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어제와도 내일과도 같지 않도록 (10)
눈 깜짝할 새였다. 당황한 데메트리안은 허겁지겁 클로에를 따라 그 안으로 들어갔다. 라구도 타일이 닫히기 전에 간신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 아래 있는 짧은 사다리를 타고서 내려가니 넓은 공간으로 이어졌다. 누구나 허리를 펴고 설 수 있을 만큼 높은, 2에트 정도 되는 높이의 작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이어지는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그 계단은 한 사람 간신히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았다. 그 양옆의 단단한 돌벽에는 횃불 하나 달려 있지 않아 마치 아득한 심연 같았다. 저 아래에서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듯, 희미한 불빛이 비칠 뿐.
“혼자 막 가고 그러면 어떡해.”
“네가 따라올 건데, 뭐.”
“…….”
그건, 맞는 말이지. 수긍해버린 데메트리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 맞다.”
갑작스레 생각난 듯, 클로에는 허리에 찬 작은 가방을 뒤적였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 나온 것은 통신구였다. 데메트리안과 나눠 가진 것을 챙겨 온 거였다.
“경, 이런 지하에서도 틀림없이 되는 거겠지?”
“그럼요. 여기 마법 차단이 되어 있는 것 같지도 않고요.”
클로에가 미라벨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는 것 같으니, 그 잠시라도 쉬고자 라구가 계단에 걸터앉으며 답했다.
안심한 클로에는 버튼을 눌러 통신구를 작동시켰다.
“라비, 우리 지금 지하로 내려와 있어. 지도에서 보면 뒷문 오른편에 손님방 구역 있었잖아? 그쪽 복도에 와 보면 데미가 처리……해 놓은 기사들이 있을 거야. 도망쳤더라도 흔적이 있겠지. 거기서 바로 오른쪽에 있는 문으로 들어오면 가구가 하나도 없는 빈방이 나오는데…….”
뒤이어 클로에는 거기서 어떻게 해야 지금 이 계단으로 향할 수 있는지 설명했다. 그들이 합류하건 안 하건, 위치는 알려 놓아야 했으니까.
“라비가 잘 찾겠지? 가로로 세로로 몇 번짼지 세어 놨어야 했는데.”
“네가 잘 설명했으니 알아들을 거야.”
클로에가 통신구를 가방에 집어넣으며 하는 말에, 데메트리안이 그녀의 어깨를 도닥이며 대꾸했다.
“그럼, 내려가 볼까?”
“경, 미안하지만…….”
두 사람은 슬며시 라구를 보았다. 저 아래 어슴푸레한 출구까지 어두컴컴하여, 라구 스스로도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이 정도는 사실 거뜬하죠. 그러려고 쉬어 둔걸요…….”
그리 큰소리친 라구는 아까 빈방에 들어섰을 때처럼 빛 마법을 써서 주변을 밝혔다. 마력 탐지기는 데메트리안이 진즉에 꺼 놓은 채였다.
일행은 천천히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석조로 된 계단은 만든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지, 그 모서리의 각이 예리했다. 많이 닳았더라면 자칫 미끄러질까 긴장해야 할 텐데, 다행이라 생각하며 클로에는 앞선 데메트리안의 양어깨를 꾹 쥐었다.
숨죽여 발을 내딛는 세 사람의 발소리가 그 기나긴 통로를 얼마나 울렸을까.
마침내 그들은 몇 계단을 남겨두고서 출구 가까이에 다다랐다. 라구가 재빨리 빛 마법을 거두었다.
“잠시만 있어 보세요.”
그리 말한 그는 출구가 있는 쪽 벽에 손을 대고서 마력을 흘려 넣었다. 잔뜩 좁혀진 그의 미간에 주름이 움찔댈 무렵.
“일단 알프레다도, 마법진 같은 것도 없고요. 마나의 대류로 봐서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인 것 같아요.”
마력으로 감지해서 그런 것도 알 수 있나?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클로에와 데메트리안에게는 낯선 이야기였지만, 어쨌든 라구의 말에 두 사람은 짤막하게 안심했다.
“그럼 잠시.”
“네.”
데메트리안이 선두에 서 있던 라구와 자리를 바꾸고는, 나머지 계단을 훌쩍 뛰어 내려가 출구 옆에 바싹 붙었다. 그러고는 슬며시 고개를 빼어, 문이 따로 달려 있지 않은 문구멍 너머로 바깥의 동향을 살펴보았다.
