계에 내려온 지 벌써 2개월, 오는 자 가리지 않고, 떠나는  붙잡지 않는 것을 모토로, 단 한 명의 아이도 받지 못한 채 니트 생활을 해온 헤스티아가 처음으로 파밀리아 결성에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 밖에 없다라고 생각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이것마저 거절당하면 정말 신으로써 인생을 끝내고 니트로 진화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겠어.”

“정말인가!?”

헤스티아가 기쁨에 겨워 외쳤다.
그런 헤스티아의 가슴 졸임이 무색하게도, 에스트-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소녀는 아주 옛날에 혼돈의 딸과 맺었던 계약과 비슷한 것이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간단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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