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Spotlight: Chosen Undead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무슨 삶을 살았던가.
이름은 무엇이었던가.
소녀는 자신의 몸에 다크 링이 새겨지기 전의 기억이,
북방의 수용소로 보내지기 전의 기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손에 들린 것이라고는 늙은 마녀가 남겼다는 펜던트뿐,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로써 그저 감옥에 갇혀 수 십 년을 죽은 채 살아왔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구원의 빛이 찾아왔다.
그녀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어주었던 채광창으로, 비쩍 마른 불사자의 고깃덩어리가 떨어졌다. 위를 올려다보면 아스토라 양식의 갑옷을 입고 있는 이방인이 채광창을 뒤로 하고 있었다.
이름도 모를 기사에게 감사함을 가질 시간도 없이, 소녀는 불사자의 고깃덩어리를 뒤졌다. 감옥의 문을 여는 열쇠가 있었다.
멀리 나아가지 못한 곳에, 자신을 구해준 기사가 쓰러져 있었다.
에스트 병, 그리고 불사가 된 자는 로드란으로 향해 자각의 종을 울려야만 한다는 사명만을 소녀에게 맡기고서 이름 없는 기사는 쓰러졌다.
희망이라 여겼다.
은혜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저주일 뿐이었다.
불사의 저주보다도 더욱 깊고, 질 나쁜 저주였다.
소머리 데몬을 넘어, 종의 가고일을 넘어서. 수많은 망자들을 베어넘기고서, 불사의 교구에 남겨진 첫 번째 자각의 종을 울릴 수 있었다.
불사의 도시 하층에 숨어든 산양머리 데몬을 쓰러트리고, 최하층에 둥지를 튼 고룡의 후손을 로트렉과 솔라의 도움 아래에 참살했다. 혐오스러운 탐식의 드래곤의 뱃속을 갈라 망자의 마을의 열쇠를 얻는 소녀의 모습을 보며, 여신의 기사는 질색했고, 태양의 기사는 당황한 듯 웃을 뿐이었다.
망자조차 되지 못한 이형의 시체들, 식인 인간들, 가시의 기사. 독 늪의 괴이들, 그리고 이자리스의 하나, 혼돈의 마녀의 목을 떨어트리고, 여태까지 몇 천 번 죽어나갔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종루에 올라 두 번째 종을 울렸다.
아스토라의 기사가 넘긴 사명은 여기서 끝이었다. 그만 쉬고 싶었다.
하지만, 앞을 생각하지 않고 달려온 소녀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세계의 뱀이 나타났다. 그는 그녀에게 아노르 론도로 향해, 왕의 그릇을 찾아 사명을 다하라고 말했다. 몇 번의 죽음을 지나면서도 앞날을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그녀에게, 세계의 뱀의 명령 아닌 명령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센의 고성. 카타리나의 지크마이어와 빅 햇 로건. 뱀 인간들. 거대한 아이언 골렘.
망자가 된 영웅들과 몇 번의 죽음을 준비해도 부족한 시련들을 넘어, 소녀는 황금의도시에 도착했다.
신의 도시 아노르 론도.
처형자와 용 사냥꾼을 쓰러트리고, 소녀는 태양의 왕녀 앞에 무릎 꿇었다.
왕녀는 이름도 없는 불사자 소녀에게왕의 그릇을 건네며 왕이 될 것을 종용했다. 죽음을 넘어서서, 멸망으로 달려가는 세계를 구원하기를 부탁했다.
세계의 뱀은 왕의 그릇을 채우기 위해선 네 개의 왕의 소울이 필요하다고 했다.
작은 론도 유적에 봉인된 4인의 공왕이 하사받은 왕의 소울.
비늘 없는 고룡, 백룡 시스가 하사받은 왕의 소울.
첫 번째로 죽음을 맞이한 자, 묘왕 니토가 찾아낸 왕의 소울.
지금은 영락해 모든 데몬들의 어머니가 되어버린 이자리스가 찾아낸 왕의 소울.
죽고 죽고 또 죽고 계속해서 죽었다. 수 없이 많은 죽음이 이어졌다.
유령에게 죽었다. 사지가 결정이 되어 죽었다. 마법에 꿰뚫렸다. 추락해 곤죽이 되었다. 해골에게 죽었다. 독에 중독되어 죽었다. 산성액에 녹아 죽었다. 데몬에게 죽었다. 베이거나 찔려 죽는 것은 일상이었다. 불타 죽었다. 용암에 빠져 죽었다. 물려 죽었다. 찢겨 죽었다. 터져 죽었다. 밟혀죽었다. 화살에 맞아 죽었다.
마음이 꺾인 기사를 베었다. 소녀가 죽지 않기를 바란 커다란 잿빛 늑대를 베었다. 하벨의 기사를 베었다. 망자가 된 마술사를 베었다. 짓무른 아이를 베었다. 미쳐버린 스승을 베었다. 주술사를 베었다. 붙잡혀 망자가 된 성녀를 베었다. 아이가 아비를 베는 것을 보았다. 과거의 영웅을 베었다. 흑룡을 베었다.
몸도 마음도 정신도 넝마가 되어버린 끝에, 소녀는 심연의 주인을 베었다. 심연이 몸에 파고들었고, 한 줄기 남았던 이성도 새까맣게 바스러지고 말았다.
