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어제와도 내일과도 같지 않도록 (12)
램프 하나 켜져 있지 않은 방에는 온통 연기가 자욱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선 루카는 얼굴을 찡그리고서 팔을 휘휘 저었다.
몇 걸음 들어서자니 그 연기의 진원지가 드러났다.
바닥에 깔린 러그에 누워서는 목만 간신히 침대 다리에 기대고 있는 장신의 남자. 덜덜 떠는 손으로 수연통의 파이프를 그러쥔 그의 입가에 드나드는 연기가 자욱했다.
필요한 양을 다 흡입하여 갈급하게 빨아들일 필요 없음에도 습관처럼 머금고자 피워 놓은 듯했다. 잔뜩 풀린 눈동자는 천장 어딘가에 흐릿하게 박혀 있었다.
“……꼴이 이게 뭐야.”
루카가 짐짓 그의 다리를 툭, 찼다. 그제야 타인의 침입을 인지한 듯, 천천히 고개가 이편으로 돌아왔다. 그의 입은 여전히 벌어진 채였다.
“이러려고, 고작 이리되려고 어머니를 배신한 거야?”
루카가 음울한 낯으로 안톤미오노를 내려다보았다. 얼마간 루카의 낯을 빤히 쳐다보던 안톤미오노는, 한참 뒤에야 그에 대한 반응을 떠올렸다.
이히힉, 이상한 웃음소리가 났다.
“이게, 히힛, 누구야. 우리, 에르드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루카미오노 아니신가. 크힛.”
크크크, 히히히, 안톤미오노는 괴상한 웃음소리를 한참 동안 냈다. 잇새로 침 끓는 소리가 났다.
그의 흐트러진 모습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던 루카의 낯이 더욱 가라앉았다.
“가자.”
“으흐, 히힛, 가긴 어딜?”
“돌아가자.”
“크흐흣, 다 늦었어, 히힉, 늦은 일인걸, 으흐흐흐흐.”
루카는 미동도 없는 낯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3년 전, 사제 서품을 받은 제가 고티유 대신전으로 배속돼 왔을 때부터 늘 저를 꺼림칙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인물이었다. 강직하고, 기품 있고, 신의 목소리를 받는 자답게 청렴하고 결벽적인 삶을 사는 인물.
그런 그가 저 같은 자를 경멸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었다.
‘기집애 같이 생긴 게!’
‘저자가 크레벨 공작가의 후원을 받는다고? 그 댁 아들의 놀이 노예는 아닌가?’
‘신성력이 성하 급일 리가. 그냥 학장님을 얼굴로 꼬신 건 아닌지.’
기실 루카는 차가운 눈길을 받는 게 익숙했다. 그를 특별할 것 없는 눈으로 보는 건, 차라리 그 크레벨 공작가에서 만난 친구들뿐이었다.
그러니까 안톤미오노와 같이 신관의 정석 같은 사람은 저를 싫어함이 당연했다.
그랬기에 루카는 덩달아 그를 싫어하면서도, 저에 대한 혐오감을 그의 기품 아래 잘 숨겨 둔다는 점에서 퍽 존경하였다.
그 강직하고, 기품 있고, 신의 목소리를 받는 자답게 청렴하고 결벽적인 삶을 사는 인물.
그 인물이 이리되기를 그 누가 바랐겠는가.
루카가 씁쓸한 표정을 지을 무렵.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연신 낄낄대는 안톤미오노의 눈초리에는…… 눈물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
“……그, 왕자님이야.”
정말로 이 저택에 계셨구나. 스스로 내뱉은 말소리에 클로에의 온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뷔욘을 마주치리라 생각하기야 했지만, 그러지 않기를 바랐는데.
쿵쿵쿵, 심장 떨리는 소리가 목구멍에서 나는 것 같았다. 핏기가 가신 손끝을 간신히 말아쥐었다.
‘그럼 이 방에 바로 성배가 있고…….’
그리 생각하며 클로에는 데메트리안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낯 역시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일단 라비랑 파이겐 경 기다릴까?”
클로에의 속삭임에, 데메트리안은 검의 손잡이를 틀어쥐며 침음을 삼켰다.
우선 동정을 살피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 자리한 곳에서는 그편이 잘 보이지 않아, 데메트리안은 혼자 재빨리 움직여 문구멍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제가 잘 보려고 잡은 자리인 만큼 자칫하면 들키기도 쉬운 위치였다.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만들어 낸 그림자 안에 몸을 숨긴 그는 고개를 기민하게 기울여 내부를 살폈다.
작은 연회장처럼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저 안쪽에는 응접탁자와 소파가 있었고……,
거기에, 그들이 있었다.
