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에필로그: 기억 위에 쌓는 내일 (5)
그 상자를 보는 순간, 클로에는 제가 오래간 막연히 그려 왔고, 마차가 이곳으로 향한 순간 선명히 상상한 그 순간이 도래했음을 알았다.
클로에가 마른침을 삼켰다.
“로이.”
데메트리안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을 때. 지금껏 수백, 수천 번을 그의 혀끝에서 구른 두 음절이 한없이 낯설게 들렸다. 클로에는 떨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하며 그의 낯을 올려다보았다.
달빛 아래 진지하게 가라앉은 그의 낯은 일견 차가워 보이기도 했다.
“아니, 클로에.”
마치 엄숙한 선언이라도 하듯 그녀의 이름을 부른 데메트리안은, 상자를 내려 둔 뒤 그녀의 손을 쥐어 올렸다.
“너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고 싶어.”
그리 말한 그의 시선이 제가 받쳐 올린 그녀의 왼손에 붙박였다.
말을 멈추고서 숨을 고르듯 그녀의 손을 살피던 그는, 천천히 손가락 끝을 당겨 장갑을 조금씩 벗겨내었다. 손목 위로 한참 올라왔던 장갑이 떨어져 나가자, 클로에의 맨손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린 날 맞잡고 정원을 쏘다니던, 어른이 되고도 투덕일 때면 제 어깨를 콩콩 치곤 하던, 언젠가 제게 실망하여 거칠게 휘두르던, 위태로운 순간에 제 옷깃을 부여잡던, 저와 미래를 바꾸기 위해 적에게 단도를 던지곤 하던…… 그리고 제 손을 맞잡을 때마다 서로의 열기를 감춰 둔 장갑 안에 숨죽이고 있었을, 클로에의 조붓한 하얀 손이었다.
그 맨손을 받잡고서, 데메트리안은 생경한 눈초리로 그녀의 손을 뜯어보았다. 하녀들에 의해 매일같이 잘 관리된 보드라운 감촉, 마치 그녀의 갸름한 얼굴처럼 모양 좋은 손톱, 그녀의 뺨에 물든 것과 같은 그 끝의 장밋빛…….
그 하나하나에까지 감격하는 제가 우스워, 그는 잠시 클로에의 낯을 흘끗 바라보며 짧게 웃었다.
“네게 어려운 일은 아니야. 네게는 쉬운 일이겠지만…… 내게는 정말 중요한 일이어서.”
거기까지 말한 데메트리안이 그녀의 손을 제게로 당겼다. 손마디에 어느새 숨결이 느껴진다 싶었을까, 그가 천천히 입을 눌러 검지에, 중지에, 손가락 하나하나에 깊이 입을 맞춰 나갔다.
거기에서 피어나는 감촉이 심장을 간질였다. 그의 기색에 어딘가 경건한 느낌이 있어, 클로에는 거기에 일종의 애욕이 담겨 있다는 것도 잠시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가 너의 곁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클로에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데메트리안은 다른 손으로 내려 두었던 상자를 집어 들었다.
“네가 허락한다면, 너의 곁에서 너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고 싶어.”
달각, 그의 작은 손짓에 상자의 잠금쇠가 풀렸다.
상자 안에 든 것은 그린 다이아몬드가 빛나고 있는 반지였다. 그 알 굵은 그린 다이아몬드에서 비치는 영롱한 반사광이 클로에의 초록빛 눈동자를 물들였다.
“네 평생을, 내가 지키게 해 주겠어?”
콩닥, 콩닥, 콩닥, 두 사람의 심장 소리가 풀벌레 찌르르 우는 밤공기에 은은하게 흘렀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기를 바라며, 올해로 돌아오자마자 수소문한 끝에 찾아낸 최상급의 그린 다이아몬드였다. 반지로 맞춰 놓고도 한참을 제 서재의 서랍 안에 놔두어야 했던 것을 비로소 선보이는 데메트리안의 심장이 속절없이 떨렸다.
무슨 말이 떨어지기를 바라며, 데메트리안은 그녀의 입술만 한참 바라보았다. 달싹이려는 듯한 입술, 살짝 올라간 입꼬리. 좋은 조짐일까…….
잔뜩 긴장한 그의 낯이 조금 어둑해질 무렵.
“그런데, 이건 좀…….”
“좀……?”
“갑작스러운데.”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클로에의 고운 미간에 자리한 실금을 바라보며, 데메트리안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말았다.
또, 무언가 성급했나.
클로에가 떠날 일도 없게 만들었고, 정혼도 무사히 파기했다.
‘오늘 로이 기분도 좋아 보였는데……. 내가 또 무슨 실수를 했나.’
