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에필로그: 기억 위에 쌓는 내일 (8)
“라쥐르에…… 가자고?”
“응, 선대 공작 각하도 뵙고. 겸사겸사.”
“우리 할아버지를?”
“젊은이들 좋아하신다며? 나 보면 좋아하실 거라며?”
“그으렇기야 하지만…….”
그러니까, 스무 살로 돌아오고서 그와 처음으로 외출한 날, 마레와 라쥐르에서 라쥐르풍 음식을 먹으며 했던 이야기였다.
‘나도 가 보고 싶네, 라쥐르.’
‘언제 놀러 가 봐. 할아버지가 너 온다면 좋아하실 거야.’
그때만 해도, 그가 아무것도 정리하지 않은 채 저를 심란하게 하는 것이 원망스럽기만 했는데. 그가 어떤 심정으로 시간을 거슬러, 또 어떤 심정으로 그때 저를 대했을지 상상하면…… 속절없이 마음이 저미는 것이었다.
‘그때 에티엔이 약혼자 생기면 라쥐르 가고 싶단 얘기 해서 그 얘기가 나왔던 건데. 에티엔은 노엘 경이랑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자연스럽게 흐르는 생각에 빠진 클로에의 멍한 눈빛을 보고, 데메트리안이 그녀의 귀를 장난스레 깨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오늘 귀택 안 하려고? 나야 좋지만.”
“할 거야. 네가 방해만 안 하면 돼.”
“……기껏 도와줬더니.”
그가 서운하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의 무게를 덜어 썩 편해졌지만…… 토라진 연인의 마음이 더 불편한 법이었다.
클로에는 선심 쓰듯 쪽, 먼저 입맞춤해 주었다.
“그래, 가, 라쥐르.”
네 생일인데 네 맘이지. 괜스레 덧붙인 새침한 말은 그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
제국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을 마치고 날아간 2월의 라쥐르에는 봄 내음이 물씬 풍겼다.
고티유보다 남쪽에 자리한 덕에 온화한 날씨, 바닷가의 눅눅하고 짭조름한 바람, 겨울이 가시지 않은 북쪽보다 진한 파랑의 하늘.
데메트리안은 처음 보는 라쥐르의 풍광을 하나하나 눈에 눌러 담았다. 앞으로도 자주 올, 그녀가 사랑하는 지역이기에.
“네가 빅토르의 첫째라고?”
“처음 뵙겠습니다, 선대 공작 각하. 클로에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로이가 얘기하는 나야, 자네는 평생 볼 수 없는 사람일 테고.”
초로의 라쥐르 선대 공작, 그러니까 클로에의 외할아버지는 데메트리안을 제 손녀딸을 노리는 안목만 있는 괘씸한 놈으로 대했다.
“약혼한 것도 아니니 그냥 친구 아니냐? 미라벨, 너보다 더 먼 사이인 게지?”
“그럼요, 맞아요, 할아버지.”
옆에서 선대 공작의 폭거를 응원하며 미라벨이 까르륵 웃었다. 거기에 쩔쩔매는 모습을 보여 줄 법도 한데, 데메트리안은 그저 예의 바른 낯으로 빙글빙글 웃을 뿐이었다.
“……요즘 애들 같지가 않아서, 원.”
재미가 없구나. 그리 말하며 선대 공작은 혀를 끌끌 차 보였다. 말은 그렇게 해도, 제 손녀딸이 예비 약혼자로 데려온 젊은이를 바라보는 눈빛이 따스했다.
‘로이가 어려서부터 데미, 데미 하던 게 이 녀석인 모양이지.’
선대 공작의 손녀딸 예비 약혼자 품평은 하루 내내 계속되었다. 여름휴가 때 못 왔던 클로에의 방문을 환영하며 열린 정찬회 자리, 데메트리안이 라쥐르 공작과 수도 정치에 대해 대화하는 양을 지켜보던 선대 공작이 불쑥 물었다.
“빅토르는 잘 지내고?”
“네, 각하께 안부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가져온 것 중에 스체르바뇰산 아이스와인이 있는데, 아버지께서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그래. 네 아비도 그렇고, 대대로 크레벨 녀석들이 진중하기는 했지.”
부러 괴팍한 체하는 선대 공작이 곤란했을 텐데도, 데메트리안은 여유로운 낯으로 깍듯이 그를 대했다.
“사냥은, 좀 할 줄 아느냐?”
“같이 다니시기 괴로우시지 않을 정도로는 합니다.”
“내일은 나랑 성 바깥 사냥터에 가는 걸로 하자.”
“네, 각하.”
제 아버지의 손녀 사윗감 품평을 바라보던 라쥐르 공작이 클로에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네 할아버지께서 퍽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구나.”
