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어제와도 내일과도 같지 않도록 (8)
더 안쪽인지라 어두운 탓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서늘한 번쩍임이 비치는 것이, 다들 검을 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둘, 넷, 여섯…….”
수효를 세는 라구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차츰 눈에 더 깊은 어둠이 익어가고, 그래서 차츰 그 인영의 윤곽이 눈에 익을 무렵.
“……후작이야.”
선봉에 선 이를 알아본 클로에의 목소리가 떨렸다. 단 한 번, 라구를 만나러 알레지오 상점에 갔을 때 마주쳤던 바로 그 적갈색 머리칼의 신사였다.
“알레지오 후작이라고?”
“구면입니다, 영애. 초대하지 않은 귀빈 여러분께서 오신 덕에 제 손님들께서 퍽 두려움에 떨고 계셔서 말이죠.”
알레지오 후작의 말소리는 유들유들했다. 마치 저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알레지오의 상점에서 거래 중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수색령도 체포 영장도 없이 귀족의 사저에 들어오시다니. 원로원도 갈 데까지 간 모양이오.”
안면을 튼 적은 없어도 크레벨 후계자의 외관만은 확실히 알아본 알레지오 후작이 그의 신경을 긁으려는 듯이 내뱉었다.
데메트리안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서 코로 짧게 숨을 들이쉬어 보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로이, 마스크. 환각제 냄새야.”
“환각제?”
냄새를 좇으려는 듯 클로에가 킁킁대자, 데메트리안이 황급하게 뒤돌아 그녀의 코를 막았다.
“얼른. 여기 그 신관이 있잖아.”
환각제에 중독된 안톤미오노가 손님방 어딘가에 있을 거란 이야기였다.
아무리 데미가 요즘 유난스럽게 굴어도, 이 상황에서 쓸데없는 짓을 하라는 건 아니겠지, 클로에는 셔츠 아래 말아 두었던 마스크를 코 위에까지 끌어 올렸다. 중화 작용을 한다는 허브의 알싸한 향기가 코끝에 맴돌았다.
“라구 씨, 이렇게 내 저택에 침입하는 무뢰한들과 행동을 같이하시고. 길드에 섭섭해지려 하네.”
“마법사를 개인적인 용도로 고용할 수 없다는 법을 깬 건, 후작님 본인 아니신가요?”
라구의 목소리가 퍽 공격적으로 울렸다. 그리 말하며 재빨리 수인을 맺어 작은 결계를 쳤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하는 마법이었다.
“여기도 알프레다가 없어요. 방어 마법을 걸어 주고 갔대도 제가 해 볼 만할 겁니다.”
“혹시, 움직임을 봉쇄할 수 있는 마법은 어떤가?”
데메트리안이 재빨리 물었다. 그 말에서 조금 전 저들이 걸려들었던 환영 마법이 떠올랐지만, 다들 내색하지 않았다.
“그거라면 방어 마법이 있어도 소용 없겠네요. 오래 유지하기는 힘들지만요.”
“후작 빼고 다른 이들을 묶어 주면 좋겠어.”
“후작은 직접 상대하시게요?”
“엮어 넣을 일이 많아서.”
데메트리안이 후작의 처분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적당히 대꾸했을 때였다.
그때, 그들이 작전을 짜는 시간조차 벌어주지 않겠다는 양, 후작의 뒤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뛰쳐나왔다. 머리 색으로 보아 스칸다르인이 아니라 후작의 개인 사병인 듯했다.
“하아앗!”
다섯 명의 기사가 저마다 다양한 각도로 그들을 향해 튀어나왔을 때.
스릉, 검을 재빨리 뽑아 들며 데메트리안이 클로에를 제 뒤로 숨겼다. 클로에 또한 나름으로 허벅지에 찬 검대에 달린 단도를 한 손씩 쥐었다.
데메트리안의 옆에 서 있던 라구가 재빨리 손을 움직여 수인을 맺자, 허공에 크고 작은 마법진이 떠올라 기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큭!”
“허억!”
파르라니 빛나는 마법진에 닿은 기사들은 번개에 맞은 것처럼 펄쩍 뛰더니 그대로 굳어 버렸다. 으으, 으…… 그들의 목에 신음이 가랑가랑한 것이, 정신은 그대로인 모양이었다.
그들 너머에서 검을 겨누고 있는 알레지오 후작의 얼굴에 여유가 깨졌다.
“마법사가 괜찮을 거라고, 분명…….”
“제가 공격 마법은 알프레다랑 비슷한데, 다른 건 봐 줄 만해서 말이죠. 알프레다가 워낙에 다른 계열에 관심이 없어서.”
