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에필로그 (1)
“……이게, 무슨……?”
잠에서 깨어난 크레벨 공작은 한동안 쉬이 꿈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잠기운에서 벗어나 자리를 떨치고 정원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그 시간 내내, 그는 꿈속에 들려온 목소리를 곱씹었다.
<너희의 오랜 맹세, 아이들이 지키려 노력한 것으로 다 되었다.>
그저 꿈으로 치부하기엔 그 음성이 너무도 선명했다. 그리고 거기에 배어난 그 성스러운 빛의 따스한 기운이…… 어딘가 익숙했다.
대축일 때나 황제의 탄신연 때 주신의 신비를 볼 때 그러했고, 무엇보다 젊은 시절 윌리엄과 대신전에서 맹세하던 날의 신비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의 노력이라.’
정혼을 파기해 달라 요구한 이후로, 무언가 작정한 듯이 바쁘게 굴던 큰아들을 떠올려 보면…… 정말, 무슨 묘수라도 찾은 것일까.
‘요 며칠 기사단이랑 작전 수행한다며 집에도 안 들어왔는데.’
그는 이에 대해 가장 허심탄회하게 상의할 수 있는 상대를 찾기로 했다.
운 좋게도 캄포 대공이 제도에 남아 있었고, 또 마침 전령을 보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전 중에 만나자고 답해 오기까지 했다.
그렇게 갑작스레 이뤄진 원로원에서의 티타임.
‘이 아침부터 한달음에 달려온다 하고, 답지 않게.’
크레벨 공작은 제 친우 윌리엄이 응접실에 들어선 순간…… 저를 괴롭히는 지난밤 꿈자리의 기묘한 감각이, 저만의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황망한 표정, 불안해 보이는 눈빛, 한편으론 기가 찬 듯 슬며시 들려 있는 입꼬리까지.
오늘 아침 내내 제가 짓고 있던 표정이었다.
“내가 어젯밤에 기묘한 꿈을 꾸었는데…….”
“자네도…… 말인가?”
“자네도……?”
“어쩐지, 새벽 댓바람부터 전령을 보냈더라니.”
“어쩐지, 자네가 이 시간부터 나를 다 만나러 오고.”
두 친우는 얼마간 서로의 낯만 들여다보며 허허 웃었다. 그동안 서로들의 고충을 모른 체하며 약 올리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안도의 웃음이었다.
“자네도 꿈에서 그 음성을 들었다면…….”
“애들이 참, 좋아서 난리를 치겠군. 이 무슨 기적이란 말이야.”
***
그날 오전부터 제도는 굉장히 소란스러웠다.
제도 북서쪽 외곽에 자리한 알레지오 후작가의 저택이…… 밤사이 반쯤 무너졌다는 것이었다. 어떤 신비라도 일어난 것인지, 하늘에서 쏟아진 주신의 광휘 아래 생긴 일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2황자가 이끄는 제3기사단이 출동했다고 했다. 그들이 체포한 것은 알레지오 후작가의 일원과 스칸다르 왕실의 기사들.
그리고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던 스칸다르의 왕자.
그날 경시청은 새벽부터 들이닥친 제3기사단과 그들이 연행해 온 이들로 인해 아수라장이었다.
스칸다르 왕실과 알레지오 후작가의 기사들, 도합 스물에 가까운 인원이 경시청의 차가운 돌바닥에 자리하게 되었고, 평소 쓸 일이 없는 경시청 최상층의 특별 유치장 또한 객을 받게 된 것이었다.
스칸다르의 왕자, 그리고 알레지오의 부녀.
그중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끈 것은 단연코 스칸다르의 왕자였다.
“그 왕자, 뭔가 이상하다던데.”
“아주 백치가 됐대.”
“기억을 다 잃었다는 얘기도 들었어.”
“……도대체 무슨 일이었던 거야?”
제3기사단이 워낙에 신속하게 움직인 덕에 왕자의 이송을 목격한 이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경시청 직원들은 함부로 살필 수 없는 특별 유치장에 수감된 그에 대해 다양한 쑥덕공론을 펼쳤다.
그리고 그날 오후.
알레지오 후작저에 잠입하여 그들을 체포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크레벨 소공작이, 뷔욘 스칸다르가 교단의 사제 하나를 불법적인 방법으로 겁박하여 캄포의 성배를 약탈했다며 원로원의 법정에 발고했다.
알레지오 후작가 역시 그의 고소를 피하지 못했다.
구휼 기금 절취 방조, 불법 자금 세탁, 분리 독립파 후원, 제도 내 환각제 유통, 인신매매, 마법사의 사병화 등등 많고도 많은 죄목이 그에 따라붙었다. 다음날 실시된 차명 상단인 곰베르의 북극성 장부 조사 결과, 올봄에 절취되었던 구휼 기금이 모두 인신매매에 쓰인 것까지 확인되었다.
