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에필로그: 기억 위에 쌓는 내일 (2)
그리 말하는 프레더릭의 목소리가 심히 떨렸다. 무언가 낯선 기색에, 황제가 스칸다르 왕의 친서를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대니얼 또한 불안한 낯으로 맞은편의 제 형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에게는 데메트리안의 수사를 도우면서 피어오르고 만 아주 자그마한 의심의 불씨가 있었지만, 설마, 그건 아니기를 바라는데.
“제가…… 스칸다르 왕자의 계획에 협조했습니다.”
딸각, 제 옅디옅은 의심이 선명한 현실로 닥친 충격에, 대니얼은 찻잔을 반쯤 미끄러뜨리고 말았다. 황제의 집무실이 무거운 정적에 휩싸였다.
프레더릭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으나 그 무거운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마음속 깊이, 제 아버지와 동생이 받았을 충격에 미안해하면서.
어째서인지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프레더릭의 이름이 언급되는 일은 없었다. 여러 정황 증거로 놓고 보았을 때 제가 연루됐음을 짐작하고도 남았을 터인데.
‘그날 내가 대신전에 있었던 걸 알았을 텐데, 단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지…….’
알레지오 후작저의 현장 정리를 도운 대니얼을 증인으로 신청했을지언정, 프레더릭의 이름은 재판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완벽한 무시는 한편으로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증명이었다. 그 무언의 압박이 강요한 선택지에서, 프레더릭이 고른 것은…… 제 죄를 자백하는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황태자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니까…….’
기실 그는 뷔욘과 거래하기로 한 그 순간부터 죄책감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되돌릴 용기가 그에게 부족하였다. 그래서 순간의 선택이 떠민 대로 뷔욘의 계획을 방조하고 말았다.
그러고도 그에게 선택할 기회가 오지 않았다면 그가 모든 걸 자백할 일은 없었겠지만…… 저에 대한 의심을 공론화하지 않은 것이 암시하는 상황 아래, 그는 결국 어떤 용단을 내리고야 말았다.
그간의 모든 후회를 담아 프레더릭이 제 무릎을 움켜쥐었다.
“겹그믐의 날에 저와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감히 그 간계를 실행하고야 만 것입니다. 저는 그 절도범이 보물고에 방해 없이 접근할 수 있게끔…… 대신전의 경비를 느슨히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프레더릭의 말끝에는 깊은 한숨이 떨려 나왔다. 기어코 저지르고야 말았다는 안도감이었다.
지금껏 하루에도 몇 번씩 제 죄를 자백하기를 바라마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그는 번민 끝에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그 고민의 끝에는 늘 이 나라의 황후가 되기 위해 손님으로 와 있는 제 사랑, 카타리나의 얼굴이 떠올랐으니까.
프레더릭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얼굴이 잊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는 제 뱃속을 긁어내는 심정으로 간신히 내뱉었다.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있던 황제의 시선이 슬며시 제 둘째에게로 미끄러졌다.
네가 피하려 하여도,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 눈빛이었을까.
아니길 바랐던 경미한 의심이 현실이 되어 빚어낸 풍경에, 대니얼은 바싹 언 낯으로 아무런 기색도 띠지 못했다.
***
“미안해. 미안해, 그대…….”
제1의 달 에시스가 어느새 보름이 되어 달빛을 흘려보내고 있는 황궁 후원의 가제보.
프레더릭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카타리나의 발목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카타리나는 난간에 엉덩이를 기댄 채, 프레더릭의 거칠게 떨리는 등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제국에 뿌리내리지 못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들려오는 소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뷔욘이 체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얼마간 짐작하고 있었던 일.
‘열흘은 넘겼으니 꽤 오래 버텼다고 해 줄까.’
제 여리디여린 황자의 구슬프게 들썩이는 어깨……. 처음 만난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프레더릭은 늘 저보다 컸지만, 저보다 늘 한없이 작았다.
침묵이 얼마간 이어졌을까. 한참을 흐느끼던 프레더릭은 카타리나로부터 아무런 말도 떨어지지 않자, 혀를 깨무는 심정으로 말을 쥐어짜 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부디 대니얼 그 녀석과……”
행, 복…… 끄읍, 그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울음과 함께 집어삼키던 그때.
카타리나가 천천히 상체를 숙여 그의 안쓰러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끄흡, 흑, 흐흑, 애써 눌러 참았던 눈물이 다시금 복받쳤다.