라쥐르 공작의 눈이 틀리지 않았던지, 그날부터 한동안 데메트리안은 선대 공작의 여흥에 끌려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사냥이면 사냥, 승마면 승마, 체스면 체스, 지역 유지들과의 회합이면 회합.
그것이 예심에 통과했다는 전조로 느껴져, 클로에와 데메트리안은 기꺼이 선대 공작의 변덕에 놀아나 주었다. 허락을 받을 일은 아니었지만, 호감을 사 두어서 나쁠 것 무엇 있으랴.
그러던 어느 날. 데메트리안이 파이겐과 당구 클럽에 끌려가, 클로에가 라쥐르 손님방의 응접실 소파에 누워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반대편 소파에 기대어 앉아 뜨개질하던 미라벨이 넌지시 물었다.
“너 데미 공자님이랑 결혼…… 언제 할 거야?”
“할지 말지도 안 정했다니까.”
제가 일부러 데메트리안에게 답을 주지 않는 걸 빤히 알면서 왜 묻는담, 클로에는 깊이 생각지 않고 대꾸했다. 물론 라쥐르에 데려온 것부터가 언젠가 결혼할 거란 의미긴 했지만…….
“아카데미 졸업하면 할 거야? 편입이니까 3년만 다니면 졸업이지?”
“아니이, 몇 해는 임관하고 좀 바쁘지 않을까……?”
아직 붙은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리 덧붙이며 미라벨의 낯을 살피니, 거기에 미약한 긴장감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왜, 무슨 일인데?”
“그으게, 음, 청혼……을 받아 버려서.”
“뭐라고?”
클로에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청혼이라니? 만나는 사람이 있는 것도 몰랐는데?
“뭐야, 누구야, 어떻게 된 거야?”
“누구냐고? 몰라?”
“내가 알아야 되는 사람이야?”
라구 경? 라이언? 디 경? 앙 경? 썽 경? 깜짝 놀란 클로에가 미라벨 주위의 남성 목록을 마구잡이로 읊었다. 그 이름들이 답에서 점점 멀어지자 미라벨의 긴장했던 표정이 황당함으로 풀어졌다.
“로이, 너 요즘 정말…… 네 일에밖에 관심이 없구나.”
왜 멀리서 찾고 있는 건데, 미라벨이 서운함 반 놀림 반 중얼거렸다.
“멀다고?”
그럼 가까이? 가까이에 누가…… 그리 생각하던 클로에의 뇌리에, 늘 그렇듯 데메트리안과 한 몸처럼 따라온 인물이 떠올랐다.
“설마. 파이겐 경……?”
공식적으로는 남작이 되었지만 여전히 입에 익은 대로 부르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리자, 미라벨의 건강하게 그은 낯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클로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로?”
“으응, 그게 그리됐으니까…… 데미 공자님이랑 계속 사이좋게 지내야 해?”
“사이야, 뭐 당연히.”
얼떨떨한 마음으로 그리 대답하며, 클로에는 두 사람의 사이를 되짚어 보았다.
하긴, 전투할 때도 놀라우리만치 합이 잘 맞았고, 그건 제가 데메트리안과 만날 때마다 두 사람이 붙어 다녀서 그런 거였으며, 요즘에 저들이 데이트할 때면 그들도 만났을 거고…….
혼란에 빠져 지난 1년간을 돌이키는 클로에의 낯을 바라보며, 어쨌든 후련해진 마음으로 미라벨이 덧붙였다.
“데미 공자님이랑 너랑 결혼하면 결혼하자잖아. 그게 언제가 될 줄 알고.”
“뭐어, 그냥 먼저 하면 되는 거 아냐?”
“너랑 데미 공자님이랑 사이 멀어지면 우리 둘 중에 하나는 실직하는 건데?”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정말 만에 하나 말이야. 미라벨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두 사람이 결혼하자면 사는 곳이며 하는 일이며 고민할 게 많겠구나…….’
그리 생각하며 제 젖자매의 어른스러운 고민을 곱씹을 때였다.
문득,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요 얼마간 미라벨과 데메트리안의 이야기를 할 일이 없어서 몰랐던 거였지만, 한번 신경 쓰이니 계속 마음에 걸렸다.
클로에는 창피함을 무릅쓰고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라비, 있잖아.”
“응?”
“그, 데미 공자란 말…… 안 쓰면 안 돼?”
그거 나름 애칭인데. 클로에가 미라벨을 통해 아저씨들의 비속어를 배웠듯 서로가 서로의 언어를 따라 해 왔던 거였지만…….
클로에의 얼굴이 새빨개지자 풉, 미라벨의 입안에서 웃음이 터졌다. 한번 터진 웃음은 폭소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 으하하, 그래, 알았어. 아하하학.”
