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어제와도 내일과도 같지 않도록 (17)
루카를 제한 모두가 성배에 시선을 던졌다.
데메트리안이 뷔욘을 바닥으로 밀치고서 성배를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그가 일행을 향해 천천히 들어 올린 성배에는, 그 둘레를 따라 박힌 여덟 개의 보석, 에르드의 심장을 따라…… 빛이 어룽거리고 있었다.
우웅…… 우웅…….
그 빛이 진해졌다 사그라들며 깜빡이는 양상이 마치 공명음이 나는 듯한 착각을 빚었다.
마치 홀린 듯, 일행이 하나둘 성배에 가까이 다가섰다.
“성배가 루카의 신성력에 공명하나 봐…….”
“이게 무슨 의미지?”
그들이 성배와 루카를 번갈아 보며 의아한 목소리를 냈지만…… 루카는 안톤미오노를 진정시키는 데 집중하는 듯 이편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안톤미오노의 몸에서 발작하듯 뿜어져 나오던 신성력이 어느새 온전히 잦아들어 있었다.
“앗, 에르드의 심장에.”
그때, 보석에 하나하나에 선명한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도들의 우두머리인 아망의 상징석 다이아몬드부터 루비, 앰버, 사파이어, 에메랄드…… 마침내 막내 사도인 피즈의 라피스라줄리까지.
거기에 어린 빛이 어느새 성배에 소복이 쌓이더니…… 이윽고 폭발하듯 갑작스레 위로 쏘아 올라갔다.
빛의 기둥이 천장을 관통하였다.
“대축일 예식 때 같아…….”
미라벨의 경탄 어린 말소리에 모두가 내심 동의하였다.
빛의 기둥을 올려다보는 일행의 눈동자에 반사광이 일렁였다.
그때, 기절한 듯 축 늘어진 안톤미오노를 뒤로하고서 루카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성배에 일어난 이변에 아무런 감흥이 없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가 데메트리안에게 양손을 내밀자, 데메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성배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 광경을 모두가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성배를 울리던 빛무리가 루카의 손에 어린 그 순간.
‘……어라.’
그걸 지켜보던 모든 이들은, 루카에게 어떠한 변화가 생겼음을 인지하였다.
루카의 입꼬리가 야트막한 호선을 그렸다.
처음 보는 루카의 표정에, 그를 둘러싼 모두가 숨죽여 그의 낯을 쳐다보았다.
<이제 좀, 이 아이의 몸이 쓸 만하구나.>
“맙소사.”
클로에가 탄성 너머로 모두가 숨 들이키는 소리를 냈다.
루카의 목소리지만 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탄신연 때 주신의 목소리를 받았을 때와 같은 느낌…….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데메트리안은 지독한 기시감에 휩싸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별안간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우후죽순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 아이를 위해 네게도 기회를 주겠다, 나의 아이야.’
‘내 아이의 슬픔과 너의 슬픔이 맞닿아 있었을 뿐이다.’
‘언제쯤이 좋을까?’
‘대가가 필요하다고? 기회를 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냐.’
‘……그래, 좋다. 내 나름으로 보답할 것이다.’
‘뭐가 좋을까……. 네게 부와 권력은 그다지 필요치 않을 테고.’
주신의 신비를 입은 날 간신히 남겨 둔 기억 너머로 새로이 떠오른 기억들이 덧입혀졌다. 마치 가라앉았던 앙금이 일거에 떠오르듯이…….
‘아, 그때.’
그가 잊고 말았던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제 아버지의 맹세를 무효화해 주십시오. 어머니의 아이의 슬픔을 없애 드릴 테니, 제게도 그녀의 슬픔을 책임질 기회가 필요합니다. 그 맹세로 인해 괴로워하는 게 저뿐만이 아닌 걸 아시잖습니까.’
‘흥미롭구나. 퍽 과하고. 하지만 이미 들어 버린 이상 외면할 수도 없게 되었구나.’
그러니까, 주신이 제 절망을 빌미로 시간을 되돌릴 때, 성배가 탈취되는 걸 막는 조건으로 일종의 거래를 했던 내용이었다.
그래, 그건 명백한 거래였다.
‘그래서 내가 맹세에 대해서 완전히 까먹고 있었던 거지.’
