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어제와도 내일과도 같지 않도록 (4)
“저어…….”
그치고는 퍽 공손한 목소리로, 루카미오노는 간밤 내내 입안에 굴렸던 문장을 자아냈다.
“간밤에 안톤미오노 형제가…… 교단을 떠났습니다.”
이미 아시는 듯하지만요, 루카미오노는 부러 너스레 떨듯 덧붙였다. 마음이야 참담했으나 이 이른 아침에 대신관을 찾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와 퍽 안 어울리는 태도이기 때문이었다.
“보물고에서 캄포의 성배를 탈취해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환각제에 중독되어 사주를 받은 듯하고요.”
생전 하지 않던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며 멋쩍어하는 어린 후계자의 낯을, 대신관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쩌다 주신의 축복을 한껏 받아 막대한 신성력을 타고났지만, 무엇이 제 사명인지도 모르는 망아지였다. 인자하신 에르드 어머니께서 그를 길들이고자 벌이시는 일은 아니겠으나 그녀의 어린 후계자에게 퍽 좋은 교훈을 줄 수도 있는 법.
모든 것을 주신께서 안배하셨다는 생각에 그녀는 자못 안심하였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대신관이 입을 열었다.
“주신께서 형제께 응답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네? 아, 예…….”
지난 주말, 루카가 사흘 동안 기도실에 처박혔던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런 신비를 왜 주신의 아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내리셨습니까? 이를 통해 안톤을 구원하시려는 겁니까? 그렇다면 그 고달픈 일을 왜 제 친우들을 통해 이루시려는 겁니까. 혹 제가 어머니께 누를 끼쳐 그들에게 고배를 돌리신 겁니까…….’
루카미오노가 그토록 간절하게 기도를 올린 적이 있었을까. 그리 기도하던 순간에, 루카는 데메트리안이 주장한 미래의 일들을 얼핏 엿보게도 되었다.
현실일지, 데메트리안이 겪었다 말하던 미래일지 어리숭한 시간들이 기도실 안에서 흘렀다.
‘로이가 스칸다르에 가기 싫다고 할 때…….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 봐야 했어.’
‘그렇다면 시간이라도 돌려 보지 그래?’
그 미래에서 제가 주신의 목소리를 받았던 순간도 흘러갔고,
‘라비, 오늘 오랜만에 같이 자면 안 될까……?’
‘국왕 전하께서 오늘 오실 수도 있는걸요. 자꾸 격의 없이 저를 대하시면 비전하의 위엄에 누가 됩니다.’
‘으응, 그렇지…….’
시녀들도 다 물린 외로운 밤, 만리타향에서 홀로 달빛을 받으며 마음을 다독이던 클로에의 풍경도 스쳤다.
‘슬픔이 너무 많아서 그랬단다.’
그리고…… 늘 제 몸에 깃들어 목소리를 내시던 에르드 어머니께서 정말 오랜만에 응답해 주시기도 했다.
‘누구를 심판하고자 함이 아니야. 내 아이들이 하는 일에 옳고 그름은 없지. 그저 너희들이 어떤 길을 가는지 지켜볼 뿐. 네 친구의 성공도 실패도 내게 안타깝지 않을 거란다.’
벌이 아니라고 했다.
안톤미오노를 구원하시려는 건 아니지만, 그의 후회가 깊어서 이런 일이 시작된 것만은 자명했다.
또 한편으로, 그때 슬퍼했던 건 분명 그의 친구들.
‘새끼, 잘 살지 맨날 와서 ××이냐.’
그리고 저 또한 나름대로는…….
주신께서 보여 주신 기도실에서의 환상을 되새기자, 루카미오노는 다시금 숙연해졌다.
그의 낯에 수많은 감상이 스치는 것을 지켜보던 대신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서 도우세요. 무엇을 하든, 어머니께서는 기뻐하실 겁니다.”
***
차례로 라구가 만든 마법진을 타고서 일행은 곰베르의 북극성 건물로 향했다. 사람이 다닌 지 오래된 듯, 건물 안에 비치는 어스름한 달빛에 뿌연 먼지가 한가득이었다. 마법진을 겪었다는 신기함도 잠시, 일행은 얼마간 밭은기침을 내뱉느라 정신이 없었다.
“과연, 어제 그 신관의 방에 있던 것과 같은 상표야.”
데메트리안이 내부를 둘러보자, 스칸다르산 여송연을 추적하며 보았던 인장이 찍힌 포장지가 한쪽에 쌓여 있었다. 안톤미오노의 방에서 나온 것과 동일한 거였다.