스칸다르의 왕자, 후작, 황자궁에서 보았던 알레지오의 영애, 그리고 파이겐과 검을 맞댔던 왕자의 호위, 그리고 몇몇 스칸다르인들.
제멋대로 소파에 앉거나 팔걸이에 걸터앉았거나, 그 뒤에 서 있거나 한 그들 한가운데의 응접탁자에는……
‘성배.’
마치 화병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올라와 있는 그것은 분명 캄포의 성배였다. 데메트리안의 눈매가 빳빳이 굳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그의 낯에 살얼음이 끼는 걸 바라보던 클로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데메트리안이 짤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그의 시선에 문득 알레지오의 영애, 헬레네가 들어왔다.
뷔욘이 앉아 있는 상석의 팔걸이에 걸터앉은 그녀는 누가 봐도 끈적한 손길로 뷔욘의 머리칼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 순간 데메트리안은, 그 장면을 클로에에게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마치 농브르의 조사 결과로 두 사람이 내연 관계라는 것을 알고도 클로에에게 털어놓을 수 없던 그 마음처럼.
클로에가 뷔욘에게 애초에 큰 연심이 없었고, 그에게 느낀 배신감으로 인해 그 시절의 관계에 의미를 두지 않는 걸 알기도 했지만…….
그냥 마음이 그랬다.
“뭐, 수상한 거라도 있어서 그래?”
그리 말하며 클로에가 문 안쪽을 기웃거리려 할 무렵이었다.
“……엄마야! 왜 그래?”
데메트리안이 재빨리 클로에의 팔을 끌어당겨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가 안쪽을 보지 못하게끔, 그 얼굴을 제 품에 묻으면서.
“왜 그래, 뭔데?”
“……쉿. 들킬까 봐서.”
들켜……? 들킨다면 이 소란이 더 들킬 거였다. 하지만 제 뒤통수를 짓누르는 그의 손길이 어딘가 절박하여, 클로에는 순순히 그가 하는 양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쿵, 쿵, 쿵, 귓가에서 울리는 고동 소리에 어딘가 다급한 기색이 있었다. 거기에 일종의 불안감이 끼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데메트리안의 몸이 크게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오른팔을 급히 들어 올리는 듯한…….
‘검을 쥐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주변이 묘하게 적막했다.
저 안쪽에서 분명 나직한 말소리가 울리고 있었는데 그것이 잦아든 지 오래였다.
클로에는 고개를 들어, 다급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저를 억세게 눌러두던 데메트리안의 손길은 그가 다른 데 집중해서인지 맥없이 떨려나고 말았다.
실내의 불빛이 오래간 어둠에 익숙해졌던 눈을 아리게 쏘았을 때.
‘디에크 경……!’
뷔욘의 호위 기사 디에크가 이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뒤편으로는 응접탁자에 둘러앉은 뷔욘의 일행이 이편을 주시하고 있었다.
‘들켰구나.’
클로에는 데메트리안에게 길을 내주기 위해 옆으로 물러났다. 그녀의 머리를 감쌌던 데메트리안의 손이 검을 쥔 반대편 손을 슬며시 맞잡았다.
‘파이겐 경과 호각지세긴 했지만 어쨌든 그보다는 조금 실력이 아래니…… 내게도 승산이 아주 없진 않아.’
그리 계산하며, 그에게 맞서기 위해 데메트리안이 보폭을 넓게 잡았을 때.
“어.”
클로에가 놀란 소리를 내었다. 데메트리안의 눈동자가 슬며시 그녀의 기색을 살폈다.
검을 빼 들고서 다가오고 있는 디에크의 낯에서 무언가 특이한 징조를 발견한 것이었다.
‘달라.’
분명 디에크의 얼굴에 난 상처는…… 아무리 똑같이 파이겐과 싸우며 난 것이어도 그때와 지금의 상처가 동일할 수는 없었다.
슈바츠 거리의 전투 때, 클로에는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디에크가 턱에서 콧등까지 이어지는 상처를 입었던 것을 인지했다. 그래서인지 황궁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날, 디에크는 복면을 코까지 한껏 끌어 올렸더랬다.
하지만 지금 디에크의 낯에는 사뭇 다른 위치에 검상의 자국이 남아 있었다.
‘눈 바로 밑에서 귀밑까지…… ‘예전’에 생긴 것과 동일한 거야.’
스무 살로 돌아오기 전에, 셰비크에서 봤던 그의 얼굴대로였다.
그러니까, 이건 실제가 아니라 제 무의식에서 건져 올린 이미지.