창고처럼 되어 있는 곳이었다. 반대편에도 문구멍이 나 있었는데, 두 문이 이어지는 통로 양옆으로는 목재로 된 상자가 이것저것 쌓여 있었다.
데메트리안은 주머니를 뒤적여, 조약돌 하나를 안으로 툭, 던졌다. 이럴 경우를 위해 들고 온 거였다.
툭, 톡, 택, 틱, 톡.
몇 번 돌바닥 튀는 소리를 내며 구른 그 조약돌이 멈추고도 얼마간, 일행은 숨죽여 그 문구멍 너머에 신경을 쏟았다. 라구는 라구대로 그편의 동향을 감지했다.
마력으로 감지하기에도, 그들이 듣거나 보기에도 그 창고 안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데메트리안이 짧게 손짓하여 클로에를 제 쪽으로 불렀다. 그녀가 답삭 그에게 가까이 오자, 데메트리안은 제 어깨 아래로 클로에를 바싹 붙였다.
“가자.”
데메트리안은 훌쩍 문구멍 안으로 들어섰다. 클로에도 까치발을 하고서 폴짝폴짝 뛰어 그의 걸음에 맞췄다. 두 사람은 그대로 크고 작은 나무 상자들이 제각각으로 쌓여 있는 사이로 숨어들었다.
상자들을 건드리지 않고서 지나기 위해 데메트리안은 클로에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몸을 옹송그려야만 했다. 무의식적으로 그리 밀착하는 것이, 마치 클로에를 가장 안전한 곳에 두고자 하는 그의 다짐과도 같았다.
그렇게 몇 걸음을 지나, 반대편 문에서 가장 가까운 벽면에 붙어 섰을 때. 데메트리안의 가슴 정도 높이로 쌓여 있는 상자들 아래로 몸을 숨기자, 그 문으로 누가 들어오더라도 잠시간은 시선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라구 또한 재빨리 창고 안으로 들어와, 발소리를 죽여 그쪽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제 어쩌지?”
클로에가 말했을 때, 라구가 이미 마력을 사용하여 벽 너머를 탐지하고 있었다.
“바깥은 아마 복도……인 것 같고요. 이 벽 너머로 1.5에트쯤 지나서 벽이 있는 걸 보니, 복도의 폭이 그 정도 되는 것 같네요.”
제 손끝에서 흘러나가는 마력의 감각에 집중하려는 듯 눈을 감고서 라구가 읊조렸다. 계속해서 공간을 탐지하느라 예상치 못한 양의 마력을 쓰게 되어서인지 그의 낯이 일견 창백하게 보였다.
“마법진은…… 잘 모르겠고, 알프레다도.”
거기까지 말한 라구가, 멈칫했다.
“어, 안 되는데.”
그리 말했을 때, 그 문구멍 너머에서 인기척이 났다.
라구의 얼굴이 더욱 희게 질렸다. 그걸 확인한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지나가라, 지나가라, 지나가라…….
클로에가 속으로 그리 간절히 되뇔 때, 그녀를 최대한 숨기려는 듯 데메트리안의 팔에는 힘이 뻣뻣이 들어갔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울렸다. 경쾌한 리듬이었다.
아쉽게도, 그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우리 아가씨께서 가 보라시기에 왔는데, 정말로 쥐새끼가 있으려나아?”
다갈색 긴 머리 아래로 로브를 갖춰 입은 여인, 알프레다였다.
***
알레지오 후작가 정문의 경비 초소. 요즘따라 적막한 후작저를 지키는 경비병 두 사람은 연달아 하품을 했다.
주인 가족께서 제도의 사교계와 담쌓으셔서, 원래도 손님 없는 곳이긴 했다. 그런데 요 얼마간 사용인들에게 전에 없이 여름휴가까지 주시는 바람에 더더욱 조용하기 그지없어진 차였다.
“하필 경비병으로 취직했을 게 뭐야? 마구간지기였더라면 나도 휴가 갔을 텐데.”
혼자 휴가 가서 미안하다며 느물대던 마구간지기의 낯짝을 떠올리며 경비병 하나가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다른 경비병이 그에 맞장구쳤다.
“사병 나리들도 후작님 측근 빼고는 다 휴가 간 모양이던데, 어쩌다 우린 이런 신세가 됐나 몰라.”
