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에필로그: 기억 위에 쌓는 내일 (4)
‘황태자를 지명하시려는 건가!’
‘드디어 마음을 정하셨나……!’
제 신하들의 열렬한 시선을 굽어보며 에드워드 3세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이 시간을 누구보다 기다린 건 저 자신이었다.
한 아들은 스스로 황제가 될 깜냥이 되지 못함을 알면서도 사랑 때문에 미련을 놓지 못하고, 다른 한 아들은 누가 보아도 성군이 될 자질이 높으면서도 후사 생산의 의무를 질 수 없어 제 마음과 주변인의 기대를 모르쇠하고.
‘제리, 저 아이는 날 적부터 막내로 태어나 욕심부릴 줄 모르고 말이야.’
누구 하나 저를 닮지 못해 욕심이 부족한 제 아들들을 바라보며 황제는 흐뭇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다음 달 풍요제 때 나의 둘째 대니얼을 황태자로 책봉할 것이다.”
오래간 황제의 입에서 나오길 바라마지 않았던 말소리에 연회에 참석한 모든 귀족의 낯이 일렁였다.
1황자파는 1황자파대로, 2황자파는 2황자파대로 놀란 빛을 감추지 못했다. 뷔욘의 흉계에 프레더릭이 연관되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 바가 없어, 무엇을 계기로 이 결정이 내려졌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간 맏이로서 고생 많았던 1황자에게는 제국 연방의 배꼽, 메디올라의 영지를 하사할 것이다.”
이어지는 발표에 무언의 충격이 대연회장을 감쌌다.
메디올라 후작위는 대대로 황태자에게 하사하는 작위로, 그것을 황태자로 책봉되지 아니할 프레더릭에게 하사한다는 것은 그의 세력을 얼마간 온존해 준다는 의미였다.
두 황자의 낯에 아무런 미동도 없는 것이, 황실 내에서 합의된 일로 보였다.
그리고 황제의 공지는, 마지막까지 충격을 선사하였다.
“더불어 오래간 황실의 객으로 머물렀던 카타리나 왕녀와는 프레더릭이 그간 열애한 결실로써 평생의 약속을 맺기로 했다. 조만간 좋은 날을 잡아 널리 알릴 터이니 그대들의 진심 어린 축복을 기대하겠네.”
“맙소사.”
그 말을 듣던 메리앤이 놀란 소리를 내었다. 그녀의 손이 저도 모르게 클로에의 팔뚝을 그러쥐었다.
그 순간 그녀가 함께 밤의 정원을 산책하였던 정중한 말레카의 왕세자를 떠올리고 있음을, 클로에는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도 정말 아름다우세요! 슈슈 색도 참 특이하고요. 드레스랑 보색이어서 더 눈에 띄는 것 같아요. 레이스에 달린 보석 장식은 알의 크기가 불규칙한데 어떻게 다 구하신 거래요?”
오늘도 모햄 자작부인의 어린 딸 셀레나 모햄이 클로에를 찾아왔다. 여전히 메리앤과 함께여서 사람들이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는 가운데, 셀레나만이 어머니가 메리앤의 시녀인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런 셀레나의 머리에는 앤지네에서 제작한 것이 분명한 스칸다르산 모피를 활용한 헤드밴드가 야무지게 꽂혀 있었다.
‘나중에 제 데뷔탕트 기대해 주세요!’
일전에 소녀가 내뱉었던 인사말을 떠올리니, 그때부터 제가 아르투젠을 떠나는 것을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리고 결국, 그 아쉬움을 따라 아르투젠을 떠나지 않는 미래를 쟁취하고야 말았다.
그 뿌듯함을 담아, 클로에는 더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셀레나에게 대꾸해 주었다.
“요즘 제 드레스에 의견을 주는 디자이너 지망생이 있어요. 셀레나 양이 데뷔탕트를 치를 때쯤이면 자리를 잡을 것 같은데, 그때 그에게 맡겨 보는 게 어때요?”
“영애, 아, 아니, 경의 전속 디자이너를 제게 소개해 주시는 건가요?”
“전속은 아니고, 그냥 동업자 비슷한 거예요…….”
경이라니. 그러고 보면 오늘 작위를 하사받은 이래 처음으로 그리 불린 거였다. 수줍어진 클로에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그 반응을 야무지게 눈치챈 소녀가 눈을 반짝였다.
“참, 스칸다르 왕자의 공판 때, 저도 재판을 방청하러 갔었거든요. 그때 경께 다시금 반한 거 있죠?”
“어머, 그 자리엘 다…….”
“제 아버지께서 경시청에서 일하시거든요. 경께서 주요 참고인으로 참석하신다기에 아버지를 졸라서 참석했었어요. 그날 입고 오신 드레스도 궁금하지만…… 아무튼, 경께서 발언하실 때마다 제가 다 가슴이 두근거렸다니까요.”
