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에필로그: 기억 위에 쌓는 내일 (3)
말쑥하게 머리를 빗어 넘기고 우아한 턱시도를 차려입은 데메트리안이었다. 경애 가득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손을 꼬옥 맞잡으며. 클로에는 한 걸음씩 마차에서 내렸다.
“라이언 군이 야심 차게 만들었다는 드레스가, 이거야?”
“응, 독특하지? 아름다운 거야 말할 것도 없고. 걔 정말 재능 있나 봐.”
그리 말하며 클로에가 제 옷을 자랑하듯 그를 향해 이리저리 휘돌아 보였다.
진한 보라빛 민소매 드레스 위로 검은색 보석 조각들이 자잘하게 수놓인 검은색 레이스가 로브처럼 덧대여 있어서,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를 화려하게 꾸몄다. 알알이 쏟아지는 보석들의 오색 반사광이 데메트리안의 눈동자에 이채를 더했다.
“오늘도 파격적인 드레스를 입고 왔네요.”
“이번에도 안드레아에서 맞춘 걸까요……?”
“라크루아 영애 때문에 한동안 모피 달린 헤드밴드가 유행했는데, 이번엔 슈슈인가 봐요.”
“레몬빛이라니…… 가을에 하는 것치고 밝은색이긴 한데, 묘한 맛이 있네요. 한동안 하나로 묶은 머리 스타일이 유행하겠어요.”
지난번 연회에서 워낙에 주목받아서였을까, 오늘도 클로에의 옷차림을 눈여겨보는 호사가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고 보면 탄신연 때 클로에가 선보인 폭 좁은 드레스가 유행하기 시작했는지, 보형물 없이 드레스를 입은 이들이 꽤 눈에 띄었다.
‘라이언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정말 어깨 으쓱했겠어.’
직접 드레스를 들고 달려와서는, 쥘과 오늘의 꾸밈에 대해 열심히 토론하며 치장을 돕고는 그 결과물에 흡족한 미소를 짓던 라이언의 모습.
‘내가 스무 살로 돌아와 한 일 중에 가장 보람 있는 일을 택하라면, 라이언을 포섭한 일일 수도…….’
스무 살로 돌아온 것에 대해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던 대축일 주간의 장터에서, 제국 아카데미 생도를 사칭해 타인의 호의를 이용하던 그 불량배가 마음을 고쳐먹고 꿈을 이뤄 가는 모습을 보는 건…… 분리 독립파의 테러를 저지하거나 성배 탈취 건을 막은 것과 다른 의미로 뿌듯한 일이었다.
클로에가 그 흐뭇한 미소를 속으로 감출 때였다.
“라이언 군의 실력이 좋은 건 알겠지만, 그건 다 네가 그에게 영감을 줄 만큼 아름다운 주인인 덕일 거야.”
그간 대꾸할 말을 고민했는지, 데메트리안이 진지한 말투로 대답하며 그녀에게 팔꿈치를 내밀었다.
‘얘, 얘도 참.’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데메트리안의 찬사에 귀 끝까지 빨개지려는 걸 간신히 눌러 참으며, 클로에는 그의 팔에 손을 걸었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함께 연회에 입장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까, 그 모든 시간을 통틀어 처음으로.
그 사실이 두 사람 모두에게 감격이었다. 클로에에게는 그 오래간 장난스레 졸라도 불가능했던 일이었으며, 데메트리안에게는 제게 지워진 후계자로서의 의무 때문에 상상조차 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이 간단한 일이 그때는 왜 그리 어려웠는지.’
데메트리안이 빙긋이 웃는 낯으로 클로에를 내려다보며, 흐트러진 적 없는 귀밑머리를 괜스레 쓸어 넘겼다. 그 손길에는 명백한 애정이 어려 있었다.
그와 더불어, 그의 목에 걸린 진보라빛 크라바트……. 그것이 클로에의 드레스와 맞춘 것임을 알아본 사람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주신께서 이번 일을 기뻐하셔서 크레벨과 캄포의 혼약을 무효화하셨다더니.”
“정말로 혼약이 파기된 모양이지요?”
“크레벨의 후계자와 캄포의 대공녀가 혼인하는 건 상식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말이에요.”
연회장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따라 다양한 말소리가 들러붙었다. 그리 말하는 사람들의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두 사람의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특별한 관계를 모르는 척해 주었던, 사려 깊은 사교계 인사들이었다.
“마탑의 마법사, 라구 경에게는 금화 300개와 의무 복무 기간 이후 황실 마법사단에 무시험으로 입단할 수 있는 특전을 하사하네.”
“기사 파이겐 경에게는 금화 100개와 라디부르의 영지 및 남작위를 하사하는 바이네.”