돌아오자마자 성배 도난 사건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성공하리란 확신까지 있었으니, 무의식중에 맹세란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생각했던 것이리라.
주신께서 약속하셨으니까.
‘그래서 아버지께서 언급하실 때까지 잊고 있었던 거고. 내가 정혼을 의무로 생각한 이유가 맹세 때문인데…….’
그걸 잊고 만 건, 그때의 은폐하셨기 때문이리라.
그러고 보면, 돌아온 직후의 기억에 모호한 부분이 많았다.
몸에 밴 기억 때문인지 원로원이나 가문의 일들은 마치 어제 일처럼 익숙하게 해나갔는데, 한편으로 중요한 몇 가지 약속을 잊었던 것이었다.
‘대축일에 루카와 만나기로 한 걸 잊은 것도 그렇고. 당신과 거래했음을 잊게 하시면서 몇 가지 부작용이 일었던 걸까…….’
그리 생각하며 데메트리안은 루카를, 아니 루카의 몸을 입은 에르드를 바라보았다.
<잘해 주었다. 감히 나와 거래했음을 잊게 하였는데도 혼신의 힘을 다하였구나.>
“거래……?”
“그, 그게.”
클로에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데메트리안은 일전의 바보 같았던 제가 떠올라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나름 완벽한 계획이라 생각했던 것이 맹세에 관한 걸 잊고 세운 거여서 떳떳하지 못하단 생각에…… 결국 클로에를 또 한 번 상처입히게 되지 않았던가.
‘주신께서 약속하신 것만 기억했더라면 그때 그렇게 한심하게 굴진 않았을 텐데.’
끄응, 데메트리안이 한숨을 내쉬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내릴 때였다.
<내가 네 짝에게 약속을 하나 하였다.>
“짜, 짝이라니……요.”
클로에의 기어들어 가는 항변에 에르드는 빙긋이 웃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너희의 슬픔은 네 짝의 아비가 내게 맹세를 했기 때문이라. 내 아이의 슬픔을 거둬 준다면 그 맹세를 없던 것으로 해 주기로 말이다.>
“맹세를, 없던 것으로요? 그러면 거기에 건 것도……”
<내가 너희들이 맹세에 건 것이 탐나서 대가를 거두는 거겠느냐.>
그 말에 클로에가 반색하며 데메트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깃든 것이 안심과 기쁨이어서, 데메트리안은 마음이 빠듯해졌다.
그건 정말 저만의 과제였는데.
클로에에게 미래를 갈구할 자격을 얻기 위해 정혼을 파기하고, 그래서 그란펠트의 장원이나 원로원 의장직을 잃어버릴 경우를 대비하는 일 말이다.
그녀가 신경 쓸 필요 없는 그 일에 관해 클로에가 적이 안심한 표정을 짓자니, 그리 바라 마지않은 그녀와의 미래가 조금 더 가까워진 것만 같았다.
그의 감격한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채, 클로에가 에르드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저희와 거래하지 않으시니…… 그 내용을 잊게 하셨군요?”
<다 알게 두었더라면 네가 이를 이해하겠다고 책과 씨름하지 않아도 되었을 터인데.>
“앗, 그, 그게.”
제가 겪은 일의 비밀을 찾겠다고 온갖 도서관을 들쑤신 걸 다 알고 계시는 거였구나.
루카의 몸을 입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친근하게 말을 붙이게 되는 것이었지만, 그의 몸에 깃든 게 이 세계의 유일신이란 것이 새삼 실감 났다.
“그런데 데미와 거래하신 일인데, 저는 왜.”
<그가 청한 거래로 인해 너 또한 당사자가 되었고. 또, 기회를 얻기 전의 일을 누군가는 알아야 나태해지지 않을 것 아니니.>
제가 아는 이 중에 데메트리안만큼 나태와 거리가 먼 인물은 없었지만, 클로에는 어쩐지 에르드의 말이 납득이 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나는 전에 못해 봤던 거 한다고 여흥이나 즐겼으니까.’
데미가 나 같을까 봐 그러셨나. 클로에가 제가 그간 해온 일들을 습관적으로 과소평가할 무렵.
<네가 보여 준 담대한 변화들 또한, 충분히 흡족했단다.>
그녀의 생각을 간파한 듯 덧붙인 에르드의 말에, 클로에의 낯이 빨개지고 말았다.