미라벨이 숨이 넘어갈 무렵. 마침 선대 공작에게서 풀려난 데메트리안이 파이겐과 함께 응접실로 들어섰다. 방금 애칭 부르기를 금지당한 대상의 등장에 미라벨의 웃음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뭐가 그리 재밌어요?”
“데미 공, 아, 아니지. 소공작님, 얘가 방금 뭐랬는지 알아요?”
“라비!”
그날 저녁, 각자의 호위 기사들이 연인 관계란 것을 알아 버린 클로에와 데메트리안은 그들에게 자유시간을 주고서 단둘이 산책을 나왔다. 행선지는 라쥐르 공작성 내부에서 이어지는 공작가 소유의 해변.
촤아, 촤- 잔잔한 파도 소리가 고즈넉한 해변에 울렸다.
“너도 알았어? 두 사람, 언제부터…… 와, 정말.”
“뭐, 눈치는 채고 있었는데.”
“어떻게?”
“우리 만날 때마다 둘이 꼭 같이 사라져 주잖아.”
“그냥 우리 편하라고 피해 준 줄 알았지.”
“겸사겸사였겠지.”
“……우와.”
저는 데메트리안에 대한 고민을 다 털어놨었는데, 미라벨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게 그녀의 배려심인 걸 알면서도 배신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러다가 에티엔도 집에 가 보면 노엘 경이랑 결혼한다고 선언해 놓은 거 아냐? 미아도, 말레카 왕세자랑 펜팔 친구 됐다더니 알고 보면 혼담 진행 중인 거고?”
“……에티엔 쪽은 여전히 답이 없어 보이던데.”
이따금 경시청에 갈 때면 늘 비슷비슷한 상태인 두 사람을 떠올리며 데메트리안이 말했다. 클로에와 데메트리안이 교제하기 시작한 걸 보고서 어딘가 자극받은 것 같았지만…….
‘에티엔은 용기가 없어서 문제고, 노엘 경은 욕심이 없어서 문제고.’
후계자들의 연애에는 역시 장애물이 많다. 그리 생각하며 그는 마음속으로 두 남녀를 동정하였다.
예전 같았으면 누가 누구에게 무슨 마음을 품는지도 몰랐을 것인데, 제가 행복한 연애를 시작하고 나니 자꾸만 남들의 연애사에 관심이 가는 것이었다.
“좋게 생각해. 누아제트 영애도 어차피 너랑 같이 들어올 건데.”
“들어와? 어디?”
클로에가 우뚝 멈춰 서고는 따져 물었다.
“그으……”
그런 의미가 아니라…… 말을 돌려 보려던 데메트리안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내뱉었다.
“어디겠어. 네가 오기를 내가 바라는 곳이.”
“…….”
“당장에 결혼하자는 건 아니고, 응?”
그가 변명하듯 재빨리 덧붙인 말에, 클로에는 얼마간 데메트리안을 노려보았다. 밤의 해변은 어둑했지만 공작성에서 어스름히 조명이 비쳐, 그의 각진 눈썹뼈며 우뚝한 콧날이 더욱 두드러졌다.
“어떤 형식에 우리의 사이가 얽매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약혼이라도 해 두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그의 진지한 낯에 속절없이 가슴이 설렜을까. 클로에는 빙글 돌아 다시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나 아카데미 붙을 때까지 다시 지원할 거야.”
“알아.”
데메트리안은 재빨리 따라붙으며 말했다. 절대로 떨어질 일은 없겠지만.
“졸업하고 관료 돼서 적응할 때까지 다른 일에 신경 쓸 여력도 없어. 아카데미 다니면서도 앰버 상점 일도 계속 신경 써야 하고……. 라구 경이 도와주겠지만, 스칸다르 공방들하고 거래는 내가 직접 해야 하고 말이야.”
나 하고 싶은 거 많은 거, 모르는 거 아니잖아. 그리 말하는 클로에의 시선은 백사장 어딘가를 방황하고 있었다. 말소리는 단호했지만, 한편으로 그의 마음에 기꺼이 화답해 주지 못하는 데 대한 미안함도 지울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마음을 알아, 데메트리안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제가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 괜찮아. 그냥…… 너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상태가 되고 싶은 욕심을 어쩔 수 없어서.”
“얼마나 더 가까우려고?”
“불문법으로 독점할 수 있는 사이……? 성문법으로까진 안 바랄게.”
그 말에 클로에가 작게 웃었다. 결혼은 미루더라도, 아르투젠 사교계 공인 예비부부가 되고 싶다는 말씀이셨다.
‘라비가 청혼받았단 이야기를 들으니, 데미가 조급해하는 것도 이해가 가고…….’
그동안 약혼의 ‘약’도 모르는 사람처럼 굴던 클로에가 귀 기울이는 듯하자, 데메트리안은 내처 말을 이었다. 그건 기실 그가 오래간 생각해 두고 있던 말이었다.