태양의 왕녀. 혼돈의 딸. 이자리스의 마지막 불길. 검은 태양. 반룡. 죽일 필요까지 없는 신들과 위대한 스승마저 떨어트리고, 소녀는 망자나 마찬가지인 모습으로 프람트의 앞에 나타났다. 심연의 냄새가 진동했고, 프람트는 소녀를 태초의 불길 앞으로 인도하기를 거절했다. 그녀는 태초의 불씨를 꺼트릴지도 모를 위험분자였다.그렇다면 홀로 도달할 뿐이다. 프람트에게 검을 찔러 넣은 뒤,소녀는 계승의 제단에 떨어졌다. 4개의 왕의 소울은 왕의 그릇 위에서 찬란하게 타올랐고, 최초의 화로로 이어지는 길이 열렸다.
화톳불에 앉아있던 장작의 왕, 그윈은 진동하는 심연의 냄새에 검을 뽑아들었다.
노쇠한 왕은 몰랐기에 스스로의 힘으로 처리할 수 없었던, 아무도 모르는 난쟁이의 후손에게 검을 겨누었다.
후손들에게 모든 것을 남겨주고 온 황금의 왕과,
모든 것을 받은 왕의 자손들을 베어 넘기고 온 난쟁이.
혼과 혼이 타올랐다. 검과 검이 불꽃을 일으켰다.
위대한 장작의 왕이 끝내 잿더미 위에 그 몸을 눕혔을 때, 소녀는 수 백 번을 죽고 다시 죽은 뒤였다.
장작이 사라지고, 세계에 색이 사라져간다. 모든 것이 끝났다.
최초의 기사가 남긴 사명도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저 쓸쓸한 화로에 놓인 나선의 검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한 마디를 기억할 뿐이었다.
"잘 했다. 전진하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최후의 최후에, 한 점 이성도 남지 않은 그 순간에,
그녀는 불이 꺼져가는 세계를 보며 무엇을 생각했는지,
무심코 그 몸을 불살라 태초의 불길을 계승하고 말았다.
----------------
----------------
"헤스티아, 또 뭘 주워온......, 뭐야, 사람?"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주시지......!"
헤파이스토스가 다가가 헤스티아의 등에 업힌 기사의 몸을 받았다. 물에 젖었을 뿐만 아니라, 갑옷의 소재가 된 강철이 꽤나 무거웠기에, 여기까지 이런 애물단지를 끌고온 헤스티아가 용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본 적 없는 양식의 갑옷이네. 적어도 우리 제품은 아니야."
"오라리오 바깥 사람이란 뜻이야?"
"뭐어, 확답은 할 수 없지만, 등짝을 까보면 확실해지겠지."
헤스티아에게 수건을 가져다주고, 헤파이스토스는 땅에 널브러트려둔 기사에게 다가가, 허리에 매어둔 검을 뽑아들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직검에는 누구인지 모를 신이 내린 강력한 가호의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흔적만, 이라는 것은 가호보다도 훨씬 강력한 힘에 억지로 찢어져 있다는 뜻이다.의외로 강한 가호에 놀라고, 이런 가호를 힘으로 찢을 만큼 강한 괴물이 오라리오 바깥에 있었다는 것에 더욱 놀라며 헤파이스토스는 직검을 다시 칼집에 집어넣었다.
"왜 더 안보는 거야?"
"어쩐지 조금 불길해서."
이유 모를 불길함. 헤파이스토스는 그 검 아래에 수 많은신들의 피가 흘렀다는 것을 모르기에 그저 불길하다고 말할 뿐이었다.
애초에 검의 양식도, 철의 구성도, 한 때 새겨져 있었던 가호의 양식마저도 오라리오와는 세세하게 차이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더 볼 필요도 없었다.
"어디서 이런 걸 주워 온 거야?"
"뒷골목에 쓰러져 있던 걸 찾았어."
"잘도 주워올 생각을 했네."
헤스티아의 목에 남은 빨간 손자국을 보며 헤파이스토스가 중얼거렸다.
"그럼 등짝을 까볼까?"
헤스티아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헤파이스토스를 보았다. 헤파이스토스는 뭘 보냐는 표정으로 헤스티아에게 시선을 돌려줄 뿐이었다.
"등짝 까보는거다! 왠지 궁금하잖아?"
"네가 까서 보면 되잖아."
뭘 나를 보는거야. 헤파이스토스가 중얼거렸다.
헤스티아는 입술을 홀쭉 내밀고서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친우에게 외쳤다.
"갑옷 벗겨다오!"
"너 말야......,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나."
헤파이스토스가 능숙한 손길로 많이 닳은 갑옷의 완갑과 어깨갑옷을 벗기고, 두껍지만 튼튼한 상의마저 벗겼다. 피복 속에 가슴갑옷을 또 입은 철두철미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갑옷마저 벗기자, 드디어 소녀의 의외로 작게 느껴지는 등을 볼 수가 있었다.
"음? 이건 무엇이냐, 헤파이스토스?"
신들에게만 보이는 계약의 흔적. 완벽히 파기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능하는 것도 아닌, 갈기갈기 찢어진 계약.
많은 파밀리아를 거느린 헤파이스토스마저 알지 못하는 종류였다. 그저 파밀리아를 단 한 명도 거느리지 못한 헤스티아만이 천진난만하게 찢어진 계약을 해석하려 들 뿐이었다.
"어디 보자..., 아..이, 자, 리..., 쿠..ㄹ..윽, 못 읽겠어. 훼손이 심해."
"헤스티아, 이 아이, 조금 이상......."
"정했다, 헤파이스토스! 내가 이 아이를 거두겠다!"
"하아?!"
검의 불길함에서 위험함을 깨달은 헤파이스토스가 외쳤다.
하지만, 이윽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이 니트를 내쫓는다면 아무래도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