“프레디. 왜 내게 아무런 부탁도 하지 않아?”
“무슨, 흡, 부탁…….”
“너를 위해 황후 자리를 고사하라거나, 본국을 배신하라거나, 왜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아?”
쿨쩍, 물 먹은 콧소리를 내며 프레더릭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어깨를 안았던 몸을 들어 올리며 카타리나가 천천히 그의 얼굴을 쓸었다. 단정하게 빗어 두던 머리칼은 부스스해져 있었고, 늘 열의에 차서 빛나던 그의 금안은 눈물에 잔뜩 이지러져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남자에게 마음을 내주고 만 지도 벌써 스무 해였다.
카타리나의 붉은 입술이 삐뚜름한 호선을 그렸다.
“……쉬운 건 재미가 없지.”
“카티……?”
“내가 선택한 남자가 그 정도 배짱이 없는 것 정도야 이미 알고 있었어.”
“……그대를 실망시켰다면 미안해.”
잠시간 멈춰 있던 프레더릭의 얼굴이 다시금 일렁이기 시작했다. 카타리나는 재빨리 그의 뺨과 턱을 쓸었다. 그의 낯에 범벅되어 있던 원통함이 그녀의 손에 얼마간 묻어났다.
“……본국에 서신을 보냈어.”
“말레카에?”
“아르투젠의 황태자가 아니라, 프레더릭 바로 당신하고 혼인하겠다고.”
“뭐라고?”
프레더릭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의 낯에 떠올라 있는 건 믿을 수 없음의 경악이었다.
“그런 게, 가능할까?”
“폐하께서 프레디, 너에 대해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갖고 계실 때 얼른 진행해 버리면 되잖아.”
“죄책감이라니…….”
“대니얼은 나와 혼인하지 않아. 폐하께서 그걸 모르실 리 없어.”
프레더릭은 대꾸도 하지 못하고 제 연인의 낯을 살펴보았다.
카타리나가 잘못 판단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스칸다르의 왕자와 거래를 주선하면서도, 그의 유순한 마음씨를 걱정했으니까.
그러니 이 영문 알 수 없는 말도 맞는 것일 테다. 하지만 무슨 의미인지…….
카타리나가 피식 웃었다.
“그 애가 날 한순간이라도 그런 눈으로 봤다면, 내 못난 황자께서는 진즉에 나를 잃으셨을걸.”
***
2차 공판은 싱겁게 끝났다. 첫 공판에서 쏟아진 증거와 증인들의 발언을 반박해야 마땅한 자리였지만, 피고 측에서 그 누구도 변론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스칸다르의 왕자는 기억을 잃은 채였고, 알레지오 후작 또한 여전히 의식 불명이었으며, 헬레네 알레지오도 마찬가지로 묵비권을 행사하였다.
그 누구도 죄를 시인하지도, 부인하지도 않는 가운데 찾아온 선고일. 재판장은 준비해 둔 판결문을 읊었다.
“반역죄를 물어 알레지오 후작가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작위를 박탈하며, 뷔욘 스칸다르는 제국 연방에서 추방한다.”
그것이 스칸다르 국왕의 탄원서를 수리한 황제가 감형을 권고한 끝에 만들어진 최소한의 절충안이었다.
며칠 뒤 평민의 신분으로 경시청에서 풀려난 뷔욘 스칸다르는 역시 평민이 된 헬레네 알레지오와 함께 자취를 감췄다. 백발의 여인이 그들을 데리고 떠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쩌면 열대륙으로, 어쩌면 서대륙으로. 여하간 제국 연방에서 추방된 뷔욘 스칸다르의 일행은 더 이상 이 대륙에 나타나지 못할 거였다.
***
제국력 913년, 9월 첫 번째 바람의 날.
“에티엔, 어제 늦게 들어왔더구나?”
“네, 아티장 지구 쪽에 화재가 나는 바람에요.”
“방화범을 아직 못 잡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원한 범죄 같아서, 우선 기름 도매상들을 조사하려는 중이에요. 아, 이 토마토 절임 정말 맛있네요. 라쥐르에서 보내온 건가요?”
“응, 토마토도 따로 잔뜩 보내 줘서, 당분간 토마토 원 없이 먹겠더구나.”