그리 곱씹는 그의 낯에 깃든 것이 누가 봐도 불안함이어서, 클로에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그 데메트리안 크레벨이 내게 쩔쩔매는 날이 오고 말이야.
클로에는 자꾸만 입가에 스며드는 웃음기를 거두려 애쓰며,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전에.”
“응?”
“다른 것부터 먼저 말해야지.”
“다른 거?”
“네 마음이라거나, 뭐 그런 거…….”
클로에가 눈동자를 데로록 굴리며 말했다.
‘난 널 좋아해.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어.’
괜히 그때 욱하는 마음에 그런 소리를 해서. 받은 것이 프러포즈임에도 그 시작이 아쉬웠다. 유치한 억지임을 알지만…….
클로에가 부러 냉정한 표정을 지어 보이니, 데메트리안의 얼굴에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짙어졌다.
“좋아……해?”
“응.”
거기부터 시작해야지. 클로에가 키득거렸다.
장난이었다는 것을 숨길 생각 없었다는 듯이 그녀의 표정이 풀어지자, 데메트리안의 낯에 퍽 안도한 기색이 어렸다.
그래, 처음부터 시작하자 이거지.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그들이 돌아온 시간에 비하면, 정말로 얼마 안 되는 시간이 흘렀을 뿐이니까.
데메트리안은 반지 상자를 닫고서, 그녀의 손을 제 심장 가까운 곳으로 끌어당겼다.
“……내 마음에서, 네가 떠나지 않은 순간은 한순간도 없었어.”
“응.”
“…….”
“사랑해, 클로에.”
“……응.”
클로에의 얼굴에 홍조가 짙어졌다. 그것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데메트리안은 얼굴 가득 웃으며 그녀를 제 품에 안았다.
서로의 심장이 맞닿은 채로 울렸다.
그의 어깨 너머로 그들이 함께 자란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랜 세월이었다.
제 마음이 무슨 모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이 무뚝뚝한 남자에게서 저 한마디를 듣기까지 걸린 시간이.
“나한테서도 같은 말이 나오게, 어디 한 번 노력해 봐.”
“노력이라.”
귓가에서 울린 클로에의 말소리에, 데메트리안은 다시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에게 기대었던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어떤 신비를 감상하는 사람처럼 그녀의 낯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내내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매 사이로 웃음 깃든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만큼 내가 잘하는 건 없지.”
“그래, 힘내 봐.”
그리 말하는 클로에의 얼굴 또한 저와 마찬가지로 기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사과 같은 볼을 얼마간 어루만지다가, 호선을 그리고 있는 도톰한 입술이 눈에 들어온 순간…… 데메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거기에 제 입술을 꾸욱 눌렀다.
그들 사이에서 처음 일어난 유형의 접촉. 두 사람의 얼굴이 모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기대해.”
“기대하라고 하는 거, 멋없다니까.”
그날부터 크레벨 소공작과 라크루아 영애, 아니 클로에 경이 독점적인 관계로 거듭났다는 사실은 곧 고티유 사교계 전역에 널리 퍼졌다.
‘우선, 연애부터 해 봐야 하는 거 아닐까?’
지금껏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데이트라는 것을 하고 싶다는 제 연인의 명을, 데메트리안은 충실히 받들었다.
“그땐 바보같이 집에만 있으면 언젠가 멋진 남자가 나타나서 낭만적인 연애를 선사해 줄 줄 알았지 뭐야.”
“네가 바보도 아니고 집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내가 지금부터 그렇게 할 거잖아.”
“……지금 자기 입으로 멋진 남자라고 한 거지?”
“아직 안 멋지면 어쩔 수 없고.”
쪽, 그의 입술이 순식간에 클로에의 이마에 내려앉았다.
“그것도 노력해 보지 뭐.”
“……말이나 못하면.”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향한 곳은 필립 1세 대로변에 자리한 오페라하우스였다.
데메트리안은 오전 근무만 하는 물의 날이면 퇴근하는 즉시 라크루아의 타운하우스로 커다란 꽃다발을 떠안고서 달려갔다. 라크루아들과 오찬을 함께한 뒤, 클로에와 시내로 나와 제도 안팎에서 펼쳐지는 문화생활을 즐겼다.
어느 날은 경마장, 어느 날은 크리켓 경기장, 또 어느 날은 콘서트홀이나 살롱……. 고티유에 그토록 다양한 즐길 거리가 있는 것을 두 사람 다 알지 못했고, 그것이 저들의 추억이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안녕하세요, 소공작님. 크레벨 쪽 자리로 안내해 드릴까요, 원로원 쪽 자리로 안내해 드릴까요?”
“이쪽으로 부탁하지.”