“누아제트 남작의 영애, 미라벨 양에게는 에시스의 훈장과 금화 300개를 하사하네.”
오늘의 포상연에서는 알레지오 후작저에 잠입했던 모든 사람이 황제의 치하를 받게 되었다. 이 자리에 참석할 계제가 아닌 농브르 역시 비공식적으로 큰 상금을 받게 되었다 했다.
교단 내부에서 치하받게 된 루카를 제외하면 그날의 동료들 모두가 오늘 황제에게 포상받은 셈이었다.
내역으로만 따지면 크레벨 소공작에게 내려진 포상이 가장 컸다.
“데메트리안 경에게 뷜의 훈장과 함께 라렌티니의 영지와 올해 한 달의 유급 휴가를 하사하는 바이네. 더불어 스칸다르 멜하운에 억류되었던 인신매매 피해자들을 구출하는 데 공을 세운 크레벨 기사단에게 금화 100개와 태양의 휘장을 하사하네.”
황제의 전폭적인 호의를 시사하는 그 포상의 내역에 데메트리안은 흡족한 미소를 걸었다.
두 번째 사도인 뷜의 이름을 딴 훈장은 2급 훈장. 아름다운 호수로 유명한 라렌티니의 영지는 백작령으로 취급받는 작지만 알찬 영지. 거기에 기사단의 문장에 황실 기사단의 문장에만 들어가는 태양의 휘장을 새길 수 있는 영예까지.
황제가 이미 가진 것 많은 공작가의 후계자에게 내릴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를 보인 셈이었다. 자칫하면 그에게 너무 많은 힘을 실어 준다는 논란이 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이 정도로 흡족해하셨으니, 나중에 혼인을 승인해 달라 청할 때도 꽤 긍정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겠지.’
당사자와의 독점적인 관계를 따내는 것부터가 우선인 일이었지만, 먼 훗날의 일이 조금 쉽게 풀릴 것 같다는 생각에 그는 자못 뿌듯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크루아 궁정백의 영애, 클로에 양입니다.”
오늘 포상 연회의 주인공이 그녀라는 듯, 대니얼을 제외한 포상 인원 중 가장 마지막으로 클로에의 이름이 불렸다.
“짐이 올해 가장 흥미로운 인물을 꼽으라면 궁정백의 영애를 꼽을 것이야.”
황제의 너스레에, 그편을 주목하고 있던 모든 이의 낯에 미소가 번졌다.
“일전에 인신매매단의 수법을 간파함에 있어서도 영애의 활약이 컸다고 들었네.”
“황송합니다.”
그리 말하며 클로에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허리를 얕게 숙였다. 망토처럼 뒤로 늘어진 레이스 자락에서 검은색 보석 조각들이 자잘한 무지개빛을 내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더불어 성배 약탈 사건의 흉수를 추적하고, 성물을 소홀히 한 제국을 대표하여 주신께 용서를 간구하였으며, 경시청과 원로원을 도와 사건을 잘 마무리하는 데 역할이 컸다.”
클로에는 고개를 숙인 채 지난 몇 달간의 제 고생이 몇 가지 문장으로 축약되는 것을 들으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제게 일어난 신비를 파헤치자고, 제가 더 행복하길 바라는 미래를 얻자고 했던 일이었다. 그것이 포상받을 일이 된 것은 한편으로 운이 잘 맞아떨어졌음이었다.
“우선, 올 한 해 제도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에서 필요 이상의 활약을 해 준 영애에게 피즈의 훈장과 함께…… 준남작의 기사 작위를 내리는 바이네.”
준남작의 기사 작위.
클로에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놀란 낯을 바라보는 황제의 낯에 깜짝 선물이 잘 먹혀 즐거워하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클로에의 뒤편에 자리한 연회의 손님들 역시 소리 낮춰 웅성대었다.
제국에서 기사 작위란 황실에 충성 맹세를 하고 기사가 되었거나, 제국 아카데미를 졸업하여 관료가 된 이에게 수여되는 거였다. 아르투젠 귀족 사회에서 기사 작위와 가장 거리가 먼 이들을 꼽는다면, 클로에처럼 어딘가의 부인이 되기 위해 길러진 고위 귀족가의 영애들이었다.
‘이러다가 언니 기사 작위라도 받는 거 아냐?’
언젠가 메리앤이 농담하듯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단상 아래에 자리한 메리앤에게 시선을 던졌다. 단상 바로 앞에 자리한 메리앤은 재빨리 고개를 도리질했다.
범인을 색출하듯 그 짧은 사이에 그녀의 시선이 데메트리안을 향했다가 대니얼에게로 옮겨갔지만, 그녀에게 무슨 치하를 하지 못해 안달이 난 그들 역시 금시초문인 모양이었다.
