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에필로그: 기억 위에 쌓는 내일 (6)
“네가 떠올리는 것이면 뭐든 근사하지.”
“괜찮을까?”
“그럼.”
하지만 그런 걸 알 리 없는 데메트리안은 그저 빙긋이 웃어 보일 뿐이었다.
“라구 경하고 이야기는 잘 됐어?”
“일단, 돈으로 꼬시는 건 힘들 것 같아.”
“500골드면 뭐, 적은 돈은 아니지만 평생 호강할 정도는 안 될 텐데.”
이번에 하사받은 300골드에 일전에 클로에가 떼어 주기로 한 200골드까지, 라구가 최근에 얻은 거액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클로에가 상점을 하사받기야 했지만 거기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마도구에 대한 지식도 얕은 만큼 믿을 수 있는 이가 필요했다.
‘나는 무엇보다 스칸다르와의 무역에 집중해 보고 싶으니까.’
때문에 알레지오의 상점을 넘겨받게 되고서 클로에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라구가 의무 복무 기간이 지나도 고티유에 남도록 회유하는 일이었다. 황실에서 하사한 상점인 만큼, 마탑과 기술을 제휴하는 형식을 취한다면 예외적으로 마법사를 고용할 수 있다는 원로원의 확인도 받은 차였다.
훗날 라구가 고티유를 떠날 거라면 차라리 지금부터 다른 믿을 만한 사람을 구하는 게 나으니, 그를 채근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황실 마법사단 욕할 땐 언제고 말이야. 무시험 합격에 흔들려서는.”
“라구 경처럼 전투형이 아닌 마법사들한테는 닫혀 있는 집단이었으니까 지레 싫어한 거겠지. 어쨌든 최고의 영예인 거잖아?”
“그래도. 함께한 의리가 있는데.”
“네가 계약 조건을 올려 줄 때가 왔나 봐.”
“지금도 조건 자체는 후한데. 돈 말고 다른 성의를 보여야 하나.”
“일전에 라구 경이 너무 고생하긴 했어.”
“그런가…….”
입술이 쫑긋 튀어나오고 슬며시 미간이 좁아지는 게, 골똘히 생각에 빠지신 모양이었다. 저와 손잡고 있던 것도 잊은 양, 쥐인 손에 힘까지 풀렸다.
그녀의 고민에 한껏 동조해 줄 땐 언제고, 어딘가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데메트리안은 반대편 손을 뻗어 실금이 간 클로에의 미간을 엄지로 꾸욱, 문질렀다.
“그런데 내 앞에서 너무, 다른 사람 아쉬워하는 거 아냐?”
“뭐?”
저도 모르게 말해 놓고서, 클로에의 황당하다는 표정에 데메트리안은 옅은 자괴감을 느끼고 말았다. 불편한 마음이 드는 스스로에 대한 어색함까지…….
‘예전에 예가체프 앞에서 라이언 군을 봤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는데.’
또, 예가체프 앞에서 왕자를 보고서 클로에의 발코니로 날아든 날도…….
예가체프가 문제였다.
‘로이가 커피하우스에 같이 가자고 해도, 거기만은 절대로 안 가야지.’
의아한 낯을 한 클로에의 미간을 계속 매만지며, 예가체프에 버금가는 커피하우스를 프란츠 광장 맞은편에 열어 새로운 명소로 만드는 상상을 한창 하던 데메트리안은, 순간, 아차 싶었다.
“데미, 너…….”
클로에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것이, 요 실없는 마음을 간파당한 것만 같아서.
“루카가.”
데메트리안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얼마 전에 성국에서 돌아왔대. 한번 오라는데. 대신관께서도 우리와 만나고 싶다고 하시고.”
“으응, 그래야지.”
그리 답하는 내내, 클로에의 가늘어진 눈매는 풀릴 줄을 몰랐다.
두 사람이 루카를 찾은 것은 돌아오는 물의 날의 일이었다. 저녁에 카바레 쇼를 보러 가기로 했으니, 그전에 루카와 시간을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발 닿은 대지의 은총을. 다들 얼굴이 폈다?”
“지평선의 평균율을. 잘 다녀왔지?”
“뭐, 보시다시피. 들어가자.”
루카와 만나는 것도 두 달 만이었다. 알레지오 후작저에서의 일 직후, 그가 안톤미오노의 처분을 위해 그를 데리고 성국에 다녀온 것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루카에게서는 조금 더 사제다운 느낌이 풍겼다.
‘주신께서 강림하셨을 땐 정말 우아한 사제 같았는데, 지금은 그냥 점잖아진 루카네…….’
그렇게 제 오랜 친구를 뜯어보며, 클로에는 데메트리안의 팔을 잡고서 루카를 따라 성소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그들의 목적지는 대신관의 집무실이었다. 성소 가장 안쪽까지 들어가야 하는지라 평소 다닐 일 없던 구불구불한 복도를 한참 걸었다.
“이번 일로 신관으로 승급했다며?”
“뭐, 그렇게 됐다.”
평소 같으면 쓸데없는 직급이나 생겼다며 구시렁댔을 것을, 오가는 다른 사제들 들을세라 그답잖게도 점잖게 대꾸했다.