데메트리안이 내보인 것은 곧 황태자가 될 대니얼의 문장이 새겨진 배지였다. 그가 이용할 수 있는 박스석이 몇 군데 있었지만, 제일 좋은 자리에서 클로에와 함께하기 위해 황실의 전용석을 빌려 온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2황자 전하께서 손님이 오실 거라 언질해 주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무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한가운데 자리. 오케스트라와 가수들의 노랫소리가 조금도 왜곡되지 않고 균형감 있게 들려오는 자리였다. 좌석이며 비품의 만듦새 또한 최고급이었고, 웰컴 드링크로 제공된 와인과 중간 휴식 때 올라온 다과상 또한 차원이 달랐다.
“우리 자리도 나름 좋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황실 자리는 황실 자리야.”
예비 황태자와 절친인 애인 덕을 이렇게 보나. 오페라가 진행되는 내내 클로에는 호사를 누린다는 감각에 들떠 있었다.
“오페라, 재밌어?”
데메트리안의 목소리가 은근하게 울리기에 돌아보니, 그가 어느새 팔걸이 너머로 몸을 바싹 기울이고 있었다. 클로에는 고개를 반대로 빼어 무대에서 시선을 떨어뜨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
“재밌지, 그럼? 넌 아냐?”
“……뭐, 퍽 독창적이네. 시간을 쓰기에 아깝지 않은.”
무대를 흘끗 바라보며 말하는 말소리에 냉소적인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고대의 신화를 재구성한 오페라는 의상이며 악곡의 분위기가 최근의 주류와는 꽤 동떨어져 있었다.
버릇처럼 남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 말하는 것이 얄미워, 눈을 흘기며 그의 입을 꾹꾹 눌렀다.
가 보고 싶다는 대로 군말 없이 함께해 주면서도 번번이 밉살스러운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꼭 그렇게 못되게 말하셔야 직성이 풀리시죠?”
“남들 눈에 잘 안 보이는 오붓한 자리로 빌려왔는데, 내 애인께서는 너무 극에만 빠져 계시니 심술이 나서 말이야.”
“……대니얼 전하께서 신경 써 주셨는데 잘 즐겨야지.”
“지난 주말에 네가 상점 일로 바빠서 못 만났잖아.”
그리 말하며 데메트리안이 제 입을 밀어내는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그러니까, 저와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독점하지 못해 안달 내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도 참, 적응이 될 듯 말 듯 아리송한 일이었다.
“예전에 내가 공작저에 놀러 가서 너 일하는 거 훼방 놓으면 짜증 냈잖아. 서류 건들지 말라고 하고. 그 벌 받는다고 생각해.”
“그건 이제 없는 일인걸.”
데메트리안이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가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바빠질 내년의 일이었으니, 이번에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너도 기억하고 나도 기억하는데 어떻게 없는 일이 돼?”
“……미안.”
제 어깨에 코를 파묻으며 하는 재빠른 사과. 그게 또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러워서, 클로에는 그의 관자놀이께에 입술을 묻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대신 이번 주말은 바람의 날에도 만나자.”
주말이면 두 사람을 실은 크레벨의 마차는 교외로 향했다. 어떤 날에는 아이펠의 장원에 가 마음껏 승마를 즐겼고, 또 어떤 날에는 교외의 숲에 가서 피크닉을 즐겼다.
이번 주말의 선택은 제도 서쪽의 달레냐 숲이었다. 가을이 깊어진 플라타너스 길을 손 꼭 잡고 걸으며, 두 사람은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었다.
“상점 이름은, 새로 정해 봤어?”
“딱히, 잘 모르겠어……. 그렇다고 알레지오처럼 가문명을 달 수도 없고.”
요즘 클로에의 가장 큰 관심사는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알레지오의 마도구 상점을 재개장하는 일이었다.
고티유의 유일한 마도구 상점이자 수리점이었기에 가게를 아예 닫을 수는 없었지만, 반역자의 이름을 내걸어 둘 수가 없어 간판 없이 영업한 지가 벌써 두 달이 넘은 것이었다.
“라크루아에서 하는 일도 아니고, 언제까지 라크루아로 있을 수도……”
거기까지 말하고서 흠칫하여 제 옆을 올려다보니, 기대감을 가무리지 못하는 데메트리안의 낯이 들어왔다.
그녀가 저와 같은 성을 쓰길 바라마지 않는 그의 낯에 깃든 건 이어질 말에 대한 설렘이었다.
그것이 쑥스러워, 클로에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앰버……를 생각해 보기는 했는데.”
“앰버?”
“응, 내 수호 사도인 베람의 상징석이 앰버잖아.”
그리 말하며 클로에는 눈동자를 데로록 굴렸다. 루시엔과 나눠 가진 애칭인지라, 그에게 루시엔에 대한 껄끄러움이 남아 있는 것을 지레 걱정하게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