오늘도, 클로에의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클로에는 이번 여름에 라쥐르에 다녀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다정한 외가의 가족들은 클로에가 좋아하는 라쥐르 주방의 별미인 토마토 절임을 한가득 보내 주었다. 거기에 올해 유독 풍년이었다는 토마토까지.
동시에 에티엔은 9월의 첫 주 철의 날에 발생한 방화 사건으로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은 꼬박꼬박 제 갈 길로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클로에를 둘러싼 것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아쉴, 이번 달 말에 소년 병사단 마지막 훈련 있지?”
“……누나가 언제부터 내게 그렇게 관심이 많았다고?”
“네가 눈물을 머금고 캄포 대공녀와 같이 리도테에 다닐 기회를 포기했단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우씨! 얼굴이 홍당무가 된 아쉴이 제 누나를 노려보았다. 여름휴가를 타지에서 보내고 돌아왔지만, 어린 동생의 첫사랑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클로에는 밉살스레 웃어 보이고는 제 오라비를 향해 말했다.
“우리 주방에서 쓰는 식물성 기름만 생각하지 말고. 서민들은 정육점에서 버리는 비계를 가져다 만든 라드유가 더 친숙한가 보더라고. 한번 정육점 쪽도 알아봐.”
“……어어, 그래. 한번 얘기해 볼게.”
에티엔은 어색한 말소리로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그는 지난봄, 제 누이가 마력에 오염된 키슬라바산 에메랄드를 제보한 이래로 조금씩 그녀에 대한 평가를 바꾼 차였다. 그 얄미운 크레벨 소공작과 단짝인 세월이 길어서일까. 제국 아카데미에서 배운 적 없는데도 꽤나 공무에 대한 감각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누이의 통찰력은 가끔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 결과로 오늘…….
“로이, 오늘은 그 소년이 만든 드레스를 입기로 했다고?”
“라이언 혼자서 만든 건 아니고요, 얼마 전부터 안드레아에 저녁마다 가서 수련하고 있대요. 안드레아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손댔다니, 걱정 않으셔도 될 거예요.”
“네 드레스를 걱정한 게 아니라. 오늘 네가 세운 공로를 크게 포상하는 날인데, 네가 재능을 알아본 이의 드레스를 입는다니 이 어미가 다 감개무량해서 말이야.”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에, 클로에는 해맑게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오늘, 제국력 913년의 첫 번째 바람의 날.
모든 것들이 클로에의 기억대로 흘러갔지만, 단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성배 도난 사건을 해결한 주역들을 위한 포상 연회가 열리게 된 것이었다.
라크루아의 마차가 황궁 앞에 들어서자, 오늘의 특별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해 있던 아르투젠 귀족 사회 일원들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쏠렸다.
오늘 연회의 주인공, 클로에 라크루아.
포상을 받을 인원은 여럿이었지만, 가장 주목할 이를 꼽으라면 단연코 클로에가 일 순위였다.
마차 안에서부터 저를 향해 쏟아지는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클로에는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점성술사에게 네 올해 운세를 물어본다면, 분명히 남들의 주목을 십 년 치 몰아서 받는 해라고 이야기할 거야.”
에티엔이 놀리듯 하는 말에, 클로에는 맞은편의 그를 얄밉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의 말에 거짓이 없는 것이, 주인들을 내릴 목을 찾기 위해 천천히 굴러가는 마차의 차창 너머로…… 정말, 이편을 흘끗대는 사람들의 시선이 수많았던 것이다.
‘몇 번을 겪어도 적응 안 되는 일이야.’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일……. 데뷔탕트나 일국의 첫 비가 되어 벌였던 시내 퍼레이드 같은 건 너무도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때의 시선이 지금처럼 열렬했던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제가 성취해 낸 일 덕분에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은…… 긴장되는 한편으로, 꽤 즐거운 감각이었다.
‘탄신연 땐 너무 놀라는 바람에 싫다고만 생각했는데.’
클로에는 스무 살로 돌아오고서 이따금 기분 좋은 두근거림을 선사하는 이 고양감에 한껏 벅차올랐다.
어느새 마차가 멈추고 부모님과 에티엔이 먼저 내린 뒤. 저를 구경하기 위해 마차를 둘러싼 사람들의 앞으로…… 너무도 익숙한 실루엣의 익숙한 손이 나타났다.
클로에의 입매가 깨끗한 호선을 그렸다.
“어서 와, 로이. 오느라 고생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