그렇게 말하고는 설은 잠이라도 청할까, 등 뒤의 벽에 기대고는 눈을 슬며시 감았을 무렵.
무언가 싸한 느낌이 있어 눈을 슬쩍 떠 보았더니.
“으아구머니야!”
괴랄한 비명을 지른 그는 그대로 다리가 풀려 자빠질 뻔했다.
“혀, 혀, 형님! 저기 보십쇼!”
“누누, 누구냐!”
후작저에서 시내로 이어지는 오솔길에 새하얀 인영이 있었다. 침엽수림의 어둑함 한가운데서 그 존재는 더욱 강렬하게 빛나는 듯했다.
두 경비병은 급한 대로 들고 있던 창을 상대를 향해 빼 들었다. 그 사이에 쇠창살로 된 정문이 있었지만, 그걸로는 안심할 수 없으리만치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꿀꺽,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 하얀 존재가 어느덧 가까이 다가왔기에 뜯어보니,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형님이라 불린 경비병이 저도 모르게 창을 쥔 손을 늦추고 눈을 비볐다.
“사제……인 건가?”
그 사제는 경비들이 저를 향해 창을 치켜들고 있는 것에 별 감흥이 없는 것처럼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계속해서 다가왔다. 창살을 사이에 두고서, 서로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을 무렵.
마치 피레사의 현신처럼 짙은 금빛의 고수머리를 목덜미까지 기른 그 사제는, 붉은 입술을 움직여 목소리를 냈다.
“내가 들어갈 수 있겠느냐.”
고저가 없는 그 목소리는 퍽 생경하게 울렸다. 어딘가 뒷골을 쭈뼛하게 만드는 울림이었다.
“들어가기는, 무슨,”
“후작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경비원들은 저도 모르게 잠금쇠를 풀고 있었다.
***
“아니, 바닥을 두드려 보면 딱 느끼기에 울리는 데가 있다고? 이게 무슨 소리야.”
클로에의 전언을 들은 미라벨이 황당하다는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마침 저택으로 돌입하자마자 통신구가 울리기에, 옳다구나 하고 받은 것이었는데.
“바닥 말입니까?”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대요. 그쪽으로 후작이 도망쳤다고. 저쪽 방 어디가 가구 하나 없이 텅 비어 있는데, 거기 타일을 발로 구르라나 뭐라나.”
미라벨의 목소리에서는 황당함이 가시지 않았다. 제 젖자매가 허튼소릴 한 건 아니겠지만, 바닥에 비밀 통로를 만드는 양식이 스칸다르에만 있는 만큼 이상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아까 그 농브르 양반께서 이 저택 지하를 공사했단 정보를 얻으셨다더니, 아귀가 맞네요.”
“……그렇긴 하지만요.”
미라벨은 마뜩잖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클로에가 지시한 방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말 말한 대로, 손님방이 있는 구역에 검을 못 쥐게 된 채로 쓰러져 있는 기사들이 여럿 있었던 것이었다.
“스칸다르 사람들이 아니에요.”
“사병들 휴가를 줬다더니, 일부는 남겨 두었었나 봅니다.”
으으, 끄으으…… 상처를 간신히 부여잡고서 바닥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그들을 보니, 그들을 그리 만들었을 제 일행이 지나간 지 그리 오래지 않은 듯했다.
‘지하로 내려가자마자 연락했나 보구나.’
기사들은 살기 등등한 눈을 홉뜨고서 침입자들을 노려보았다. 팔을 못 쓰게 되었으니 데메트리안이 멀리 버려둔 검을 회수할 생각도 없었는지, 다들 아무런 무기도 갖고 있지 않은 채였다.
“증인 여러분은 잠깐 편히 쉬고 계시고요.”
미라벨과 파이겐은 날래게 그들 하나하나를 손날치기로 기절시켰다.
일종의 기습에 몸을 피하지도 못한 기사들은 순순히 기절했다.
“그런데 여기, 좀 이상한 냄새 나지 않아요?”
미라벨의 말에 파이겐이 덩달아 킁킁대었다. 끄응, 그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슈바츠 거리에서 작전 펼쳤을 때 나던 냄새 같은데.”
“그 건물에서 난 냄새라면……”
“네, 그 환각제 냄새 말입니다.”
그 말에 미라벨이 눈썹을 크게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