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어제와도 내일과도 같지 않도록 (11)
클로에가 너무 오래 노출되어 기절하는 바람에 다치고 만 바로 그것이었다. 그 일이 제게 큰 실책인지라 민감히 반응하게 되는 한편으로, 그 환각제 냄새가 난다면…….
‘그 신관님이 여기 있을 수도 있는 거네.’
하지만 그의 처분에 대해서 클로에가 언급한 바가 없었다. 그의 비행을 확인한 루카가 조금 심란한 기색을 짓기야 했지만, 지금 성배를 되찾는 데 중요한 건 그가 아니었으니까.
개인적인 궁금증이야 궁금증이고, 할 일은 할 일이었다.
‘그분의 존재가 중요하다면 이미 데리고 갔을 거고. 내버려 뒀다면 쓸모가 없다는 소리겠고.’
미라벨은 퍽 냉정하게도 그리 판단하고는 생각을 털어 버렸다.
“우선, 그 망할 가짜 타일부터 찾아봐요.”
기사들이 모여 있던 곳 근처의 문을 열어 보니, 과연 클로에가 이야기한 대로 방이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이 지하실로 내려가고서 바닥이 원상 복구되었는지 격자무늬로 된 대리석 타일 중 빠져 있는 건 보이지 않았다.
“둘, 넷, 여섯……. 다 해서 마흔여덟 개군요. 무슨 색이라는 말은 없었던가요?”
“……없었어요.”
분명 물어보면 기억하여 알려줄 것인데, 클로에가 지금 어떤 상황일지 알 수 없어서 통신구를 쓸 수도 없었다. 행여라도 제가 통신구를 울려 소리가 난다면 문제가 될까 걱정돼서였다.
“다 부숴 버리면 안 될까요?”
“힘으로 잘못 건들면 다시는 안 열리게 망가진대요. 마법도 안 통한다나. 이게 스칸다르 왕실에서 쓰는 보안 장치라고.”
“……스칸다르 왕실이라니, 정말. 라크루아 아가씨께서도 요즘 영 이상하긴 하십니다.”
파이겐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대로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이 타일들 중에 밑이 빈 게 있단 말이죠?”
“맞아요.”
파이겐은 제 근처의 타일을 노크하듯 쿵쿵 두드려 보았다. 짧은 울림이 났다.
“여긴 아닌 모양이군요.”
그러고서 바로 옆의 타일을 두드려 재시도. 거구의 기사가 쪼그려 앉아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바닥을 두드리는 것에, 미라벨은 조금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푸훗, 작게 웃은 미라벨 또한 불평하던 것을 멈추고 가장 가까운 곳부터 하나씩 두드려 보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두드리며 확인해 본 타일이 전체의 반쯤 되었을 때.
“……뭐하냐?”
갑작스레 울려 온 목소리에, 깜짝 놀란 미라벨이 고개를 쳐들었다. 열어 둔 문가에 인영이 비쳐 쳐다보니…… 삐딱하게 기대어 서 있는 감색 사제복의 남성. 자세히 보지 않아도 루카였다.
다만 그가 여기에 왔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것은…….
‘기척도 없었는데?’
발소리가 들리지 않은 건 둘째치고, 루카처럼 무예를 수련하지 않은 자가 다가오는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아저씨도, 덩달아 뭐 하는 거예요?”
파이겐 또한 미라벨만 쳐다보는 것이, 그도 루카가 접근하는 것을 짐작하지 못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거야 따로 있으니…….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대신, 미라벨은 루카에게 여상히 대꾸했다.
“네가 여기까지 웬일이야? 데미 공자님이 너 신전 일로 바쁠 거라 했는데.”
“내 사명은 이쪽에 있으니까.”
그리 말하는 루카의 목소리가 일견 의미심장하게 울렸다.
사명이라는, 평소라면 쓰지 않을 단어까지 써 가면서.
하지만 파이겐도 미라벨도 거기에 주목하지 못했다.
“그래서 뭐 하는 거냐니까?”
“아, 여기 타일 하나를 걷어내면 지하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길래.”
그리 말하며 미라벨이 두드리려던 타일을 쿵쿵, 두드렸다. 울림이 짧은 것이 이번에도 꽝이었다.
“그렇게 두드려서 알 수 있대?”
“지하로 연결되니까 아래가 비어서 소리가 울린다던데.”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루카는 휘적휘적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잠시 물러나 봐.”
