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에필로그: 기억 위에 쌓는 내일 (7)
“연애야 연애고, 결혼은 결혼이죠. 일단은 아버지 은퇴하실 때까지 상단 키우는 데 집중하려고요.”
루시엔은 작정했다는 듯, 제가 앞으로 오리포네에서 어떻게 상단을 키우고 싶은지, 남대륙에는 어떻게 진출하려는지, 열대륙에 운하가 왜 필요한지 등등…… 제 야망을 아낌없이 풀어 놓았다.
클로에는 일 중독자 같은 어린 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 남동생 첫사랑의 암울한 전망을 다시금 애도했다.
한번 입이 트이고 나니, 서로가 벌이는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기탄없이 이어졌다.
“원래 하시던 일은 어떻게 하실 예정이세요?”
“제 일을 돕는 친구가 도맡고 있는데, 그도 곧 자기 길을 찾아야 해서요. 상점 정리되는 대로 가져와야지요.”
“자기 길요?”
“아티장 지구 양복점 아들이에요. 여성복을 배우고 싶어서 돈을 모으느라 제 일을 돕게 되었어요.”
“아하……. 저번 포상연 때도 꽤 인상적인 옷을 선보이셨다고 들었어요. 덕분에 레이스 망토가 유행 중이라고요.”
“다 대공녀 덕분인걸요.”
클로에가 수줍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정말로 대공녀 덕분이라는 특수를 누리고 있는 것은, 사실 라이언의 부모님이었다. 성배를 되찾는 과정에서 클로에가 활약한 내용이 사교계에 퍼지자, 아녀자들도 승마나 테니스를 즐길 때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여성용 바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었다.
클로에 경이 반역자들을 무찌른 바로 그 옷, 그런 문구로 라이언네 양복점에서 여성 활동복 라인이 성황리에 팔리고 있는 것을…… 루시엔이 모를 리가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티장 지구의 양복점이라면.”
“……네, 그곳 맞아요.”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
“미술상은 계속 오나요?”
“네에, 정말 우연이어서 아는 바가 없다고 고사하는데도 이따금 찾아오네요.”
“그게 다 영애, 아니 경의 이름값을 노리고 접근하는 거예요. 키우고 싶은 예술가가 있으시다면 후원해 주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거고요.”
“제가 무슨 보는 눈이 있다고요.”
“보는 눈은 무엇이 권력을 가진 분의 눈에 드는지를 보는 눈이죠. 권력 있으신 경께 보는 눈은 필요하지 않답니다.”
루시엔이 생긋 웃었다. 그러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덧붙이는 것이, 이제부터가 본론인 모양이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상점 하나는 경께 너무 약소한 것 같은데.”
“이것도 아직 벅찬걸요.”
“이번에 연인분의 일도 함께하시고, 스칸다르 무역도 맡으셨으니…… 외무부나 원로원 상공회의소, 재무부. 이런 곳에서도 하실 일이 많으실 텐데요.”
클로에가 손사랫짓하는 것도 무시하고서, 루시엔은 내처 말을 잇는 것이었다.
“제가 관료도 아니고 어떻게요.”
“관료가 되시면 되지요?”
“제가요?”
“못 되실 건 또 뭐가 있나요.”
거기까지 말한 루시엔은 클로에의 낯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마치 수면에 던진 돌이 어떤 파문을 일으키는지 지켜보는 것처럼…….
클로에는 차마 대꾸하지 못한 채, 입술만 깨물었다.
제 어린 지인에게는 참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그녀가 가능하다고 말해 주면, 정말 그런 것 같았으니까.
‘관료, 관료라…….’
그 설렘은 실제로 오래간 클로에의 마음 한구석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제국 아카데미서 수학하신 적도 없으신데, 대단하셔요. 경처럼 다재다능하신 분이 가문에만 남으시는 건 아르투젠의 손해일 거예요.’
어쩌면 그 설렘은, 셀레나 모햄의 덕담을 들었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 어쩌면 탄신연에서 포상을 받았을 때부터, 또 어쩌면 ‘제복남’과 ‘광대탈’을 잡았던 대축일 주간 때부터…….
그래서 얼마 뒤, 데메트리안이 졸업생 대표로 축사를 낭독한 제국 아카데미의 졸업식 날.
졸업식에 참석한 내내 어딘가 꿈꾸는 듯한 표정이던 클로에는, 그날 저녁 크레벨 공작저에서 열린 졸업 축하 정찬회에서 충동적인 선언을 내뱉고 말았다.
“저…… 제국 아카데미에 편입 시험을 쳐 보려고요.”
그 자리에 미래의 사돈 격으로 참석한 라크루아 궁정백 부부는 하마터면 식기를 놓칠 뻔했다. 한번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 딸아이가 거침없이 구는 게 기꺼운 것과 별개로, 놀란 건 놀란 거였다.
클로에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기사 작위를 받았을 때부터, 클로에 주변의 어른들은 내심 그런 때가 오리라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하하, 그래. 데미가 조만간 행정부로 이직해 가면 클로에 네가 내 보좌관을 해 주어도 좋겠구나.”