“생각해 봐. 네가 아카데미 다니면서 앰버 상점 일까지 하려면 정말 힘들 텐데, 약혼자로서 돕는 게 더 유리할 때도 있을 거야.”
“약혼이 법적 효력이 있는 건 아니잖아.”
“거래처들 보기엔 느낌이 다르잖아. 그리고 상법에서 대리인의 범위를 살피면……”
그때였다.
우웅- 클로에의 손가방에서 익숙한 진동 소리가 울렸다. 이번 주에 제국 아카데미의 발표가 난다기에, 혹시 제도에서 연락이 올까 싶어 들고 나온 통신구였다.
재빨리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통신구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이렇게 하는 거 맞나? 누나, 들려?]
아쉴의 목소리였다. 다만 무언가 조작을 잘못했는지, 그의 말소리는 거기서 끊기고 말았다.
“시험 결과 얘기겠지……?”
“기다려 보자.”
내년 제국 아카데미 입학을 목표로 소년 병사단 활동도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한 아쉴은 제 누이의 아카데미 입학시험 결과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우웅- 다시금 진동이 울려, 통신구를 들고 있던 데메트리안이 재빨리 단추를 눌렀다.
[아, 제대로 가는 건가? 모르겠다. 누나, 낮에 아카데미에서 전령이 다녀갔는데, 누나 붙었대! 차석으로! 들려? 들었으면 답해 줘.]
클로에는 소리도 못 내고 숨을 들이켰다. 휘둥그레진 눈 아래로 입을 틀어막고서.
“그럴 줄 알았어!”
데메트리안은 그대로 클로에를 끌어안았다. 그때까지도 클로에는 바싹 얼어서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차석이라니, 리도테 졸업 시험도 차석이었으니 또 차석인 건 뭔가 운명의 장난 같지만, 어쨌든 붙고 말았다니…….
“역시 붙을 줄 알았어! 축하해, 수고했어, 로이.”
그리 말하며 데메트리안이 뺨이며 이마며 눈가며 그녀의 얼굴 이곳저곳에 키스를 퍼붓는 내내, 클로에는 눈동자만 굴리며 얼떨떨해하였다.
“……나, 붙었어.”
“그래! 당연하지, 네가 누군데.”
“그것도 차석이래.”
“논술 심사에서 심사위원의 취향이 반영돼서 그래. 다른 사람이 매겼으면 네가 수석이야.”
그리 말하며 데메트리안은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손을 붙잡아 내렸다. 여전히 제게 일어난 일을 실감하지 못하는 듯, 클로에의 입술이 무어라 달싹거릴 듯 말 듯했다.
데메트리안은 더없이 신난 얼굴로 클로에의 낯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그동안 노력한 건 잊고, 당당히 이룩한 성취를 얼떨떨해하는 이 겸손함조차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번쩍 안아 들고 키스를 퍼부어 제 벅차오르는 마음을 한껏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머리와 마음이 정리되기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릴 무렵이었다.
“그래, 데미. 알겠어.”
“뭘?”
“받아줄게.”
“……뭐를?”
허공에 붙박여 있던 클로에의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 데메트리안의 낯을 향했다. 그녀의 입꼬리에 맵시 있는 호선이 깃들었다.
그러니까, 이런 즐거운 마음이라면 뭐든 다 괜찮을 것 같았다.
“약혼 말이야. 약혼까진 허락해 줄게.”
“……정말?”
“응, 정말.”
안 그래도 기쁨을 띠고 있던 데메트리안의 낯에, 더욱 깊은 행복이 번졌다. 그는 그대로 허리를 숙여 클로에를 다리부터 번쩍 안아 들었다.
꺅, 갑작스레 높이가 바뀌어 아찔한 것도 잠시.
밤의 백사장을 배경으로 한없는 애정을 담은 그의 낯이 저를 올려다보는 풍경에 클로에의 가슴이 빠듯해졌다.
“정말, 정말이지?”
“……그렇다니까.”
파도 소리만 고요히 울려 퍼지는 밤의 바닷가.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온 얼굴로 미소 지음으로써 제 환희를 숨죽여 표현하였다.
제 작은 양보에 세상 다 가진 듯 행복해하는 그의 낯을, 클로에는 새삼스레 손가락으로 덧그려 보았다. 반질한 이마, 남성적인 굴곡이 어우러진 미간과 콧대, 그의 인상을 고아하게 만드는 각진 턱선.
아마, 이 풍경을 평생 잊지 못하겠지. 이 기쁨이 빛바래는 일도 아마, 없지 않을까.
저만을 위해 빛나는 그의 짙푸른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클로에는 제가 평생을 좋아해 온 이에게 조심스레 속삭였다.
“나도.”
“응?”
“나도 사랑해, 데메트리안 크레벨.”
- <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