“별거 아니에요, 미리 정해 둔 대로 이야기한 것뿐인데요.”
“겸손도 하셔라. 제국 아카데미서 수학하신 적도 없으신데, 대단하셔요. 경처럼 다재다능하신 분이 가문에만 남으시는 건 아르투젠의 손해일 거예요.”
“셀리, 너도 참. 영애께 못하는 말이 없구나.”
모햄 자작부인이 제 딸에게 핀잔주는 소리를 들으며, 클로에는 왠지 모르게 마음에 걸리는 말소리를 읊조려 보았다.
“제국 아카데미요…….”
그때였다.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서며 길을 트는 소란이 일었다.
“이번엔 남성 추종자 등장하셨네.”
클로에가 소녀 추종자의 찬사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지켜보던 메리앤이 미라벨과 장난스런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런 말소리가 없어도, 클로에는 이 순간에 제게 다가올 이가 누구인지 너무도 확실히 알았다.
“로이.”
왼손을 허리 뒤에 두고서, 오른손을 그녀에게 내미는 데메트리안의 모습…….
그때, 황실 실내악단의 연주가 시작되며 포상연 2부의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황제 부부와 황자들이 추는 첫 춤의 무대로 쏠렸다.
무엇보다 오늘 약혼을 발표하며 밀애를 공표한 프레더릭과 카타리나에게 관심이 집중되었다.
오늘 마차에서 내린 이래로 처음,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해방된 순간.
그 순간에도 클로에에게서 진득하게 떨어지지 않는 진득한 두 눈동자가 있었다.
“오늘도 첫 춤의 영광, 내게 줄 수 있겠어?”
어느 때보다 허리를 낮추어 손을 내미는 그의 낯에는 한없는 다정함이 어려 있었다. 클로에는 제게서 앞으로도 떨어질 일 없을 그 짙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며,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었다.
“물론이지.”
***
“정말 충격이야. 프레더릭 전하께서 왕녀님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니.”
“너 벌써 그거 여섯 번째 말하고 있는 거 알아?”
“……그만큼 충격이니까 말이야.”
말도 못하나, 클로에가 뾰로통한 얼굴로 입술을 빼죽 내밀었다. 데메트리안은 제 곁에 앉은 그녀의 꾸밈없는 표정을 내려다보며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눌러 내렸다.
언제나와 같은 달밤, 언제나와 같이 제가 클로에를 마차로 데려다주는 밤.
언제나와 같이, 그가 오래간 바라고 추억해 온 그 언제나와 같이.
포상연의 주인공으로서 가는 곳마다 좋은 소리만 들었던 클로에는 기분 좋을 만큼 황실 양조장의 와인을 홀짝였고, 그보다 더 많이, 오늘의 벅참과 낭만적인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들떠서 평소보다 더 많이 재잘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정말로 그러했다.
아직도 연회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 클로에의 초록색 눈동자에는 어떤 생기가 남아 있었다.
“아까 라구 경 표정 봤어? 황실 마법사단에 무조건 합격시켜 주겠다고 했을 때.”
“볼 만했지. 머리로는 재수 없다 침 뱉고 싶은데 마음은 속절없이 떨리는 표리부동의 전형이던데.”
그리 말하는 데메트리안이 어투가 약간의 빈정거림을 담고 있었다. 그 말소리를 듣는 클로에는 괜스레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것 같았다.
그와 이토록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게 얼마 만인가 싶어서.
남들 앞에서는 늘 예의 바른 낯을 꾸며 두는 그가 제 앞에서만큼은 자연스러운 표정도, 까칠한 말투도 마음껏 내버려두곤 했다.
저만 아는 그의 모습이 있다는 사실이, 제가 그에게 특별한 이라는 증명이라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게 지금이라 해서 다르지 않았고…… 그때의 아련한 두근거림이 되살아나, 새삼 가슴이 빠듯해졌다.
그것이 수줍어져서 잠시 시선을 창가로 돌렸을까.
페드로 거리를 지나 타운하우스 밀집 지역으로 향해야 할 바깥 풍경이…… 무언가 낯설었다.
“……뭐야? 어디로 가는 거야?”
눈치챈 건가. 제 야트막한 수가 들키고 말아, 데메트리안은 창피한 마음을 담아 괜히 클로에의 손을 제 손으로 덮어 보았다.
“이야기 좀 할 수 있는 데?”
“이야기는 지금도……”
할 수 있잖아.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니, 차창에 팔꿈치를 걸쳐 두고서 입가를 가린 채 창밖만 쳐다보는 그의 귀 끝이 조금, 빨개져 있었다.
아, 그런 건가.
클로에는 얼굴이 달아오르고 말았다.
