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어제와도 내일과도 같지 않도록 (7)
호화롭게 장식된 방이었다. 장밋빛 실크 벽지는 금사로 수놓여 있었고, 방 곳곳을 장식한 마정석 램프 또한 모두 금으로 되어 있었다. 한쪽 벽면에 달린 거울에는 색색의 보석이 달려 있었고, 그 아래 자리한 장식장 위로는 대리석으로 된 입상立像을 금과 보석으로 장식한 촛대가 놓여 있었다.
시간은, 오후쯤일까. 역시 금으로 장식된 창틀 너머에서 기울어진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 양옆을 장식한 비단 커튼이 다소 톡톡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다른 계절인 듯했다.
까르르, 여인들의 웃는 소리가 났다.
그편으로 시선을 돌리자 다과회가 한창인 모양이었다.
그 옷차림들이 조금 낯선데…….
의아한 낯으로 그 상석에 있는 귀부인을 본 순간, 데메트리안은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귤빛 머리칼을 하나로 땋아 내리고, 북쪽 그 나라의 양식대로 얇은 로브를 여러 겹 꿰입은 제 아가씨. 그린 듯한 미소가 걸린 입가에서는 별다른 감정의 조짐이 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가 스물일곱이던 그 초봄에 셰비크의 왕궁에서 본 클로에의 모습이었다.
티테이블에는 스칸다르의 귀족으로 보이는 아녀자가 예닐곱 자리해서는, 상석에는 숫제 등을 돌리고서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여인들의 무시가 익숙한 양 스물넷의 클로에는 간신히 미소를 유지한 채 가만히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아무리 스칸다르가 제국의 예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라지만, 글쎄. 저런 취급이 상식적으로 가능할 리가 없는데.
역시 환영 마법이라서 별걸 다 보여주는 모양이었다.
‘라구 경이 파훼할 때까지만 기다리면…….’
진득이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데.
어째선지,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고작 환영인데.
환영일 텐데.
환영……일까?
제가 보고 있는 풍경이 환영이라 단정하고서 망연히 바라만 보고 있는 동안, 어쩌면 그녀는 일분일초씩 더 오래 불행해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제가 여기서 무엇을 어떻게…….
그리 생각할 때쯤, 마침 그녀의 낯에 체념이 깃들었다.
제가 아는 클로에 라크루아는, 저런 표정을 지을 줄 몰랐다. 스칸다르에 가지 않을 방법을 찾아달라며 마지막으로 그를 찾아왔던 날조차도 그녀의 낯에는 절박한 간구가 떠올랐지, 저러한 체념과 침울함이 자리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정말로 셰비크에서…….
그가 목구멍에 울컥이는 것을 끕끕 눌러 삼킬 무렵.
‘넌 항상 그런 식이었어. 모든 경우의 수를 다 혼자 생각해 놓고,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야 움직이는 거.’
갑작스레 떠오른 어느 날의 말소리, 그 눈동자에 일렁이던 분노와 실망감, 결국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
그 모든 기시감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메웠다.
저건 환영일 뿐일 텐데.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내디디려던 순간, 그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뭐지?’
장면은 어느샌가 그의 기억 속 다른 장소, 셰비크의 알현실로 전환되었다.
어느샌가 그는 그녀로부터 아득히 멀어져 있었다.
그의 자리는 알현실 바깥.
‘아, 그때인가.’
동대륙을 드나드는 상인의 호위 무사로 변장하여 클로에를 몰래 보러 간 상황인 모양이었다.
그 문을 경계로 들어서지도 못하고 반대로 그 자리를 쉬이 떠나지도 못한 채, 그는 하릴없이 그렇게 붙박여 있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클로에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가 아는 그녀의 생기 넘치는 표정을 조금도 띠지 못하고서, 그 나라의 전통 의복을 그림처럼 차려입고 있는 모습…….
그걸 한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는 새 뺨을 타고 흘러 뚝뚝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아, 이게 뭐지.
‘그날 분명 복면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 다 스며들 테니 이럴 리가 없는데.
그리 태평하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그의 가슴은 착실하게 더 깊이 죄어들고 있었다.
그녀에게 다른 표정을 선사하기 위해 뛰쳐 나아갈 용기도, 그렇다고 해서 그걸 외면할 방법도 없는 그 순간.
시야가 울렁이더니, 대번에 어둑해졌다.
호화로운 셰비크의 알현실이 있던 자리엔 어느새 심연과도 같은 어둠만이 남아 있었다.
