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어제와도 내일과도 같지 않도록 (9)
그때 나타난 것이, 농브르의 사내들이었다.
“우선 그쪽만 맡아!”
일전의 중년인이 친근한 어투로 외쳤다.
저택의 담장 양옆에서 날듯이 침입해 들어온 농브르의 사내들은 총 열 명. 그들이 다섯 명씩 나누어 새로이 등장한 소대를 하나씩 맡자, 순식간에 상대할 인원이 3분의 1로 줄었다.
그렇게 부담을 던 미라벨과 파이겐이, 요 얼마간 마주칠 때면 연습해 온 대로 합을 맞춰 차근차근 첫 소대를 다 쓰러뜨린 것이었다.
“예전에 아티장 지구에서 아가씨 실력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진짜로 같이 싸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모시는 분들이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걸, 어쩔 수 없죠.”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라.
‘로이가 다쳤을 때 생각을 하면…….’
그 정도면 앞으로도 클로에와 붙어 있을 자격을 줘도 될 것 같고, 그러면 저도…… 조금 즐거운 미래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미라벨은 파이겐을 슬쩍 한번 쳐다보았다.
저와 비슷한 앞날을 생각한 걸까, 그의 시선 또한 미라벨에게 닿아 있었다.
스칸다르에 가는 것보다야, 이 아저씨랑 대련하고 사는 게 훨씬 재밌겠지. 미라벨이 생긋 웃었다.
짧은 휴식 덕에 고른 숨을 쉬던 파이겐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졌다.
“저, 그……”
“이제 갈까요?”
미라벨은 아무 눈치도 못 챈 것처럼, 농브르가 다른 기사들을 상대하고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전투는 쾌속이었다.
파이겐이 제 거구를 사용하여 바로 앞의 기사들을 상대하는 사이, 미라벨이 다른 쪽에서 달려드는 이들을 차례로 해치웠다. 멀리 뒤쪽에 있는 이들은 자객이 본업인 농브르의 단원들이 표창이나 마비 침을 날려 제압했다.
맨 처음 전투가 시작된 이후로 반 시간쯤 지났을까.
어느새 알레지오 후작저의 뒷마당에는 죽었거나 기절했거나, 혹은 다른 방법으로 전투 불능이 된 스칸다르의 기사들이 가득 찼다.
희미한 달빛이 비치는 어스름한 뒷마당에는 잠시 고요가 깔렸다.
“역시, 와 줄 줄 알았어요.”
농브르들이 적수들 중에 제압된 척하는 자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하고 있을 때, 미라벨이 그들 쪽으로 다가서며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친구를 대하는 마음 반, 아무리 작전을 따른 데다가 라구까지 붙였다지만 클로에를 데메트리안에게만 맡겨 둔 것이 혼날 거리임을 아는 마음 반이었다.
“부인께서 로이 경호하라고 단단히 일러두셨나 봐요.”
“또 도움받았습니다.”
그녀의 바로 뒤에 따라붙은 파이겐까지.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중년인, 그러니까 변장한 누아제트 남작부인이 얼마간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단순히 대련하는 동료 정도가 아닌가? 생각보다 더 친해 보이는데…….
‘뭐, 그런 건 나중에 가 봐야 알 일.’
그녀는 훗날 미라벨이 데려올 사내가 누구일지 아주 잠깐 궁금해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대꾸했다.
“두 가문에서 주시하라 의뢰하신 바가 동일하기도 했고, 뭐, 다른 이유도 있고.”
그리 말하는 남작부인의 시선은 그녀의 딸을 향해 있었다. 변장하고 있을 때면 늘 켜놓는 환영 마도구 때문에 미라벨이 그 시선을 인지하지는 못하였지만.
“마비된 자가 다섯 명, 기절한 자가 여덟 명, 부상으로 못 움직이는 자가 열세 명입니다.”
“나머지는 다 숨이 끊어졌습니다.”
“흠……. 일단 우리가 여기서 이들을 감시하고 있겠소.”
단원들의 보고를 받은 남작부인이 미라벨과 파이겐에게 말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하, 많기도 하네요.”
“혹시 크레벨 기사단에서 연행하러 온다거나.”
“담장 밖에서 대기 중인 이들이 있기야 한데…….”
“그게 다라고?”