리비에라 강변 남쪽의 언덕은 그들이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았던 그날처럼 고즈넉했다. 스칸다르의 기사들이 몰래 주둔해 있었을 정도로 너른 공간에, 성배를 훔쳤던 이들이 탈출의 경유지로 썼을 만큼 인적이 드물었다.
존재도 몰랐던 공간에 깃든 여러 의미를 곱씹으며, 클로에는 데메트리안이 이끄는 대로 마차에서 내려섰다.
데메트리안의 시선이 클로에의 발치를 훑었다. 연회에 참석했던 구두를 신은 채였고, 바닥은 포장되지 않아 울퉁불퉁하였다.
“조금 위험하겠지?”
그리 말하고는, 순간 허리를 숙인다 싶더니 그대로 클로에를 안아 들었다. 꺅, 갑작스레 몸의 중심이 뒤바뀌어 클로에가 절로 새된 비명을 질렀다.
“내 목 잡아. 불안하면 더 위험하게 느껴져.”
물론 위험해질 일은 없겠지만. 그리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대번에 가까워진 거리가 쑥스러워진 클로에는 뭐라고 쏘아붙이지도 못하고 순순히 그의 목을 안았다.
은은한 향수 냄새와 긴장으로 가득한 심장 뛰는 소리가 그곳에 진득하게 배어 있었다.
‘구두 굽이 높은 것도 아닌데……. 갈수록 더 유난이야.’
그것이 밉지 않았지만. 오히려 더 설렜지만.
얼마 되지 않는 길이었음에도, 그녀에 대한 것 한정으로 기민하게 발동하는 노파심이었다.
목적한 곳에 다다른 데메트리안은 편평한 바위 위에 제 재킷을 깔아 그녀를 앉혔다. 거기서 내려다보는 고티유 시내의 전경은…… 지난번 봤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황궁에서 늦게까지 연회가 열리고 있는지라 프란츠 광장을 중심으로 불빛이 더 환하게 비치고 있을 뿐.
‘지난번에 왔을 때만 해도 모든 게 불확실했는데.’
많은 것이 지금과 달랐던 그때를 떠올리며 클로에가 미소를 머금을 무렵이었다.
초가을의 미지근한 바람이 클로에의 귀밑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내내 그녀의 낯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데메트리안의 큰 손이 그녀의 귓바퀴를 쓸었다.
저도 모르게 그편으로 시선을 돌리자…… 지금까지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러할 다정한 얼굴이 있었다.
저에게는 꾸밈없는 이 사람이, 저와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벅차서 녹진하게 풀어진 얼굴을 무방비하게 내비치고 있는 그 풍경.
“있지.”
갑작스레 무거워지려는 분위기에, 클로에가 저도 모르게 말을 돌리듯 떠들썩한 목소리를 내었다.
“내가 모햄 자작 영애 이야기를 했던가? 모햄 자작부인이 미아의 시녀인데, 그 댁 딸인 셀레나 양이 지난번 연회 때부터 말이야…….”
잔뜩 긴장해서 말을 돌리는 속셈이 빤해 데메트리안은 속으로 웃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읊으며 재잘대는 낯이 오래간 그리워해 왔던 그대로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양 볼, 꾸밈없이 빛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하지만 이따금 그 눈빛은…… 조금 처연하게도 빛났고, 어딘가 먼 곳을 꿈꾸는 듯도 했다.
그래, 어떻게 이걸 몰라볼 수 있었을까.
‘마음이 너무 급해서, 이렇게 잘 보이는 걸 못 봤던 거지.’
제가 그 어리석은 시간을 돌고 도는 동안, 그녀 또한 그 시간을 굽이굽이 보내며 어떤 흔적을 입었다. 그녀가 겪었을 삶의 질곡이 빚어낸 나이테와도 같은 것들…….
지금은 없게 된 미래지만, 그때의 것들이 지금의 그녀를 얼마간 구성한다는 증명.
제가 모르는 그 시간도, 지금 제 곁에 있는 그녀도 오롯이 감싸안고 싶었다.
클로에의 귓가에서 말아쥐었던 손이 다시금 귓바퀴를 덧그리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솜털 보송한 장밋빛 뺨이 그의 손에 낙낙히 담겼다.
그 손이 따뜻하게 느껴졌을까. 클로에는 거기에 고개를 살포시 기대고서 그의 낯을 올려다보았다.
그 오랜 시간을 돌아왔는데도 그의 낯에는 여전히, 저만이 알 수 있는 소년 데메트리안의 장난기 어린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진중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 너머에 진득하게 배어 있는 열기 또한, 저만이 볼 수 있는 거였다.
클로에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별수 없이 분위기가 무거워지고 말았다.
그녀의 긴장한 낯을 얼마간 바라보고 있던 데메트리안의 입꼬리에 야트막한 호선이 일었다.
그가 제 품에 손을 넣자, 거기서 오늘 종일 품고 있었던 작은 상자 하나가 딸려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