<자, 그러면 이제 길 잃은 새싹과 이야기를 나눠 볼까.>
그리 말하며 에르드가 루카의 몸을 빙글 돌렸다. 뷔욘 쪽을 향한 루카의 붉은색 눈동자가 서느렇게 빛났다.
별안간 루카의 손이 뻗어지며, 펑! 바닥의 타일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꺅!”
“윽…….”
헬레네의 부축을 받아 도망치려던 것인지, 타일 부서진 곳 바로 옆에 뷔욘이 헬레네와 함께 풀썩 주저앉아 있었다. 그들에게 따라붙어 있던 알프레다가 남은 마력을 끌어모아 방어막을 쳤다.
뷔욘의 낯에 냉소가 걸렸다.
“촌극은 그다지 더 보고 싶지 않은데.”
<너를 이유로 내 아이들이 겪은 슬픔을 이야기할 차례란다.>
그리 말한 에르드는 다시금 루카의 손을 내뻗어, 퍼펑! 세 사람이 자리한 곳 주변의 타일을 모조리 부쉈다.
파열음은 간결했지만 타일이 부서진 곳은 깊디깊게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이윽고 깊숙한 구덩이 한가운데에 섬처럼 올라 있게 되었다.
“윽, 신성력은 역시 사기야…….”
알프레다의 방어막 같은 건 애초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도구로 간신히 표면이나 태우던 것에 비하면 그 파괴력의 차원이 달랐다.
후두둑……. 폭발의 여진 때문일까, 옴짝달싹 못 하게 된 뷔욘 일행의 머리 위로 천장에 생긴 균열의 잔해가 파스스 떨어져 내렸다.
그 절망의 순간조차, 뷔욘은 적개심 가득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불신자를 처단하기 위해 몸소 현신하시다니, 부지런도 하시군.”
<불신은 너의 처우와 무관한 일이란다. 대지에서 단비를 맞고서 살아가는 자는 다 나의 어린 싹이니까.>
여전히 에르드의 말소리는 다정했으나, 그 낯은 어딘가 싸늘했다. 에르드가 구덩이 위 허공을 걸어 뷔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내 아이를 거짓으로 꾀어 타락으로 이끌고 몸과 마음을 해친 건…… 내버려 둘 수가 없겠더구나.>
그리 말하는 루카의 눈동자가 안톤미오노를 스쳤다.
“춥습니다, 정말, 추웠습니다……. 어머니, 제가 그런 게 아니오라, 저는 그저…….”
어느새 정신을 차린 것인지, 에르드가 저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알아차린 안톤미오노가 바닥에 엎드려서는 빌듯이 기도하고 있었다. 그 말소리는 신성력이 폭주하기 전에 비하면 훨씬 안정되게 들렸다.
그걸 바라보는 루카의 눈동자가 싯붉게 빛났다.
“그저 일탈을 즐기시게 도운 것뿐인데, 아무리 신이라지만 비약이 심하십니다.”
뷔욘의 말소리를 들은 데메트리안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기실 그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그는 사라진 미래를 알지 못하니까…….
뷔욘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면서도 검을 물리고 말았던 것이 그래서이지 않은가. 데메트리안이 침음을 삼켰다.
<기억을 하는 게 좋은지, 하지 않는 게 좋은지.>
문득 에르드의 목소리가 무심하게 울렸다.
<어느 편이 너에게 벌이 될지…….>
그리 중얼거린 에르드가, 루카의 팔을 뷔욘 일행 편으로 뻗었다. 그 손에서 희붐한 빛무리가 뿜어져 나와 그들을 감쌌다.
무언가를 헤아리듯, 그들의 눈동자가 얼마간 허공을 더듬었을까.
“아하, 하하하! 하하하, 멋있어! 멋있는 미래야!”
허공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뷔욘이 발작하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의 망막에 사라지고 만 미래가 스치고 있음을, 데메트리안과 클로에는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하, 하하하하!”
무엇을 보았는지 그의 시선이 얼마간 데메트리안을 향했다가, 웃음을 머금은 그대로 클로에에게로 향했다.