‘그 마법사가 환영 마법을 걸고 갔구나!’
지하에 내려온 이후로 마력 탐지기를 켠 적이 없어서 몰랐던 것이었다.
‘그래, 라구 경이 우리를 숨기려던 게 빤했는데 순순히 물러났을 리가 없지.’
클로에는 재빨리 데메트리안의 팔을 잡았다.
“환영 마법이야.”
“뭐?”
“그게……”
아니, 이야기할 새가 없었다. 아까 저택에 들어설 때 환영 마법에 걸렸던 경험을 생각하면 ‘이 데메트리안’도 환영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아까처럼 복잡하게 된 술식만 아니라면 마정석 정도로도 괜찮을 거예요.’
그 술식이 복잡한지 아닌지, 클로에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일단 할 수 있는 것을 해 볼 수밖에…….
‘마정석이라면 마침 데미가 제작해 준 단도가 있고.’
클로에의 손끝이 슬며시 제 허리 뒤편으로 향했다.
단 한 번이야. 위험하지 않아. 어차피 마법이야. 진짜 사람 얼굴도 아냐. 괜찮아.
후우, 클로에가 모든 긴장을 한숨에 담아 짧게 내쉬었다.
그녀가 제 검대를 손으로 쓸려는 기척에, 데메트리안은 그녀가 뭘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로이, 위험……”
“윽!”
순식간이었다. 훑는 듯한 손길로 허리 뒤에 차 두었던 단도를 빼어 날리자, 단도는 어느새 디에크의 눈 밑에 박혀 있었다. 그 자루 부분에 박힌 마정석이 빛나며 파이겐만큼 큰 그의 몸이 잠시 휘청였을까.
시야가 크게 울렁였다.
“윽…….”
이내 눈앞에 나타난 건 알프레다가 라구와 사라진 바로 그 복도였다. 그들이 창고에서 나섰을 때와 달리 조명이 희박하여 한참 어둑하였다.
“환영 마법……이었어.”
갑작스레 달라진 풍경에, 데메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검을 놓칠 뻔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너는 진짜였구나.”
“그렇지……?”
그리 말하며 데메트리안은 제 옆의 클로에를 내려다보았다. 다행이라는 듯 클로에의 초록색 눈동자가 한참 그를 바라보더니, 이내 복도 끝을 향했다.
창고의 어스름한 불빛에 비친 그녀의 뺨이 상기된 듯도 했다.
‘왕자의 호위 기사에게서 무언가 내가 아는 것과 다른 부분이 있었던 거지.’
또 그 시절의 기억을 곱씹게 되고 만 걸까.
클로에가 스칸다르에서의 일에 대해 떠올리는 것이 혹여 괴로운 건 아닌지 알 수 없어서 가슴 저미고 마는 것이었지만……
‘오늘 끝내자고 모인 거잖아. 다른 데 정신 팔면 안 되지.’
저녁에 클로에가 했던 말을 되새기며, 데메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한 팔을 뻗어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제게로 기대 놓은 그 머리에 잠시간 제 뺨을 기댔다.
“그래, 그러고도 또 갈 길이 머니까.”
“멀어?”
“……혼잣말이야. 오늘 일은 나한텐 시작에 불과하잖아.”
시작에 불과하다, 라는 말에 클로에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말았다.
그러니까, 성배를 되찾아서 클로에의 미래가 뒤바뀔 일을 없게 만들고, 그 공로를 갖고서 크레벨 공작과 담판을 짓고…… 그러니까, 그게 다 데미가 저를…….
“저, 이러지 좀 말고.”
떨어져 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그의 가슴팍을 확 밀쳐내었다.
그녀의 머리통을 감쌌던 자세 그대로 품이 비고 만 데메트리안은 멋쩍어지고 말았다.
‘얘는 얼마 전부터 자꾸 은근슬쩍.’
심리적인 방어막이 사라져서일까, 저도 모르게 그를 이래저래 덥석 잡아 대던 것도 잊고 클로에는 새삼스레 그의 대담함에 샐쭉한 마음이 되었다.
그녀의 그 뾰로통한 표정마저 좋아서는, 심각한 상황도 잊고 명치께가 간질거릴 무렵.
“이쪽 복도 먼저 살피면서 라비랑 파이겐 경을 기다리자.”
그리 말하는 클로에의 시선은 다시금 복도 끝을 향했다.
그 복도에는 환영 마법에서 보았던 것과 달리 중간중간 다른 방이 있었지만, 맨 끝에는 환영 속에서처럼 어슴푸레한 빛이 났다.
“어쩌면…… 상당 부분 실제와 흡사한 환영이었는지도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