한가운데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을 양손으로 짚고는, 잠깐 눈을 감고 있었을까.
와락, 별안간 루카의 붉은 색 눈동자가 어느 한 지점을 향했다. 그의 손바닥이 그쪽을 향한 순간, 이미 그 자리의 타일은 사라진 채였다.
부서지는 소리도, 그 잔해도 없이.
그 아래로는 텅 빈 어둠이 자리해 있었다.
“……뭐야, 어떻게 한 거야?”
저들이 한참 동안 자괴감을 느끼며 씨름하던 것을 대번에 해내자, 미라벨과 파이겐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살리는 능력도 있으면 멸하는 기능도 있는 거 아니겠냐. 자라나게 하면, 되돌리기도 하고.”
루카가 별거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평소 그의 성정을 생각하면 잘난 체하며 이죽거릴 일인데도 그의 말투는 묘하게 차분했다.
막상 두 사람은 그가 보인 신성력의 신비에 놀라느라 그 또한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마법으로도 못 부수는 거라고 했는데…….”
“애초에 마법이 신성력의 모방인데, 무슨.”
코웃음 치며 그리 말한 루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디 가? 같이 안 가?”
“가 볼 데가 있어서.”
그리 말하는 루카의 눈동자에 어딘가 쓸쓸한 기색이 어렸다. 미라벨의 노란 눈동자가 잠시 그의 낯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등 뒤에 열려 있는 문을 타고, 환각제 냄새가 어렴풋이 실려 왔다.
“아마 옆 방에 있을 거야.”
“알고 왔어.”
루카는 다시금 피식 웃고서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몇 걸음 걸어갔다가 되돌아와, 미라벨을 향해 툭 내뱉었다.
“그렇지만 고마워.”
그를 바라보는 미라벨의 낯에, 자책감을 느낄 그에 대한 일종의 걱정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었다.
***
사뿐사뿐 방 안으로 들어선 알프레다는 연극적인 몸짓으로 이 상자 저 상자를 기웃거렸다.
“여기에에 어떠언 쥐새끼가아 있으려나아.”
곡조까지 붙여서 콧노래 흥얼대며 무작위로 찾는 척했지만, 그들 쪽은 실수로라도 보지 않는 것이…… 여기에 그들이 있음을 확실히 아는 모양이었다.
꿀꺽, 클로에가 숨죽여 마른침을 삼켰다. 숨마저 조심해서 쉬면서.
그녀의 어깨를 틀어쥔 데메트리안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무력만 놓고 본다면 제압하는 거야 어렵지 않을 거였다. 칼을 뽑고 상자를 넘어뜨려 혼란스럽게 한 뒤에 치명타를 날리면 된다.
하지만 상대는 마법사, 그것도 환영 마법을 구사하는 이 아닌가. 제가 공격하려는 걸 들킨 순간 마법을 시전할 거고…… 아니, 이미 들켰나?
그때였다.
“나야.”
갑작스레 라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부러 옷자락 스치는 소리를 과하게 내어, 알프레다의 주의를 온전히 제게로 끌었다.
약속되지 않은 행동에 클로에와 데메트리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어, 이게 누구야아. 라구잖아?”
“…….”
“너 혼자야?”
“그런 게 중요해? 나 어차피, 마력도 다 떨어졌고.”
알프레다의 고양이 같은 눈매가 슬며시 라구를 훑었다.
그 시선이 라구의 뒤편으로 미끄러지는 모양새에서, 그녀가 클로에와 데메트리안의 존재를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후작을 배신한 쥐새끼가 너였어?”
“엄밀히 말하면 배신한 건 너지.”
“내가? 뭘? 날 믿은 사람이 있나?”
“우리 마법사로 서품받을 때 맹세했잖아. 우리는 어느 권력에도 매이면 안 된다고.”
알프레다가 짧게 코웃음 쳤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주의를 끌기 위해 대충 뱉은 말이었으니까. 실제로 그런 조항이 있고, 역시 실제로 제국 연방 내의 모든 가문에서 마법사를 개인적으로 소유하지 못하지만…….
“매이다니? 나는 그냥 첫눈에 반한 상대에게 마음을 바친 것밖에 없어. 오히려 네가 길드 안 통하고 손님 받아서 과도하게 편의 봐주는 거 아니고?”
이리 나올 것을 알았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할 얘기가 있어.”