젊은이들의 눈빛 교환을 지켜보던 황제가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포상으로…… 반역자의 가문에서 몰수한 상점, 앙헬라타 거리 73번지의 알레지오 마도구 상점을 하사한다.”
“네?”
예기치 못했던 하사품의 내용에 클로에는 깜짝 놀라 상황도 잊고 놀란 목소리를 내었다. 클로에의 반응에 황제는 한층 더 기꺼워진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상점을, 제게 하사하신다고요……?”
연회의 손님들 또한 한결 더 당황하여 웅성거림이 높아졌다.
알레지오 후작가가 장사치라며 천시받았을 정도로 아직도 상업에 대한 귀족 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은데, 그 상점을 귀족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으로 굴어야 할 미혼의 영애에게 하사한다니.
황제는 다시금 그 모든 소란을 눌러 내리듯 엄숙한 목소리를 냈다.
“라크루아의 영애. 아니지, 클로에 경이 제국인 중 보기 드물게 스칸다르의 문물에 해박하다며 스칸다르의 하원에서 직접 요청한 일일세.”
“스칸다르의…… 하원요?”
클로에는 재빨리 잊어 두었던 옛 기억을 떠올려, 제가 알던 시절의 스칸다르의 정치 체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무런 실권도 갖지 못했던 제2왕비가 상원도 아닌, 평민을 대표하는 하원과 연이 닿을 일은 없었다. 그때 하원의 의장이라 봐야, 로열 아카데미의 학장 출신인 무슨 남작이었는데…….
클로에의 낯에 물음표가 가득 찬 것을 한참 지켜보던 황제가 목소리를 낮춰 넌지시 말을 보태 주었다.
“분리 독립파의 수장이었던 한센 자작이 지금 하원의원으로 활동 중이라네.”
“네에?”
클로에는 재빨리 대축일 주간의 장터에서부터 몇 번이고 얽혔던 이올린 한센의 얼굴을 떠올렸다.
‘분리 독립파가 귀족 출신이랬으니 정계에 진출한 게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녀의 얼굴에 납득의 빛이 스치는 것을 확인한 황제가 장난스러운 말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이 포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경? 아무리 경이라도 장사는 그대 체면에……”
“아닙니다, 폐하.”
클로에는 재빨리 답하며, 언젠가 라이언에게 말했던 것처럼 자신감 있는 미소를 걸어 보였다. 장사는 더 이상 클로에에게 귀족 영애의 소양 운운하며 거리낄 일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스칸다르와 제국 간의 교류는…… 클로에가 오래간 고민해 온 것이었으니까.
저보다 잘할 사람이 없기야 했다.
“왕자의 추방으로 인해 경색된 두 나라 간의 교류, 제가 잘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 참, 기대되는구먼.”
황제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언니, 진짜…… 내 말대로 된 거 알지?”
“네가 폐하께 무슨 간언이라도 드린 것 아니고?”
“곧 정략혼으로 팔아넘길 조카딸에게 무슨 의견이나 있는 줄 아시려고?”
“공녀님, 사람들 들어요.”
“뭐 어때.”
오늘도 메리앤은 클로에를 방패 삼아 귀찮은 사람들의 접근을 막으며 마음껏 빈정대었다.
아니, 상대를 방패 삼는 것은 클로에 또한 마찬가지였다.
색다른 드레스를 선보이고 공훈을 인정받아 인상적인 포상을 받기까지 했으니, 클로에에게 말 붙이고 싶은 사람들이 수많았던 것이다. 미라벨과 단둘이 있어서야 그걸 이기지 못할 걸 알아, 식순이 전환되는 틈을 타 메리앤에게 달려온 거였다.
“그나저나, 캄포 대공녀는 오늘 안 왔네? 언니한테 중요한 날인데.”
“아직 오리포네에서 안 돌아왔다나 봐. 고티유에 그렇게 자주 얼굴 비추고 싶지 않다고.”
클로에는 얼마 전 루시엔으로부터 날아온 편지를 떠올리며 대꾸했다.
정혼을 파기하지 못한 미래에서 리도테에 다니며 사교계를 휘어잡았던 루시엔 캄포는, 아무래도 이번에는 사교계에 큰 욕심을 내지 않을 모양이었다.
‘내가 알고 지내며 느낀 바론, 애초에 사교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니까…….’
정혼에서 벗어난 그녀의 삶 역시, 어떻게든 그녀에게 편리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클로에는 그렇게 에르드의 선물이 한 사람에게라도 더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 그대들에게 즐거운 무도회를 선사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황실의 가장 중요한 결정을 공표하겠네.”
갑작스레 들려온 황제의 말소리에, 무도회의 시작을 기다리던 연회의 객들이 깜짝 놀라 앞쪽을 바라보았다.
황실의 가장 중요한 결정이라 하면, 단 하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