라구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다만 종일 이런저런 마법을 많이 써서인지 퍽 지친 기색이었다. 곰베르의 북극성 건물로 이동하는 마법진을 그릴 때부터 힘들어했으니, 이따금 이동하면서 기력을 충전했대도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멀리 떨어진 후작에게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을 터라, 라구는 짐짓 태평한 체를 계속 이어 갔다.
“최대 반 시간 정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 결계가 남아 있어, 목소리로나마 지친 기색을 한껏 뽐냈지만.
“응. 이야기 좀 하겠네.”
제 낯에서 라구의 상태를 짐작할 수 없도록 건조한 표정을 꾸미고서, 데메트리안이 말했다. 라구의 손이 짧게 움직이더니 무언가 공기가 트인 듯한 감각이 생겨났다.
데메트리안이 목소리를 높여 후작에게 외쳤다.
“황제의 나팔로 공을 체포하겠소.”
“하하, 황제의 나팔이 무고한 사람도 체포할 수 있는지는 몰랐소.”
그리 말하며 알레지오 후작이 검을 고쳐 잡았다. 제 사병들이 순식간에 전투 불능 상태가 된 데 대한 당황한 기색은 차마 지우지 못한 채였다. 그의 긴장감을 공유한 사병들이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낑낑대는 소리를 내었다.
“스칸다르의 왕자를 후원해 분리 독립파의 활동을 장려하고, 또 마법사를 사적으로 고용하여 구휼 기금의 탈취에 개입했지.”
“제국 아카데미에서는 로망스를 쓰는 법도 가르치나 보지?”
“이게 로망스인지 아닌지는, 법정에서 판단할 일이오.”
그리 말하며 데메트리안이 달려들기 위해 한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후작이 재빨리 몸을 돌려 바로 옆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거기 서요!”
쐐액- 탁.
놀란 클로에가 단도를 재빨리 던졌으나, 이미 방문 너머로 그가 신형을 숨긴 뒤였다. 굳은 기사들을 피해 방문 근처로 정확히 날아가 꽂힌 단도에, 데메트리안과 라구가 다소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해? 빨리 안 가고.”
“로이.”
“……아.”
그 성공에 들떴을까, 클로에가 급히 그를 따라가려 했을 때, 데메트리안이 라구를 눈짓했다.
마법을 유지하기 위해 라구가 계속 마력을 불어넣어야 했기에, 선뜻 자리를 벗어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잠깐 눈 좀 감고 뒤돌아 있어 봐.”
데메트리안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울려, 클로에는 영문도 묻지 못한 채 순순히 그가 말한 대로 했다. 그녀가 돌아서자마자.
으악! 큭……. 끄헉! 윽!
다양한 높낮이의 단말마가 복도를 가득 메웠다. 이윽고 절그럭, 여러 자루의 검이 바닥에 부딪는 소리가 났다.
“이제 가자.”
“으, 응.”
그의 손에 이끌려 따라가면서 스쳐 지나가는 광경은…… 라구의 마법에 당해 마비돼 있던 기사들이, 모두 검을 쥐었던 팔이나 어깨 부분이 베여 그곳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들의 검으로 추정되는 것들은 복도 끝으로 날아가 있었다.
덕분에 마법을 유지하지 않을 수 있게 된 라구가 자유롭게 그들을 따랐다. 다소 지친 기색이, 퍽 지친 기색이 되었지만…….
그의 안색을 걱정할 새도 없이, 세 사람은 후작이 사라진 방 안으로 들어섰다.
* * *
똑똑.
밤이 깊은 황궁 안. 모두가 잠든 적막 속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저, 황자님. 혹시…….”
“들어와.”
자정이 한참 넘은 시간이었다. 제 침실에서 근래 제도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고민하던 대니얼은, 방문을 두드린 시종이 잠을 깨울 것을 죄스러이 여기며 낸 목소리에 즉각 답했다.
“안 주무셨군요?”
“어쩌다 보니.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저, 마법사단장이 와서 말입니다.”
“……곧 가지.”
대니얼이 급히 제 응접실에 다다랐을 때, 응접실에 설치된 괘종시계에서 한 시 반을 알리는 소리가 났다.
황자궁은 물론이요 황궁 전체가 고즈넉하게 잠든 시간.
마법사단장은 응접실의 손님 자리에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이 발생한 건가?”
대니얼은, 낮에 데메트리안이 마법사단으로부터 마력 반응에 대해 보고받는 것을 보고서 곧바로 마법사단장을 찾았다.
데메트리안이 무엇을 숨긴다면 분명 거기에 어떤 이유가 있을 테니, 눈감아 줄 수 있었다. 대신 그가 입수하려는 정보를 한발 빨리 아는 것 정도면, 좋은 대가일 거였다.
