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어제와도 내일과도 같지 않도록 (15)
데메트리안의 물음에 클로에가 기둥의 상층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대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거든.”
말을 듣고 보니 문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의 금이 나 있는 게 보였다.
“연쇄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에 저 안으로 재빨리 숨는 거야. 안에는 방호 마법을 건 마정석을 두껍게 깔아 놔서 폭발에도 거뜬하거든.”
“……벌써 꽤 위험해 보이는데.”
데메트리안이 쩌저적 금이 가기 시작한 천장을 보며 말했다. 쿠르르르… 쿠르르르… 땅 울리는 소리와 함께 진동이 격해진 지도 오래였다.
“그전에 막아야지.”
그리 말하는 클로에의 낯에 일말의 긴장이 피어올라 있었다.
중세 스칸다르식 성채의 자폭 구조를 서술하던 셰비크 도서관의 책에는, 자세한 설계도면과 함께 그것을 저지할 수 있는 약점까지 기록돼 있었다.
‘손잡이와 기둥의 접합부를 망가뜨리면 된다고 했지.’
구조가 정교하기 때문에 오히려 망가지기도 쉽다……라고 쓰여 있던 문장을 떠올리며 클로에가 제 검대에 달린 단도를 만지작거렸다.
“저걸 멈출 수 있어.”
“어떻게?”
클로에가 제게 무슨 지령이라도 내려주길 바라고 있던 데메트리안이 잠시 의아한 낯을 지었을 무렵.
클로에가 대뜸 그의 품에서 벗어나 뷔욘 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드레스를 입었을 때처럼 평생 갈고닦은 예법에 맞춘 우아한 걸음걸이였다.
그러고는 없는 드레스 자락 대신 로브 자락을 잡고서 깍듯하게 인사해 보였다.
“왕자님, 안녕하세요?”
“……영애.”
기둥의 손잡이를 밀던 뷔욘이 클로에를 본 순간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의 발걸음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이런 데서 다 뵙는군요.”
“참, 예측하기 힘든 분인 건 알았지만, 저야말로 놀랍습니다. 모험 놀이를 즐기시는 건지, 이런 허무맹랑한 취미가 있으셨을 줄이야.”
퍽 지쳐서인지 뷔욘은 제 악의를 가장할 줄도 모르고 줄줄 내뱉었다. 그 말에, 클로에는 마음속 어딘가를 찔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로망스도 읽으시고, 부인께도 허무맹랑한 취미가 있군요.’
‘그나저나 ‘크로낭베르 블랑의 환상 여행’이라……. 영애께도 허무맹랑한 취미가 있으셨군요.’
그가 번번이 언급하는 허무맹랑한 취미란, 그러니까…… 그가 멸시하는 평범한 아녀자들의 것을 말하는 거였다.
스스로 정해 둔, 제 곁을 내줄 만한 이상적인 여인상의 기준에 못 미치는 무언가.
‘그 기준에 운 좋게 내가 맞아떨어졌나 보지…….’
깨달음은 정말로 한순간이었다.
그 시절의 부군이 저를 은애하였을 수도 있고, 그의 다정함이 퍽 진실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시간을 한번 되돌리면서 얼마간 달라지고 만 클로에로서는, 더 이상 그때의 제가 아니었으니까.
‘스무 살로 돌아온 순간, 안 될 사이였어.’
거기에 생각이 닿은 순간, 클로에는 뷔욘을 마주하며 드는 마지막 껄끄러움마저 말끔히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그때,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로이.”
위험한데. 하지만 네게 묘수가 있다면. 그리고 네가 그리하고 싶다면…… 그 모든 번민을 담은 데미트리안의 목소리였다.
클로에는 그의 낯을 흘끗 보고는 괜찮다는 듯 눈을 끔벅였다.
그래, 제 뒤에는 삶의 풍파에 닳아 그 어떤 사람이 된대도 늘 그곳에 있을 이가 있었다. 그 든든함과 모든 깨달음에 대한 흡족한 마음을 담아, 클로에는 뷔욘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돌려받을 게 있어서 왔어요.”
“돌려받으실 거라……. 제가 영애로부터 앗은 것이 없는데 어찌 돌려드린단 말인가요.”
이기죽거리는 말투. 그와 부부로 지내던 시절 본 적 없는 악의 가득한 미소. 누가 보아도 어딘가 몰려 있는 사람의 것들이었다.
‘그땐 일국의 정점에 있으셔서 여유로우셨던 걸까.’