“여기, 곰베르의 북극성 장부 원본을 함께 제출합니다.”
“피고, 이에 대해 변론할 내용 있으십니까?”
“…….”
사안이 사안인지라 재판은 신속하게 열렸다. 일주일 뒤 원로원 법정에서 열린 1차 공판의 풍경은…… 참으로 괴이하였다.
세 사람의 피고 중 뷔욘 스칸다르는 기억을 잃어 아무런 증언도 하지 못했고, 디에고 알레지오는 전투의 후유증으로 위독해지는 바람에 참석조차 못했으며, 그의 딸이자 공범인 헬레네 알레지오는 내내 묵비권을 행사한 것이다.
그들을 기소한 크레벨 소공작과 그가 신청한 증인들만이 발언하는 일방적인 공방.
“이에 그의 사주를 받은 스칸다르 분리 독립파의 수장, 스칸다르인 이올린 한센을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심지어 왕자의 편이어야 할 스칸다르인조차 크레벨 소공작의 편에서 증언하였다.
지금껏 아르투젠 사회에서 역병처럼 취급되면서도 그 실체가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분리 독립파의 수장이 나섰다는 사실부터가 인상적이었다. 지난 10년간 ‘스칸다르는 골칫덩이’라는 인식을 강화한 그들의 활동이, 사실은 사교계의 인기인인 뷔욘 왕자의 손끝에서 비롯되었다는 고백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신전 경비대의 시선을 교란하기 위해 도적 떼로 변장하고 대신전에 침입하여, 방화를 저지른 뒤 헌금함을 훔쳐 달아날 것을 지시받았습니다. 성배를 탈취한 디에크 알론센이 빠져나갈 때까지 이목을 끄는 역할이었죠.”
이어지는 재판장의 질문에 뷔욘의 지령으로 지난 8년간 제국에 일으킨 다양한 범죄들을 읊는 이올린 한센의 낯은 치욕으로 물들었다. 올해 구휼 기금 절도 건이나 부작용이 있는 여송연의 불법 유통에까지 이야기가 이르자, 방청객들 사이에서는 어느새 뷔욘에 대한 야유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억을 잃었대서 지각마저 상실한 건 아닐 텐데, 뷔욘은 마치 아무 소리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줄곧 무표정을 고수했다.
그의 반응이야 어찌됐든, 재판은 속행되었다.
“보석의 마력 오염 현상을 설명해 줄 증인으로 마탑의 마법사인 라구 경을 신청합니다.”
“제도 내 마력 반응을 관찰한 황실 마법사단장 랜들 경을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구휼 기금 약탈 건의 피해자이자 가짜 성배에 쓰인 에메랄드를 납품한 키슬라바 상단의 단주 개리슨을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오래간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 왔음을 과시하듯, 크레벨 소공작이 밀어붙인 증인과 증거의 양과 질은 압도적이었다. 피고인 스칸다르의 왕자가 제정신이었어도 쉽게 빠져나가지 못했을 정도로.
하지만 공판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수사 과정에 함께 참여했다는 라크루아 궁정백 영애의 활약이었다.
제국 아카데미를 나오지도 않은 귀족 영애가 재판장에서 무슨 진술을 하기란 어려운 법이라고들 여겼으니까.
“이에 라크루아 궁정백가의 클로에 양을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또 라크루아 영애인가요?”
“꽤 깊게 참여하고 있었네요.”
“두 분이 친하신 거야 알았지만, 공무까지 함께 의논할 줄이야.”
“라크루아 영애가 제국 아카데미를 다닌 것도 아닌데, 이런 일에 꽤 익숙해 보이네요.”
그것이 좋은 내용이어서일까, 목소리를 낮출 생각도 없는 방청객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데메트리안은 괜히 제 어깨가 으쓱하였다. 오늘을 위해 지은 단정하고 기품 넘치는 드레스를 입은 클로에가 요 며칠 데메트리안과 연습한 대로 막힘없이 진술했다.
“캄포의 성배는 성물이기에 마력에 노출되더라도 에르드의 심장이 오염되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범행 이후 보물고에서 발견된 모조품에는 디에크 알론센이 순간 이동으로 진입한 것을 증명하듯 보석에 마력 오염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에메랄드는 키슬라바 상단에서 뷔욘 스칸다르가 구매한 것이며, 루비는 슈바츠 거리의 경매장에서 헬레네 알레지오가 낙찰받은 것을 제가 목격하였습니다. 여기, 경매장에서 발급한 보증서의 사본을 증거로 제출합니다.”
그녀의 막힘 없는 말소리와 의연한 태도에 다시금 방청석에서는 찬탄이 배어 나왔다. 그녀를 바라보는 데메트리안의 낯은 번번이 감격으로 물들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뷔욘 스칸다르의 용태에 대해서는 어찌 설명할 수 있겠소?”