그리 말하며, 라구가 성큼 걸어서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절묘한 위치 선정 덕에 알프레다가 클로에와 데메트리안이 숨은 쪽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알다시피 나는 오리포네 생선가게 촌놈이라 돈밖에 몰라. 아무리 생각해도 네게 신성력 전환 장치를 공짜로 만들어 준 게 억울해서 말이지.”
“이제 와서?”
벌써 한 달도 더 전의 일이었다. 라구는 알프레다와 함께 이 공간에서 떠나, 클로에와 데메트리안이 피신할 수 있게 하고자 정말로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때 인지 굴절 술식 알려줬잖아?”
“그 마도구는 내가 갖고 있는데, 너는 후작한테 넘겼다며.”
“나한테 준 건데 내가 어찌 처분하든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내 제안으로 연구한 거니까 내 지분도 있는 거 아냐?”
“어쨌든 개발한 건 나잖아?”
아웅다웅, 십 년도 더 전부터 마탑에서 함께 수학한 두 동기는 억지스러운 말로 말다툼을 벌였다. 그러는 바람에 알프레다가 두 사람의 존재를 잊은 듯도 했다.
“아무튼, 후작이랑 담판을 지으려고 그 사람들에게 협력한 척한 거야.”
“뭐라고?”
“됐고, 앞장서.”
그리 말하며 라구가 문가를 턱짓했다. 알프레다는 눈매를 좁히며 그 모양새를 한참 뜯어보았다.
‘흐음, 그 냉혈한을 골탕 먹일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적당히 놀아나 줘 볼까. 함정에 걸린 척해서, 제 아가씨 가슴에 대못 박는 인간 벌 한번 줘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그래, 네가 마력이 떨어져서 봐주는 거야.”
그러고서 그를 이끌고 복도로 빠져나가자마자, 알프레다는 아무리 그래도 작은 보험 하나 들어 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잠깐만.”
라구를 앞장세우고서 지팡이를 휘둘렀다. 누가 봐도 마법을 쓰는 모양새였다.
‘……젠장.’
순식간의 일이었다. 나름 배신자 콘셉트로 혼신의 연기를 펼친 라구는 거기에 대처할 수 있는 순발력이 없었다.
‘아까 알려드렸으니, 부디 어떻게든 파훼해 보시기를.’
***
“……갔다.”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을 때.
데메트리안이 재빨리 문 쪽으로 고개를 빼어 그들이 사라진 복도를 살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이미 인기척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편 끝도, 저편 끝도 어둠에 푹 잠긴 채였다.
안전을 확인한 그는 재빨리 클로에에게 손짓했다.
두 사람이 조심스레 복도로 발을 내디디자, 평소 쓰는 길이 따로 정해져 있는지 한쪽 방면에만 램프가 켜져 있었다.
“이쪽인가 봐.”
클로에가 불빛이 켜진 쪽을 가리키자 데메트리안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가 처음에 살폈을 때는 어디에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지만…… 그걸 인지하기 힘든 것부터가 환영 마법이었다.
일자로 된 복도는 중간에 다른 곳으로 빠지는 문이나 통로 하나 없이 길게 뻗어 있었다.
“혹시 누가 매복 중인 건 아닐까?”
“글쎄……. 후작저에 남은 병력이라 봐야 스칸다르 기사단이 다일 텐데, 그들은 바깥에 있으니까.”
그리 대꾸하며 데메트리안은 각 손에 쥔 검과 클로에의 어깨를 바투 잡았다.
“하긴, 비밀 계단부터가 제국에는 없는 거니까, 우리가 내려오리라고 생각지 못했을 거야.”
“……그런데도 혹시 모르니 마법사를 보낸 걸테고.”
스칸다르의 비밀 통로에 대해 클로에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금 마음이 아려, 데메트리안은 간신히 대꾸했다.
“근데, 아까 짝사랑 얘기는 뭘까? 그 아가씨라는 사람이……”
“알레지오 영애겠지. 말레카에서 지낸 적이 있다고 하더라고.”
“꽤 특이한 사람 같았어. 마법사들은 다 그런가?”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두 사람은 숨죽이고 있는 동안 내지 못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입에 올렸다.
그러던 중 클로에의 시선이 복도 끝에 닿았다.
“저 끝에 방이 있나 봐.”
밝은 공간으로 이어지는 듯, 어슴푸레한 빛이 비치는 것이었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발걸음을 재촉해, 그 문구멍 곁으로 다가갔다.
숨죽여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때.
하하하, 한 남성의 웃음소리가 났다.
클로에가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