정혼 문제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던 것뿐, 제 아내가 예뻐하는 클로에를 덩달아 좋아하는 크레벨 공작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이 폭탄선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던지 얼빠진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큰아들에 대한 고소함에서 비롯한 거였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 귀띔해 주지 그랬어.”
만찬을 마치고 단둘이 데메트리안의 서재로 올라왔을 때. 데메트리안은 서운한 마음을 반의반이나마 표현해 보았다. 타는 속을 감출 수 없다는 듯, 창가에 서서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클로에는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하였다.
그의 노력 여하에 달린 것처럼 말했지만, 두 사람이 미래를 함께하기로 한 것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리고 근 몇 년 안에, 실은 당장이라도 그가 혼인하고 싶어 함 또한 알고 있었으니까.
‘리도테 졸업장이 있으니 편입해서 들어가도 3년. 그러고 임관해서 자리 잡으려면 또 한두 해는 꼼짝없으니까.’
에티엔이 경시청에 들어가고 2년 차가 되도록 늘 곤죽이 되어 퇴근하지 않던가.
클로에는 옛다 하는 심정으로 그의 뒤로 다가가, 슬며시 허리를 껴안았다.
“……미안. 아까 네가 졸업생 대표로 연설하는 모습이 너무 멋져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리 중얼거리며 그의 등에 뺨을 파묻었다.
기실 그것이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미사여구가 풍부하거나 목소리를 멋 부린 게 아닌데도 그의 연설에 빠져들지 않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었다.
“정 괘씸하면, 내 생일선물로 용서해 줘.”
그녀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는 그가 그럴 리 없는 걸 빤히 알면서 하는 소리였다, 요 깜찍한 아가씨께서는.
데메트리안은 흐물거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눌러 내리며,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 안았다.
“생일선물은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진즉에 준비해 놓은 것이 저 책상 서랍에 고이 잠들어 있으니까. 그녀가 좋아하는 크레벨의 온실에서 생일 파티를 열 준비도 다 돼 있었고. 클로에는 지인들을 제집으로 초대한 줄 알지만, 그간 안면을 익혀 놓은 라크루아의 전령이 초대장을 바꿔치기하는 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
데메트리안은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편입해서 들어가면 3학년으로 들어가는 거니까…… 앞으로 3년은 꼼짝없겠네.”
“으응, 바로 붙는다면 그렇겠지.”
“바로 붙을 거야.”
“응?”
“이번 겨울에 같이 라렌티니에 내려가 볼까 했는데…… 아쉬운 만큼 더 빨리 합격해 줘야겠어.”
“더 빨리?”
“이번 시험 보자. 2월에 합격하면 3월 봄학기부터 다닐 수 있으니까.”
“이번 시험? 세 달밖에 안 남았는데?”
“내가 도와줄게. 당분간 주말엔 무조건 시험 준비야.”
하사받은 라렌티니의 영지 시찰을 핑계로 한 달간의 포상 휴가를 클로에와의 겨울 여행에 쓰려던 데메트리안은 그 길로 휴가를 취소하였다.
겨우내 클로에는 주말마다 데메트리안과 입학시험을 준비했다. 3학년으로 편입하는 것뿐 그 어렵다는 입학시험을 쳐야 하는 건 매한가지여서, 2년 전 리도테를 졸업한 이후로 시험과 담을 쌓았던 클로에에게는 따라잡아야 할 것들이 많았다.
다행히도 그녀에게는 리도테의 졸업 시험을 차석으로 졸업한 명석한 두뇌가 있었고, 또 제국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한 연인도 있었다.
그런 연유로 매주 클로에가 공작저에 드나들게 되자 가장 기뻐한 사람은 크레벨 공작부인이었다.
그녀는 오래간 제 아들의 연정을 응원했으며, 한편으로 어려서부터 클로에를 썩 귀여워해 왔으니까.
“클로에. 이따 공부 마치고 나 좀 다시 보러 오련? 크레벨에 대대로 내려오는 사파이어가 있는데……”
“어머니, 로이 부담스럽게 왜 그러세요.”
인사할 겸 티타임을 가질 때마다, 공작부인은 이렇게 꼭 클로에가 크레벨에 들어올 날을 학수고대하는 티를 내는 것이었다. 그게 저도 바라마지 않는 거지만, 감히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로 한 데메트리안만 곤란하였다.
“알았다, 알았어. 그래도 내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그때 클로에의 초상을 산 거 아니겠어?”
“어머니.”
“아휴, 무슨 말을 못 하겠네. 데미, 방해하지 말고 좀 먼저 올라가 있으렴.”
여자들끼리 얘기 좀 하게. 공작부인이 자꾸만 초를 치는 아들을 떠밀며 손사랫짓했다.
데메트리안은 불만스럽다는 듯 두 여인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클로에의 책들을 집어 들고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오래 붙잡아 두지 마세요. 오늘 할 게 많아서요.”
“할 게 많기는.”
조금이라도 못 붙어 있어서 안달인 걸 모르는 줄 아나. 공작부인 하늘색 눈동자가 제 아들의 뒷모습에 대고 의뭉스레 빛났다.