클로에는 마음의 거리감만큼 그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왕자님께서 취하신 그 보물에, 제 운명도 걸려 있다면 믿으실까요?”
“하하…….”
마침내 자리에 멈춰선 뷔욘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성배를 이용해서 저 여인을 제 열등한 나라의 비로 전락시킨다는 선택지도 있었음을, 들키기라도 한 걸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별로 재밌지 못한 이야기랍니다.”
쓸쓸한 듯한 목소리로 거기까지 말한 클로에의 손이, 순식간에 허공을 날았다.
퍽! 클로에의 검대에 달려 있던 단도 하나가 뷔욘이 쥐고 있던 손잡이의 뿌리 부분에 박혔다.
그 갑작스러운 습격에 뷔욘이 잠시 굳은 찰나.
“꺅!”
클로에의 손이 다시금 허공을 긋자 단도 하나가 헬레네가 쥐고 있던 손잡이에 가서 박혔다. 그들이 얼어 있는 사이, 클로에 쪽에서 보이는 손잡이의 밑동마다 단도 하나씩 박혀 들어갔다.
손잡이와 기둥과 맞물리는 부분을 어그러뜨려, 손잡이를 밀어도 기둥이 움직이지 않게끔 한 것이었다.
“이게 무슨……!”
뷔욘의 눈동자가 분노로 번득였다.
클로에는 애써 생긋 웃어 보였다. 그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할 때 짓던 미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과 긴장으로 인해 떨리는 손끝은 데메트리안만이 눈치챌 수 있었다.
“퇴로는 이제 막혔어요. 얼른 성배를 돌려주세요.”
“마법사!”
“끄응…….”
헬레네가 급히 외치자, 알프레다가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기둥을 돌리기 위해 지팡이를 멀리 내려 둔지라 마법을 시동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알프레다의 발밑에 마법진이 스멀스멀 그려지기 시작했을 때.
‘순간 이동 마법!’
다른 이들은 몰라도 라구만은 그걸 알아볼 수 있었다. 알프레다보다 수인 맺는 속도가 빠른 라구의 손이 황급히 움직였다.
“꺄악!”
파지직! 라구의 손에 피어오른 번개가 알프레다의 발 근처로 가서 꽂혔다.
“이런, 내 마력……!”
“피차 다 닳았다고.”
마법이 발동되려던 순간에 방해받아, 남은 마력을 끌어모아 마법진에 응집해 두었던 것이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제 아가씨의 지시를 못 받들게 된 알프레다가 울상이 되었다.
클로에가 다시금 단호한 낯으로 뷔욘에게 말했다. 그를 해칠 생각은 없지만, 단도도 하나 빼어 든 채였다.
“얼른요.”
“도대체 어떻게……”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뷔욘의 낯에 황망함이 깃들었다.
“지하로 내려오는 계단도 그렇고 이 천공기穿孔機까지……. 도대체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거지?”
클로에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셰비크 시절의 제 부군 또한, 클로에가 그것들을 안다는 사실을…… 몰랐을 테니까.
***
독립국 스칸다르의 초대 왕은 이따금 정무 회의에 제 귀비를 배석시키곤 했다. 그녀에게 발언권을 주는 적은 없었지만 그럼으로써 제 총애가 귀비에게 닿아 있다 과시하고, 귀비에게는…… 그녀의 위치를 되새겨 주는 자리.
“전하, 이번 본궁 보수 공사는 어찌 진행하실 예정이시온지요.”
“아, 그걸 슬슬 정해야겠군그래.”
“보통 궁의 안살림은 왕후께서 주관하시는 것인데…….”
법무대신이 턱 아래까지 길게 기른 수염을 쓰다듬으며 짐짓 한탄하듯 말했다. 그가 간언하는 척하여도, 사실은 그가 지금 스무 살인 그의 딸이 태어났을 때부터 왕후의 자리를 탐내 왔음을 모르는 이 없었다.
그걸 고까워하는 재무대신이 재빨리 말했다.
“전하께서 정히 정비를 들이지 않으실 거라면, 피욜라의 열쇠를 2왕비 전하께 드리심이 어떠실는지요.”
피욜라의 열쇠. 셰비크 본궁의 식량 창고 열쇠를 일컫는 말로, 셰비크 궁의 명실상부한 안주인이 되었다는 증명이었다.
대대로 스칸다르 왕실의 정비들이 피욜라의 열쇠를 지니고서 궁의 살림과 인사를 책임졌다. 그리고 피욜라의 열쇠는 현재, 2년 전 현왕이 즉위함과 동시에 지방의 별궁으로 내려간 선왕후가 반납한 이래로 주인이 없는 채였다.