‘로이, 어디 갔지…….’
눈을 깜빡여 시야를 흐리던 것을 떨구니, 어렴풋이 형태를 갖춘 건 깊은 복도였다.
채챙, 챙, 챙! 건물 바깥에서 검신끼리 부딪는 금속음이 울려왔다.
어둑한 밤, 어스름한 달빛, 어느 건물의 실내.
아, 그러니까.
“데미, 괜찮아?”
제 손을 흔드는 움직임이 있어 내려다보니, 스무 살의 클로에가 걱정스러운 낯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뒤통수에서 하나로 묶은 머리칼을 쫑쫑 땋아 내려서는, 로브 아래로는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차림새를 한 제 아가씨.
환영 속에서 그가 봤던 그 모습보다 조금 앳되고, 그린 듯한 미소를 짓고 있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제 손이 닿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데메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양어깨를 잡아 제 편으로 돌려세웠다.
“데미?”
‘다른데. 이렇게 다른데…….’
자칫하면 놓칠세라 그녀의 어깨를 쥔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갔을까.
제 얼굴이며 몸이며, 어디 하나라도 잘못된 데가 없는지 꼼꼼히 살피는 그의 시선이 자못 매서워, 클로에는 당황스러운 마음이 되었다.
“……데미, 울어?”
“아, 그게, 저, 아니.”
그녀의 말에 놀란 데메트리안은 황급히 제 얼굴을 쓸었다. 손바닥에 물기가 진득이 배어났다.
그의 얼빠진 표정을 바라보는 클로에의 고개가 살포시 기울어졌다.
무슨 환영을 본 걸까. 제 경우에는……
“알프레다는 더 안쪽으로 들어간 모양이에요.”
아쉽게도요. 갑작스레 달려드는 라구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상념을 털어 내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보다 조금 앞쪽에 서 있는 라구는 저택 안쪽의 어둠을 기민하게 살피고 있었다. 클로에가 잡았던 손은 떨어진 지 오래였다.
아, 그게 또 다행일까. 아니, 그게 왜 다행이야?
무언가 경황이 없어 보이는 데메트리안 대신 클로에가 그에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원래 계획대로 경은 우리랑 들어가 보면 되겠군.”
“네. 저 두 분은…….”
라구의 시선을 따라 두 사람이 뒤를 돌아보니, 창밖에서 미라벨과 파이겐이 저들에게 달려들고 있는 기사들과 분전 중이었다.
머리칼이 모두 밝은 금발이거나 연둣빛인 것이, 인신매매로 납치한 이들을 대신 보내고 고티유에 남았다던 그 기사들인 듯했다.
지금까지 그들이 머리 색을 가리기 위해 두건을 꼼꼼히 썼던 걸 생각하면, 지금은 상대를 모두 처리하여 목격자를 없애겠다는 심산인 모양이었다.
그게 실제로 행해질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하아앗, 건물 밖에서 파이겐의 기합 소리가 나더니 그의 앞으로 달려든 기사 두 사람이 나동그라졌다. 그의 거구를 방패 삼아 미라벨이 민첩하게 단도를 날렸다.
합이 괜찮네? 그걸 보며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데메트리안과 함께할 때마다 같이 대련하느니 어쩌느니 하더니, 연습이라도 한 모양이지. 오늘따라 친근한 티가 나던 두 사람을 떠올리며 클로에는 라구에게 답했다.
“응, 괜찮을 걸세. 곧 농브르에서도 올 거고…….”
클로에의 목소리가 제 젖자매와 유모의 동료들에 대한 신뢰를 담아 단호하게 울렸다.
거기서 시선을 뗀 클로에가 라구를 따라 손님방 구역이 자리한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어딘가 멍한 기색의 데메트리안의 팔뚝을 꼭 붙든 채였다.
“경이 마법을 깬 거지?”
“예에, 생각보다 복잡해서 조금 오래 걸렸네요.”
조금 오래, 그 말에 데메트리안은 헛헛하게 웃었다. 그 모든 순간이 그에게 천년과도 같이 느껴졌으니 오래인 것은 맞았으니까.
“재밌는 술식이었어요. 알프레다가 좀 낭만적인 구석이 있는 건 알았는데.”
라구가 무언가를 회상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걸 낭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제 손에 묻어난 물기를 옷자락에 닦아내는 데메트리안이 짧은 웃음을 내뱉었다.