남작부인은 깜짝 놀라 제 말투 그대로 외쳤다. 애매한 기시감에 미라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작저로 돌입할 무렵에 저택 밖에서 대기 중인 크레벨의 기사 네댓을 보기야 했다. 데메트리안이 인신매매단을 추적하며 쓴 인원이 스물인 것에 비하면 퍽 적은 숫자여서, 아직 다 도착하지 않았나 했던 차였는데.
“나머지는 다른 쪽 일 때문에 멀리 가 있어서 말이죠. 뭐, 내부 일만 잘 끝나면 공자님께서 어떻게든 하시지 않겠습니까.”
“소공작이 황제의 나팔을 써 주셔야 경시청이 여기까지 들어올 텐데 말이오.”
수색령이 없다면 경시청 경비대는 귀족들의 사저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귀국한 것으로 외성의 제3기사단의 출입국 기록을 속여서, 제도 내에서 제국인을 공격했다. 그것만으로도 이 스칸다르 기사들의 죄가 엄중했다.
무엇보다 그들이 스칸다르 왕실의 기사단이기까지. 허투루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황실 기사단이라도 오는 게 좋을 텐데…….”
그리 말하며 남작부인이 제 발밑의 기절한 기사 하나를 툭, 찼다. 그의 흉갑에는 스칸다르 왕실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럼, 저희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 로이랑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으면 좀.”
“그전에, 이것을.”
미라벨이 제 죄를 이실직고한 찰나.
남작부인은 품을 뒤져 팔찌 하나를 꺼냈다. 농브르에서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사용하는 위치 추적 마도구였다.
“위급한 일이 발생하면, 여기 마정석을 세 번 두드리면 우리가 위치를 파악할 수 있소.”
제 딸의 재능과 청년 무사의 실력을 믿었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요즘 들어 부쩍 철든 듯이 구는 제 딸이 무모한 짓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남작부인은 팔찌를 직접 미라벨의 손목에 채워 주었다.
투박하게 가죽으로 된 팔찌의 버클 부분에 새까만 오닉스가 달려 있었다.
“걱정 마세요! 저택도 별로 안 커 보이는데, 이만큼 많은 수가 안에 잠복해 있진 않겠죠.”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저택 외부에 배치된 병력은 이들이 다긴 하오. 이 기사들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후작가 사병들에게도 대부분 휴가를 줬다고 하더군.”
“사용인들 눈에조차 띄면 안 될 중대 범죄를 저지른 이들답네요.”
미라벨이 사뭇 빈정대었다. 보통 사용인들은 주인들이 무슨 일을 하건 그 자리에 있도록 내버려 두는, 일종의 가구 같은 존재였으니까.
“뭐, 최소한의 분별은 있다고 칭찬해 줘야 할까요? 일단 들어갑시다.”
“잠깐.”
우두머리 중년인이 미라벨의 팔을 잡았다. 아까 팔찌를 채워 줄 때도 느꼈지만, 낯선 아저씨의 손길에 낯익은 느낌이 있었다.
“최근에 이 건물의 지하에 뭔가 공사를 했다는 제보가 있소.”
***
후작이 도망친 문을 열어젖혔을 때, 일행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게…… 뭐야?”
달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
손님방인 만큼 가구가 제대로 갖춰져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복도를 통해 들어온 빛으로도 그 정도를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라구가 재빨리 빛 마법을 써서 주변을 밝혔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던 가구가 생기는 일은 없었다.
“경, 불을 잠깐.”
라구가 기다렸다는 듯 빛을 거두자, 데메트리안이 마력 탐지 마도구를 꺼내 보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혹시 고장 났나 싶어서 껐다가 켜 보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바늘조차 미동도 없었다. 라구 또한 고장 난 데가 없음을 다시금 확인해 주었다.
“환영 마법도 아니고…….”
그리 중얼거리며 창가로 다가가 보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정원에는 인기척이 보이지 않았다.
커튼조차 달려 있지 않은 그 창문을 열어 바로 아래를 굽어보니 그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창문이 열렸던 것도 오래전의 일인 듯 그 경첩이 소름 끼치는 금속음을 내었고…….
“도대체 어디로 갔담.”
“혹시 마법사가 여기 숨어 있다가 같이 움직였을까?”
“아까 환영 마법 깨고서 탐지기를 계속 켜 두고 있었어. 어디서든 마법을 썼다면 울렸을 거야.”
“하긴…….”
대신전 지하의 보물고 앞에 있을 때, 그 탐지기가 대신전 뒤편의 숲에 디에크와 안톤미오노가 나타난 것을 감지했던 걸 떠올리며 클로에가 고개를 주억였다.