독립국 스칸다르의 왕이 느릿하게 말했다.
“나의 귀비께서는 우리 스칸다르에 대해 잘 모르시니.”
“전하, 저도 이제 많이 공부하였는걸요. 책이 아니라 직접 부딪힌 것으로 더 알아 가고 싶어요. 이번에 에드바르트 남작과 어떤 책으로 공부했냐면……”
“내 귀비시여.”
왕이 제 옆자리에 앉아 긴한 목소리를 내는 제 귀비를 돌아보았다. 연한 금발이거나 연둣빛의 머리칼을 지닌 각료 대신들과 달리 귀비의 귤빛 머리칼만이 따스하고 진하게 빛났다.
“내 어찌 그대에게 그런 고됨을 짊어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고되다니요, 저는 다만.”
“이 자리에서 논할 이야기가 아니니 밤에 따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그리 말하며 왕은 온화하게 눈초리를 접어 웃었다. 애욕 가득한 눈동자에 비친 그의 귀비는 밤을 할애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정무 회의가 끝난 후, 집무실로 복귀한 왕에게 시종장이 오늘 당도한 서신들을 갖고 들어왔다.
“2왕비 전하께 도착한 서신들입니다.”
“특별한 것은?”
“라크루아 궁정백가에서 온 것을 제외하면 뭐, 평소랑 비슷합니다. 크레벨 소공작, 캔달우드 공녀, 랑엔펠트 부인, 프래즈 부인…….”
“캔달우드 공녀와 프래즈 부인 것 빼고 다 소각하도록.”
“넵, 언제나처럼요.”
“그리고 에드바르트 남작이라……. 쓸데없는 짓을 했어. 시녀장에게 단단히 감시하고, 적당한 핑계를 붙여 해고하라 전하게. 시녀들 입단속도 단단히 시키고.”
“알겠습니다.”
깍듯한 몸짓으로 방을 빠져나가는 시종장을, 왕은 다소 권태로운 낯빛으로 쳐다보았다. 아비의 임종을 지키지 않은 저를 의심하면서도 권력을 놓지 못해 입안의 혀처럼 구는 이였다.
‘저런 자보다, 끊임없이 내가 보장한 것 이상을 바라려 애쓰는 내 귀비가 더 흥미롭지.’
그런 그가, 제 귀비가 제 나라에 대해 무엇을 익히고 어떤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는…… 시간이 되돌려질 일 없어도 평생 모를 일이었다.
***
“알고 보면 정신계 마법사기라도 하셨나?”
클로에의 저의라도 알아내려는 것처럼 뷔욘의 낯은 한참 일그러진 채 클로에를 노려보았다. 그 낯선 표정에서, 제가 스칸다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던 제 부군이 떠올라 클로에의 낯에 씁쓸함이 깃들었다.
그 씁쓸한 미소마저 뷔욘에게는 혼란이었다.
제국의 앵무새 따위가 도대체, 어떻게 감히. 맹랑함을 떠나 불쾌하게도.
‘어째서 감히 내 시선을 자꾸만 끄는 건지.’
제가 인지하는 특별함의 기미라도 찾고 싶은 것처럼, 뷔욘은 클로에의 낯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하.’
별안간 뷔욘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그런 그의 낯은 어느샌가 데메트리안을 향해 있었다.
클로에가 성배를 요구하는 내내 그녀로부터 한 걸음 뒤편에 서서 물러나 있던 그였다.
“소공작, 오늘 멀리 걸음하신 김에 저와 거래 하나 하시겠습니까.”
갑작스레 제게 대화의 화살이 날아오자, 데메트리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빛이 희번덕이는 것이, 무언가 정상적인 제안은 아닐 것 같았다.
“제국의 성배 따위, 돌려드리겠습니다.”
그의 선언과도 같은 한마디에 모두가 경악에 차 뷔욘을 바라보았다. 클로에와 데메트리안은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와 한편인 이들은 그의 변덕에 놀라서.
“그 고매하신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 말이죠. 그 대신.”
어느새 등에 멨던 가죽 주머니에서 성배를 꺼내 든 뷔욘은, 그것을 상대들에게로 내뻗었다. 그의 손에 들린 성배 너머로 클로에가 담겼다.
“소공작의 심장에 가까운 이 영애를 내게 넘기신다면 말입니다.”
“전하!”
헬레네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