“더 이상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게 목표잖아요? 그래서인지 발을 묶어두도록, 시선을 뗄 수 없이 안타까운 무언가……를 머릿속에서 불러내는 거더라고요.”
“아하, 그래서…….”
클로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환영 마법을 통해 본 것을 곱씹는지, 그 눈빛이 꿈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데메트리안은, 그녀가 도대체 무슨 환상을 봤는지 궁금했지만…… 그때, 클로에의 눈동자가 왈칵 제 편을 향했다.
그는 환영 마법이 깨진 순간 제가 어떤 꼴을 하고 있었는지 떠올라 낯을 붉히고 말았다. 공간이 어두웠대도 대충 다 알아챈 모양이었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낯을 바라보는 클로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진짜로 나랑 연관된 뭔가를 본 모양이네.’
그답지 않은 극적인 표정 변화에 클로에가 피식 웃었다. 그를 곤란하게 하고픈 마음에 한참 동안 그를 쳐다보자니,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그래서 울기까지 하셨고. 그 데메트리안 크레벨이.’
저에 관한 것에 허둥대는 그의 모습이 자못 만족스러웠다.
이 긴박한 와중에도 그런 느낌을 갖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클로에는 그런 적 없다는 듯, 라구에게로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그럼 경은? 어떤 내용이 나왔는데?”
그녀의 시선을 열없이 받아들이고 있던 데메트리안은 놀림 받은 심정이 되었다.
이 아가씨를, 정말.
“저요? 저는…… 뭐, 어릴 때 제 모습이 나왔는데요.”
무언가를 곰곰 생각하는 듯 라구가 입술을 쫑긋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환영 속에 나타난 대상은 어린 시절의 저 자신이었다. 오리포네의 커다란 어촌에서 목 좋은 곳에 자리한 생선 가게 주인인 부모님은…… 걸핏하면 그를 때렸다.
빠릿빠릿하지 못하다거나, 주의가 산만하다거나 등등 가게의 일과 관련되었으나 열 살짜리 어린아이한테는 하등 중요치 않은 이유로 말이었다.
그가 마력을 발현하여 마탑에 들어가고 나니 빠릿빠릿하지 못하다는 점은 연구에 있어 진중하고 꼼꼼하게 임한다는 장점이 되었고, 산만하다는 점은 마탑의 다양한 분야에 폭넓게 관심을 갖고 흡수한다는 특성이 되었다.
‘뭐, 그런 시시콜콜한 건 중요하지 않고.’
평소 라구의 말버릇으로 인해 진저리 친 이들이라면 그가 말을 아끼는 것도 있다는 사실에 놀랄 테지만, 어쨌든 라구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환영 마법을 깨는 데 가장 중요한 건, 그게 환영이란 걸 기억하는 거예요.”
라구의 말에 데메트리안이 어딘가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야 있었고, 기억하고야 있었지만…….
“환영이다 보니 현실과는 분명히 다른 부분이 있어요. 내 기억을 갖고서 만들어내는 상이지만, 무의식과 실제는 어떻게든 다르거든요. 그쪽이 현실과 환영의 경계니, 거기를 공략하면 돼요.”
“공략?”
“예를 들어, 제 경우에는…… 아버지가 왼손잡이신데, 오른손잡이로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그 손이 있는 공간에 마법을 써서 마력이 역으로 돌아 나가게 했어요.”
그를 때릴 때 쳐들던 손이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이었으니까. 수백 번을 본 잔상도 무의식이 빚어낸 환영 속에서 다르게 나오는 것이, 퍽 다행인 일이었다.
“역으로 돌아 나간다고?”
“거울이 빛을 반사하는 것과 같은 원리죠. 그곳에 다른 사람의 마력을 불어넣어서 시전자의 마력을 쳐내는 거예요.”
“어쨌든 마법사를 놓치고 말았으니……. 또 결계에 안 걸린다는 보장이 없으니, 그 마법사를 제압할 때까지 경이랑 같이 다녀야겠군.”
그의 말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클로에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처럼 복잡하게 된 술식만 아니라면 마정석 정도로도 괜찮을 거예요.”
“마법사의 위치가 문젠데. 바깥에는 기사들만 보낸 것 같으니, 성배를 지키는 자들에게 따라붙으러 움직였겠……”
“쉿.”
클로에의 말을 끊고서, 갑작스레 데메트리안이 클로에를 제 등 뒤로 당겼다. 그 소리를 들은 라구도 멈칫했다.
손님방으로 이어지는 중문 너머로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는 듯한 뭉텅이의 그림자가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