그 눈빛이 무엇을 함의하는지 알 것 같아, 데메트리안의 얼굴이 수치심과 음울함으로 굳었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했단 말인가? 최고군, 정말 최고야.”
어딘지 광기가 흐르는 듯한 눈동자로 뷔욘은 연신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결국 제국을 혼란에 빠뜨렸고, 끝까지 프레더릭을 이용한 끝에 독립도 이뤘으며, 소공작이 연모하는 여인을 제 여인으로 굴종시켰고, 그래서 소공작이 제 여인을 잠시라도 보겠다고 찾아와 치욕스러운 낯을 하는 미래였다.
달콤하고 또 달콤하였다. 환상이라는 것이 아쉬우리만치.
하하하하, 뷔욘은 어딘가 고장 난 사람처럼 한참 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눈가에 물기가 배는 것도 모르고.
그래서, 저를 부축하던 헬레네의 손길이 딱딱하게 굳는 것도…… 알지 못했다.
헬레네가 스르륵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나도 일회용이었구나. 내 아비처럼.’
제 팔을 단단히 붙들고 있던 손이 빠져나가는데도, 뷔욘은 아무런 눈치조차 채지 못한 채 내처 웃을 뿐이었다.
“마법사.”
“……아가씨.”
알프레다도 같은 미래를 보았다. 아닌 척해도 저 박정한 남자에게 온 마음을 쏟고 있는 아가씨가, 결국 배신당한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 미래를.
알프레다는 울먹이는 눈으로 헬레네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레이스 장갑을 낀 헬레네의 손이 내밀어져 있었다. 알프레다는 조심스레 제 지팡이를 그녀의 손에 올려 주었다.
“하하하하…… 윽!”
퍽!
헬레네가 전심으로 휘두른 지팡이에 뷔욘의 뒤통수가 돌아갔다. 중심을 잃은 뷔욘은 그대로 고꾸라지다가…… 에르드의 손짓에 이끌려 허공에 둥둥 떠올랐다.
“처단해 버리든, 심판해 버리든, 알아서 해!”
헬레네가 바르르 떨며 날카롭게 외쳤다. 앙다문 입술 사이로 어느새 주르륵 흘러내린 눈물이 고였다.
<처단이라, 심판이라……. 어찌하면 좋을꼬.>
에르드의 말소리에 반응하듯이, 루카의 손에 들린 성배가 다시금 신성력에 공명하기 시작했다. 성배에 장식된 보석들 하나하나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질 때.
천장 너머로부터 강렬한 빛의 기둥이 쏘아져 내려왔다.
흰색, 붉은색, 파란색, 노란색…… 색색의 빛으로 이루어진 그 여덟 개의 기둥이 공간 이곳저곳을 비췄다. 저마다 과시하듯 빛을 뿜어대던 빛의 기둥이 점차 서로 얽히더니, 마침내 하나의 소용돌이가 되었다.
“사도들의…… 힘.”
데메트리안의 입가에서 탄식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렀다. 다시금 머릿속을 휘감는 기시감……. 주신과 거래하여 시간을 돌릴 때 보았던 광경이었다.
“그래 분명, 사도들의 힘이 얽히면 무언가가 되돌아간다고…….”
그 반사광에 일렁이는 눈동자 너머로, 클로에는 책을 탐독하며 내린 결론을 되새겼다.
<심판하자니 이미 그의 죄는 무위로 돌아갔고. 그렇다고 아무 처단도 하지 않자니, 내 아이가 너무도 고통스러워하고…….>
안톤미오노는 여전히 납작 엎드린 채 어머니의 이름을 중얼대는 중이었다.
그때, 루카의 붉은색 눈동자가 클로에를 향했다.
<그래, 네 선택에 따르도록 하마.>
“네?”
갑작스런 말에 클로에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마치 그녀를 응원하는 듯, 그녀의 수호 사도인 베람의 주홍빛 빛이 크게 일렁였다.
<너는 너를 위한 큰 선택을 하였지. 그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클로에의 시선이 기절한 채 허공에 떠 있는 뷔욘에게 닿았다. 그 선택으로써 제가 연을 끊어내기로 한, 한때의 부군이었던 이…….
그런 그의 운명을, 제가 어떻게…….
클로에는 가슴께에 올려두었던 손을 말아쥐었다.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