그것이 조금 우스워 클로에는 데메트리안에게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는 양을 흘끗 본 루카가 지나가듯이 말했다.
“너네 결국, 뭐, 그렇게 됐다며?”
“……무, 무슨 소리야.”
데메트리안으로부터 편지로 전해 들은 내용이었다. 클로에의 얼굴이 빨개지니 또 재밌어서 루카는 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데미랑 결혼할래, 그렇게 징징대시더니. 그 꿈 드디어 이루시나 봐요, 클로에 경?”
“……또 고꾸라지기 싫으면 작작 해, 응?”
“야, 네 애인 무섭다, 사제 때리겠어.”
“작작 하라잖아.”
“……똑같은 것들끼리 잘 만났네, 아주.”
그리 말하며 루카는 속으로 비속어를 웅얼거리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제 친구들이 드디어 그 답답한 관계를 탈출했음에 속으로 축복하면서.
이게 다, 어머니의 안배일 것이라.
대신관의 집무실에 들어서니, 그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대신관이 응접탁자의 상석에 미리 앉아 있었다. 마치고 제 응접실에 들르라 말한 루카는 대신관에게 묵례해 보이고는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발 닿은 대지의 은총을. 어서 오십시오, 자매님, 형제님.”
“지평선의 평균율을. 초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저들에게 합장하는 대신관에게 마주 합장하고서, 두 사람은 그녀의 왼쪽 소파에 앉았다.
“제가 갑작스레 뵙자고 청해 놀라셨지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날 대신관께 따로 알리지 못하고 신전을 소란스럽게 하여 죄송하였습니다.”
“사안이 사안이었는걸요.”
그리 말하며 대신관은 고요한 몸짓으로 손님들에게 차를 내려 주었다. 친구들이 찾아올 때면 루카가 대접하는 것과 같은 곡차였는데, 그 향취가 확연히 달랐다.
오후의 햇살과 함께 따스한 침묵이 얼마간 내려앉았을 무렵.
“두 분께서 겪으신 신비에 대해 듣고 싶어서 뵙기를 청하였답니다. 어머니의 응답을 받는 것이 저희 신관들에게도 어려운 일인데.”
“황송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 분께서 어려운 일을 기꺼이 이뤄 주시니 어머니께서도 흡족하셨던 게지요.”
대신관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빙긋이 웃었다.
“사도의 기적도 목격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심판…… 말씀이시죠.”
그날의 광경을 떠올리는 클로에의 눈빛이 잠겨 들었다.
“놀라지 않으셨나요? 저조차 아직 한 번도 목격한 적 없는 일인데.”
대신관의 어조는 여전히 잔물결 같았으나, 그녀가 친근한 어조로 농담을 의도했음을 알 수 있었다.
“외람되지만, 사도들의 힘으로 무언가를 되돌리거나 없던 일로 만드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시간을 거스른 걸 알고서, 무슨 연유인지 알기 위해 이런저런 책을 뒤지다가요.”
그랬어? 라는 듯한 데메트리안의 시선이 클로에에게로 가닿았다. 그 연유를 혼자만 알고 있는 바람에 그녀를 방황케 한 것이 미안하여, 데메트리안은 클로에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어머니의 잊힌 이야기에 대해 읽으셨군요.”
잊힌 이야기……. 경전에 기록되지 않은 에르드의 비사를 지칭하는 그 단어를 클로에는 조심스레 입안에서 굴려 보았다. 그녀의 신중한 낯을 바라보던 대신관이 넌지시 덧붙였다.
“그리하여 그의 기억을 없던 것으로 되돌리신 거고요.”
아. 대신관이 그들을 부른 이유가 뷔욘의 처분에 대해 듣고 싶어서임을 깨닫고는, 클로에가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대신관님 앞이니 진실로 고하자면……. 어머니께서 제가 감히 처벌을 선택하게끔 허락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요.”
대신관의 창백한 벽안이 안경 너머로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저와 데미…… 데메트리안 경은 5년 뒤인 918년까지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거기까지 말했을 때, 데메트리안이 클로에의 손을 꾹 쥐었다. 처음부터 이야기해야 한다면, 응당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대신관의 낯에 어딘가 잔꾀를 부릴 수 없는 엄정함이 있어, 데메트리안은 꾸밈없이 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클로에로서도 그의 입장에서의 구체적인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 시절에 그가 오랜 후회를 했다는 것, 에르드가 루카의 몸에 강림하여 시간을 돌릴 기회를 줬다는 것, 그때 감히 거래를 청하여 크레벨과 캄포 간의 맹세가 깨졌다는 것…….
그 시절의 일들이 서로에게 상처였기에, 낱낱이 캐어묻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클로에에게 왕자의 처분을 어찌할 것인지 정하기를 요구하셨습니다. 시작은 저를 쓰셨지만, 클로에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순간이 많았으니까요.”
그리 말하며 저를 내려다보는 데메트리안의 시선에 야트막한 걱정이 걸려 있었다. 그가 그랬듯 클로에도 미래를 바꾸길 원했으니, 그가 그랬듯 그녀 또한 힘들었던 기억을 돌이켜야 하는 걸로 생각하는 것이리라.