“클로에, 정말 아직 마음을 못 정한 거니? 우리 데미가 미욱한 건 나도 알지만……”
“부인, 아니에요. 제가 아직 해 보고 싶은 일이 너무 많고, 그리고…….”
클로에가 멋쩍은 듯 콧등을 긁적였다.
“데미는 좀…… 모든 게 쉬운 사람이잖아요. 홀랑 넘어가 주기엔 조금 억울하기도 하고…….”
무슨 의미인지 아시죠? 클로에가 얼굴 새빨개져서 하는 말소리에, 공작부인은 청아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 이런 게 그리도 기다린 아들 키우는 맛일 거였다.
“어머니랑 무슨 이야기 했어?”
“으응, 별 얘기 안 했어.”
데메트리안의 서재에 들어선 클로에가 소파에 몸을 묻었다. 탁자에는 데메트리안이 미리 올려다 둔 책들이 쌓여 있었다.
오늘도 물어볼 내용이 많았다.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고 있자니, 제 책상에서 보던 서류를 정리한 데메트리안이 그녀의 옆에 붙어 앉았다.
“여기, 이 부분 잘 모르겠어.”
“아, 여기서 이 단어는 전치사가 아니라 부사로 쓰인 거야.”
어렵다고 악명 높은 제국 아카데미의 입학시험 문제는 역사나 수학, 철학처럼 리도테에서도 배우는 교양 과목뿐 아니라 정치나 경제학, 서대륙 공용어에서도 두루 출제되었다. 그래서 초급 수준만 익히고 말았던 서대륙의 공용어 실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의 도움 덕에 막혔던 지문을 해석하며 클로에가 문제를 풀어 나갈 때. 데메트리안이 넌지시 말했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부담스럽지? 미안.”
“아냐, 충분히 궁금해하실 수 있는 일인걸.”
클로에가 교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그럼 오르파의 눈물, 봤어?”
“응, 햇빛에 비추면 초록빛으로도 보이는 게, 정말 신비하더라.”
“봤구나.”
대대로 크레벨 공작부인에게 내려오는 가보를 제 연인이 보았다니 마음이 벅차, 데메트리안은 그녀의 허리를 안으며 그 어깨에 턱을 괴었다.
“언제 그 주인이 되어 줄 건데?”
그 목소리가 자못 투정에 가까웠다.
‘얘가 투정도 다 부리고.’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연인이 되고 보니 새로이 보이는 면이 또 많았다.
“그렇게 보채면 하나도 안 멋있는 거, 알지?”
“……예전엔 그냥도 멋있게 봐줬던 것 같은데.”
“다섯 살 눈에 여덟 살이 멋있지 않기란 어렵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말이야.”
그때 제대로 받아준 것 하나 없으면서 왜 자꾸 그 시절을 그리워하나. 클로에는 뾰로통한 마음이 되어 입술을 빼죽 내밀었다.
그걸 지켜보던 데메트리안이 쪽, 재빨리 그 입술을 훔쳤다.
“농담이야. 너 내년에 아카데미 들어가고, 졸업하면 3년 뒤니까…… 그때 나 스물여섯밖에 안 됐을 테니 괜찮아.”
스물일곱이 된 프레더릭이 내년에 스물여덟 살 카타리나와 혼인할 예정이기에 아르투젠의 혼인 적령기가 꽤 늦춰지긴 했지만, 스물여섯에 결혼하는 것은 여전히 남자치고도 늦은 편이었다. 괜찮다고 말하면서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음이었다. 클로에는 그것이 조금 귀엽게 느껴져, 짐짓 새초롬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혼인이 늦어지는 건 뭐, 네 노력이 아직 부족한 탓이니까.”
빨리 이거 해석이나 해 봐. 그리 말하며 클로에는 눈앞의 지문을 톡톡 두드렸다.
“그래. 아직 사랑 못 받는 내가 죄인이지. 내 연인께서는 입맞춤은 해 주시면서 그 말 한마디 못해 주시는 박정한 분이셔서.”
“노력한다며.”
“예이.”
그래서 이건 말이야, 그는 껴안은 팔을 풀지 않은 채 그녀의 어깨 너머로 설명해 주었다. 귓가에서 나직하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 클로에는 집중하는 척하면서도 그가 저만을 위해 이 장난 같은 교습에 심취한단 사실에 새삼 가슴이 설렜다.
그것도 그녀가 서대륙 공용어와 씨름하는 내내 자꾸만 목덜미나 귓가, 볼 같은 데 입을 맞춰 대니 희미해지고 말았지만.
“아, 좀 있어 봐. 오늘 이 챕터 다 끝내고 갈 거란 말이야.”
“다 안 끝내면 안 가?”
“……데메트리안 크레벨.”
그녀의 눈초리가 매섭게 저를 향하자, 데메트리안은 그녀의 정수리 위에서 쿡쿡 웃었다.
“나, 생일선물 받고 싶은 거 생각났어.”
입학시험이 있는 2월에 그의 스물네 번째 생일이 돌아오기에, 공부를 도와주는 대신 그가 원하는 걸 선물해 주기로 한 참이었다.
“뭔데?”
“라쥐르에 가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