그리고 재판이 마무리될 무렵, 재판장이 재판이 진행된 네 시간 내내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뷔욘에 대해 물었을 때 역시, 나선 것은 라크루아의 클로에였다.
당사자로서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그녀뿐이었으니까.
‘올 것이 왔어.’
클로에는 작게 심호흡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감으면 생생히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
<그래, 네 선택에 따르도록 하마.>
<너는 너를 위한 큰 선택을 하였지. 그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에르드가 갑작스레 칼자루를 넘겨주었을 때, 의외로 클로에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어쩌면 에르드가 읊조리던 내용이 클로에가 스무 살로 돌아오고서 늘 고민하던 바와 닿아 있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나간 미래를 기억하는 것이 제게 어떤 의미인지. 그러면 저는 제국력 몇 년을 살고 있는 몇 살의 클로에 라크루아인지…….
‘저는, 기억을 하지 못하는 편이 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클로에는 그것만큼은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클로에는 재판정에서 밝힐 수 없는 제 발언을 마음속에 눌러 담았다.
‘어머니께서 데미에게 기회를 주셨고, 그를 긴장시키기 위해 저에게도 기억을 남겨주셨다고 하셨지만…… 그 기억이 제게는 축복이었습니다.’
그 기억이 모두 즐거운 내용만은 아니었지만, 그걸 알아서 클로에는 이전의 스무 살보다 더 나은 스무 살을 만들어 가고 있었으니까.
‘벌을 주시고자 하신다면 그 축복을 앗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억에서 그 사람이 비롯되는 것이니, 자아를 잃는 것만큼 큰 벌이 어디 있겠습니까. 벌 받은 것조차 잊는다면 마음이야 평안이겠지만 영혼에는 지워지지 않는 낙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그와 부부로 지냈던 희미한 감각마저 송두리째 삭제하길 원하는 그녀 자신의 바람과도 닿아 있었다. 저는 제가 겪었던 그 미래와 전혀 다른 길을 택했으니까.
루카의 몸을 빌어 제게 미소 지어 보이던 에르드를 떠올리며, 클로에는 늘어뜨려 두었던 손을 말아쥐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때의 일들은 정말로 사라지고 말았다. 훨씬 행복한 지금을 만들기 위한 제 선택으로써.
“주신께서 심판하신 일입니다. 성물을 훔치고 그걸 도모하기 위해 주신의 권속인 신관 안톤미오노의 정신을 환각제로 망가뜨린 그 죄를 엄중히 묻길 바라셨습니다.”
알레지오 후작저가 무너질 때 하늘에서 사도들의 빛이 강림했다는 증언이 있어, 클로에의 증언은 모두에게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성물을 약탈한 것이 신에 대한 불경죄와 다름없기에 설득력을 더했다.
재판정에 자리한 모든 이가 납득했음을 확신한 클로에는 데메트리안의 낯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기억에서 그 사람이 비롯되는 거니까요.”
우리는, 그러니까 너와 나는, 얼마간 바보 같았고 후회할 일 많았던 지난날을 되돌려 새로운 행복을 찾기로 했지만…… 없는 일로 만들고 만 그때를 기억하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일 수 있는 거겠지.
그 미래는 사라졌지만, 그 시간이 있어서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있다.
아까부터 제가 어떤 발언을 할 때마다 감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 클로에는 꾸밈없이 웃어 보였다.
***
재판의 여파는 황실을 뒤흔들었다.
「그러니 형님, 아니, 지고하신 아르투젠의 태양이시여. 아르투젠의 주신께 망각으로써 모든 것을 잃도록 벌 받은 제 어리석은 아들놈을 선처해 주셔서…….」
지병이 급격히 악화되어 뷔욘이 귀국하는 계기가 되었던 스칸다르의 왕이 가장 처음 보내온 소식은, 갑작스레 회복세에 접어들었다는 희소식 이전에 제 아들의 구명을 감히 비는 탄원서였다.
“어허, 참……. 곤란하게 되었구나.”
몇 번째 읽는 편지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 음침한 녀석이 저지르고 만 범죄를 덮을 수야 없는 법이었지만, 저와 호형호제하며 수십 년간 친교를 다져 온 구스타프 5세의 읍소가 기나길었다.
저를 암살하려던 것도 아들이라고, 쯔쯔…….
“어찌할까. 얼지 않는 바다의 항구 하나와 보석 광산 세 개를 10년간 임대하겠다고 나서는데.”
황제는 맞은편의 소파에 나눠 앉은 제 아들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들에게서 뾰족한 묘수를 얻고자 한 말은 아니었지만…….
“저, 아바마마.”
프레더릭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황제는 말해 보라는 듯 수염 빼곡히 난 턱을 까딱였다.
“감히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