그의 다정함이 과하다는 생각에 난처하게 웃으며, 클로에는 부러 발랄한 목소리를 냈다.
“어머니께서 그의 죄를 알게 하시겠다고 저희의 기억을 공유하게 하셨어요. 제가 슬픈 줄도 모르고 슬퍼했던 그 세월을 그자는 멋진 미래라 하였고, 그 미래를 누구의 기억에도 존재하지 않도록 하고 싶었기에 그의 기억을 지워 달라 청하였답니다. 그에게 제 이름자도 남기고 싶지 않기도 했고요.”
그리 말하며 클로에는 제 손을 쥔 데메트리안의 손등을 덮었다. 겹쳐 쥔 두 사람의 손이 한가지로 단단히 얽혔다.
이야기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대신관은 말이 없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곱씹는 듯, 탁자 구석진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따금 차를 홀짝일 따름이었다.
오후의 나긋나긋한 햇살이 조금 더 기울었을 무렵. 문득, 대신관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안톤미오노는…… 가장 어두운 곳에서 봉사함으로써 속죄하기를 택하였습니다. 성국의 구빈원에 수도사로 들어갔지요.”
그러셨군요, 웅얼거리듯 답하며, 클로에는 셰비크의 궁정에서 성마르게 굴던 그가 품고 있었을 자책과 후회와 슬픔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클로에의 낯이 가라앉는 걸 본 대신관이 개운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두 분의 앞날에 축복을 기원합니다. 이미 어머니께서 두 분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시고 계실 테고요.”
***
루시엔이 찾아온 것은 고티유 사교계 시즌의 마지막 행사인 풍요제를 며칠 앞둔 날의 일이었다.
그간 캄포에서 상단의 일로 바쁘다더니, 대니얼의 황태자 책봉식에는 빠질 수 없었는지 간만에 고티유에 온 것이었다.
크레벨과 캄포의 정혼이 깨진 데다 오늘도 루시엔이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선물이 하고많아, 그녀의 진심을 의심하는 사용인은 더 이상 없었다. 개중에 오리포네에서 유행하는 최고급 찻잎이 있어, 그 차에 라크루아 주방의 티푸드를 곁들여 다과상이 차려졌다.
“축하드릴 일이 많아서 진즉에 오고 싶었는데, 밀린 일이 많아 늦었네요. 그간 잘 지내셨죠?”
“보시다시피, 덕분에요. 이리 찾아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클로에의 예의 바른 낯을 살피던 루시엔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교제 상대가 생기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 또한 축하드려요.”
그리 말하며 루시엔이 생긋 웃어 보였다. 클로에는 속절없이 가슴이 콕콕 찔렸다.
속으로 씨익 웃은 루시엔은 부러 장난스러운 말소리로 덧붙였다.
“설마 이런 얘기 불편하신 거, 아니죠?”
“제가 불편할 게 뭐가 있겠어요. 다만…….”
그리 말하며 제 낯을 살피는 것이, 누가 봐도 눈치를 봐 주는 거였다. 제가 정혼을 얼마나 질색했는지 알면서도 조심스레 구는 게 참 정직하셨다.
루시엔은 짐짓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위자료라도 주시게요? 아시다시피 저, 못 가진 게 없는데.”
클로에의 낯이 슬며시 굳었다. 이게 농담인지, 아닌지. 농담이라면 왜 이런 농담을 하는 건지…….
그녀의 애매한 낯을 지켜보던 루시엔이 후후 웃었다.
“농담이에요. 덕분에 제 미래를 제대로 계획할 수 있게 됐는데,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리면 드려야 하는 일이죠.”
루시엔의 즐거운 말소리에, 클로에는 맥이 빠져 허탈히 웃고 말았다. 바싹 긴장했던 마음이 풀려서였을까, 두 사람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느긋이 풀어지고 말았다.
“정혼 때문에 그간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딱히 교류하고 지내시지도 않으셨으면서요?”
“사업을 확장할 때 제일 좋은 건 혼맥. 그다음으로는 연인 관계거든요. 계산기 너머의 일들도 이따금 벌일 수 있으니까.”
“연인…… 관계요?”
“오리포네에서는 데뷔탕트를 치르기 이전부터 자유롭게 교제하곤 해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상업에 뛰어드니 관계를 맺음에 다들 적극적이거든요.”
“오리포네에서도 상단 일을 하셨어요?”
“해 볼까 했죠. 제가 자주 가는 것도 아니니 어딘가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어머니 이름을 빌리긴 싫고. 어느 댁 어리고 귀여운 영식이라도 꼬실까 했는데 제가 정혼했다는 사실이 전 대륙에 너무도 유명하고.”
빈정대듯 말하는 루시엔의 낯에서, 클로에는 어딘가 제 연인과 비슷한 구석을 겹쳐 보았다. 두 사람이 오히려 너무 닮아서 부딪혔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럼 나중에 대공녀께서는 오리포네 쪽과 혼인하시게 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