텅 빈 방, 느껴지지 않는 인기척.
분명 여길 떠나서 어딘가로 간 건데, 어떻게…….
“딱히 마력으로 움직이는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바닥과 벽을 더듬대며 마력을 흘려 넣어 본 라구가 제 소임을 다했다는 양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라구가 마력으로 탐지했다면, 데메트리안은 물리력을 행사해 보았다. 벽 여기저기를 주먹으로 쿵쿵 쳐 보았지만 별 소득이 없어, 그는 나지막이 이를 갈았다.
“땅으로 꺼진 것도 아니고…….”
쿵, 그의 주먹질이 조금 둔탁하게 벽을 울렸을 무렵.
“땅.”
클로에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땅이야!”
“땅이라고?”
데메트리안의 반문에도 아랑곳없이, 클로에는 부산스럽게 바닥의 타일을 하나하나 발로 굴러 보기 시작했다.
두 가지 색깔의 대리석을 이용해 격자무늬로 되어 있는 바닥은 제국에도 하고많은 것인데……. 클로에의 발짓을 바라보던 데메트리안의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타일 크기가 훨씬 커.’
제국의 타일이야 커 봐야 성인의 머리통 크기 정도. 여기에 깔린 타일은 그 사이즈가 몇 배는 되었다.
마치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스칸다르 왕궁에 이런 구조가 있었어.”
무언가 희한한 말을 들은 것 같았지만, 지친 라구는 개의치 않고 그저 제 동업자 영애님이 하시는 양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셰비크…… 말이지.”
큰손 소공작께서 그에 대해 아련하고도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시는 이유도 알지 못했다. 그저 제 마력이 얼마쯤 남았는지 가늠할 뿐이었다.
‘내부에서 알프레다가 환영 마법을 쓴다면 훨씬 좁은 범위에서 쓸 테니 퍽 복잡한 술식이겠지만, 반대로 그녀도 꽤 마력을 소비했을 테니…… 한두 번쯤은 거뜬히 파훼할 수 있겠지. 간단한 공격 마법은 네댓 번? 환영 마법 파훼하고 나면 마력이 얼마나 남을지.’
마탑 마법사들 중에서 보유한 마력량이 떨어지는 편도 아니었건만, 하룻밤 사이 이토록 다양한 종류의 마법을 쓰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내일부터 마력 단련 좀 다시 해야지.’
그가 내일이 되면 또 내일의 일이라며 미룰 다짐을 할 때였다.
“여기다.”
클로에가 뿌듯한 목소리로 제 일행들을 손짓했다. 라구는 최대한 체력을 비축하고픈 마음에 목만 쭈욱 빼었다.
“이게 뭔데?”
그녀가 ‘그 시절’에 알게 된 지식을 활용하는 것은, 아무래도 가슴 저미는 일이었지만……. 더 이상 그때의 후회에 얽매여 있지 않기로 했으니, 데메트리안은 애써 괜찮은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거기 왕궁이 아무래도 황궁보다는 작잖아. 그래서 공간 아낀다고, 왕실 보물고나 미술품 창고 같은 건 다 지하에 있거든.”
뷔욘이 그림이란 그저 보기에 아름다우면 된 것 아니겠냐며 사들인 풍경화들을 왕궁 갤러리에 몇 주 걸어 두었다가 지하 창고로 보낼 때도, 꼭 이런 방식을 이용했었다.
“여기 두드려 봐. 다른 데랑 느낌이 달라. 마치 아래가 비어 있는 것처럼.”
클로에의 말에, 데메트리안은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아까 클로에가 했던 것처럼 발을 굴러 보았다. 과연, 아래가 빈 것처럼 울리는 느낌이 났다.
“떨어져 있어 봐.”
클로에가 그를 라구 쪽으로 밀자 데메트리안은 순순히 물러났다. 이윽고 그 타일 위에 선 클로에가 그 타일과 접한 네 개의 타일을 한 번씩 꾸욱꾸욱 밟고는 옆으로 폴짝, 뛰어서 피했을 때.
쿠구구…… 바닥 울리는 소리가 나더니, 그 부분의 타일이 바닥 아래서 밀려 사라져 버렸다.
역시. 클로에의 낯에 뿌듯한 기색이 어렸다.
“서둘러. 아까 후작이 사라진 걸 보면 다시 닫히는 속도가 빠를 거야.”
“로이!”
그리 말하고서 클로에는 쏠랑 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