“대규모 마력 반응이…… 조금 전 발생하긴 했습니다만.”
“순간 이동 마법인가?”
“그게 아니어서 말입니다. 그래도 상업 지구도 아니고 사저에서 이 정도의 대규모 반응이 감지된 건 정말 드문 일이어서, 어쨌든 보고드리려던 참입니다.”
데메트리안에게야 오늘 그랬듯 내일 서신을 보내겠지만, 대니얼에게는 그가 지시한 대로 밤낮 가리지 않고 달려온 참이었다.
“……그렇군. 그렇다면.”
“일종의 정신계 마법으로 추측되는데, 위치를 따져 보니 제도 서북쪽…… 정확히 말하면 알레지오 후작저가 자리한 곳이었습니다.”
“알레지오? 알레지오라…….”
또, 알레지오였다.
한밤중이어서 평소와 달리 빗어 넘기지 못한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대니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단단히 일어나고 있는 모양인데…….
그는 알레지오 후작가를 뒤엎겠다며 결의에 차 있던 제 친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가 알레지오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도 기실 한 달도 넘은 일이었고, 스칸다르 왕자의 일까지 결부하면 실로 의심이 절정에 달할 법도 한 건데…….
그는 지금 알레지오 후작저에서 일어나는 일에, 데메트리안이 깊게 얽혀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쩐다…….
팔걸이를 톡톡 치며 고민하던 그의 시선에, 마법사단장의 청렴한 낯이 걸렸다.
“혹시, 크레벨 소공작의 위치도 추적할 수 있겠는가?”
* * *
“아가씨! 조심!”
파이겐이 제게 달려드는 기사를 향해 그의 대검을 휘둘렀을 때, 그의 검로에 걸려 있던 미라벨이 훌쩍 뛰어올랐다. 크흑, 그 검로의 끝에서 오늘 밤 다섯 번째로 스칸다르의 기사가 전투 불능이 되었다.
그를 벤 자세 그대로 파이겐이 잠깐 멈춰서자, 훌쩍 날아올랐던 미라벨의 발이 가볍게 그의 검 위에서 굴렀다. 오래 연습한 듯, 제 검으로 미라벨의 무게를 받아내고도 파이겐은 조금도 휘청이지 않았다.
“고마워요!”
허공 높은 곳에 날아오른 미라벨은 공중제비를 돌면서 순식간에 한 기사의 뒤통수에 단도를 날린 뒤, 떨어지는 그대로 다른 기사의 목을 정강이로 얽어 그를 쓰러뜨렸다. 으드득, 목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이제 여섯 명!”
“방금 건 제가 도왔으니 반씩 둘 해서 하나로 칩시다.”
“뒤쪽요!”
잠시 농할 여유가 생겼다 싶었을 때, 뒤편에서 달려드는 기사가 있어 파이겐이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챙, 상대의 검을 손잡이 가까운 쪽으로 받아낸 바람에 금속음이 먹먹하게 울렸다.
이윽고 파이겐이 재차 검을 휘둘러 그를 쓰러뜨리면서 얼마간 정적이 흘렀다.
“휴, 육 대 육. 왜 얘들은 소대를 짝수로 편성해서.”
와중에도 미라벨이 승부를 내지 못해 안타깝다는 듯이 너스레를 떨었다.
파이겐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통에 손을 얹었다. 슬그머니, 그것이 쓰다듬는 형태를 취했을까.
“……뭐예요?”
“아, 그, 기특해서 말입니다.”
스물여덟 파이겐의 낯이 그의 머리칼만큼 붉게 물들었다. 그를 얼마간 노려본 미라벨은 짧게 코웃음 치고는, 여전히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조금 숨 돌리고, 저쪽에 가세하죠.”
“그럽시다.”
그들의 일행이 환영 결계를 부수겠다며 저택에 돌입하고서 얼마 뒤, 그들의 뒤편에서 스칸다르의 기사 한 소대가 나타나 그들을 에워쌌다. 다소 버겁지만 함께 종종 연습한 대로 하나씩 해치워 가고 있을 때.
“아가씨, 옆!”
“그쪽도요!”
어느새 저택의 양옆에서 한 소대씩, 총 두 소대가 다시금 나타나 그들을 에워쌌다.
열두 명씩으로 구성된 소대가 셋, 총 서른여섯 명. 몇 명은 이미 해치웠지만.
그리고 이쪽은 미라벨과 파이겐 단둘뿐.
‘이 아저씨들은 왜 안 와?’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 인원 차. 잠시간 전투가 멎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