그리고 직원들의 책상으로 보이는 곳에는 외부 사람이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해서인지 상단의 매출이나 거래처와 관련된 민감한 내용의 장부들이 대충 널려 있었다.
“오늘 일이 잘돼서 후작가를 잡아넣으면 여기서도 쏠쏠히 증거품이 나오겠어.”
데메트리안이 퍽 즐거운 듯 읊조렸다. 대니얼에게는 스칸다르의 비행에 프레더릭이 연루된 것은 말하지 못했지만, 인신매매 범죄를 비롯하여 알레지오가 협력했거나 최소 방조한 일이 많다는 것까지는 공유해 놓은 차였으니까.
‘알레지오 덕분에 클로에를 잃어도 본 셈이니……. 정말 끔찍했던 시간이었지.’
그리 자조하며 데메트리안은 장부들을 뒤적였다. 지난봄에 딱 떨어지는 금액의 수입이 몇 가지 기록돼 있어, 알레지오가 세탁한 금액임이 자명했다. 어쩌면 구휼 기금도 여기에…….
그는 저만 아는 복수심으로 입매를 뒤틀어 웃었다.
“거의 유령회사인가 보네.”
“부디 오늘 일이 잘돼서, 이 건물에 알레지오 측 사람들이 안 오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알프레다가 보면 누가 봐도 이거 제 술식이어서요.”
제가 그녀의 술식을 알아본 것처럼요, 라구가 넌덜머리 난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하는 말에 미라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안 지워져요?”
“마력으로 새긴 거라 자연적으로 지우긴 어렵습니다. 제가 다시 올 여력이 될지 모르겠고요.”
그리 지친 기색으로 말하며 라구는 사무실 한쪽 구석에 있는 문을 밀어젖혔다. 텅 비어 있는 넓은 방의 바닥에 크고 작은 마법진들이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여기에 마법진의 존재가 느껴지는데 문이 잠겨 있어서, 기물 파손을 하기도 했고요.”
라구가 멋쩍게 웃으며 부서진 손잡이를 보였다. 그러고는 마법진 사이사이를 폴짝폴짝 뛰고, 또 어떤 마법진은 가짜인지 그 위로 걸어서 지나간 끝에 한 마법진 앞에 다다랐다.
라구처럼 마력식을 해독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중 정말로 작동하는 마법진이 무언지, 그리고 그 마법진이 어디로 가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을 거였다.
“여기, 이 마법진입니다. 네 명까지는 한 번에 갈 수 있는 크기예요.”
미라벨과 파이겐이 라구가 발을 디뎠던 곳을 따라 뛰어서 마법진 가까운 데 섰다.
미리 이야기해 두었던 대로 미라벨과 파이겐이 라구와 함께 먼저 가되, 전투가 생긴다면 라구가 돌아와 알리고 그가 오지 않으면 안전하단 신호로 여겨 데메트리안과 클로에가 뒤따라가기로 했다.
“마법진 또한 순간 이동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큰 차이가 없겠지만, 조금 지연이 생길 수도 있으니 100 정도 세시고도 제가 안 오면 그때 바로 돌입하시면 돼요.”
라구의 설명에 클로에와 데메트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세 사람이 손을 잡고서 마법진 위에 올라서자, 이윽고 그들의 신형이 빛 속으로 사라졌다.
데메트리안 또한 라구가 밟았던 곳들을 따라 마법진 가까운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괜찮겠지? 별일 없겠지?”
클로에가 저를 인도하는 데메트리안의 손을 잡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폴짝, 폴짝, 뛰어 마법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다다랐을 때.
“꺅.”
작게 휘청인 클로에가 다른 마법진에 닿을세라, 재빨리 데메트리안이 제 품으로 당겼다. 그들이 자리한 곳은 라구가 마지막에 서 있었던 곳으로, 한 사람 간신히 발붙일 공간이었다.
제게 가까운 곳에 그녀를 붙여 두고서 데메트리안이 슬그머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파이겐 경이랑 누아제트 영애를 안 믿으면 누굴 믿겠어? 일단 이 건물에 온 걸 들켰을 리가 없으니, 작정하고 기다리고 있진 않을 거야. 있어 봐야 일상적인 경비 정도?”
“걱정인데. 정말 마흔씩이나 된다면 거의 세 개 소대에 달하니…….”
“……난 네가 더 걱정이야, 아가씨야.”
그 한숨 섞인 말소리가 밑도 끝도 없이 다정하게 울려, 클로에는 살짝 홍조가 든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그믐인 에시스와 달리 조금씩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뷜 덕에 사위가 어슴푸레했다.
이미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는 그 정도의 빛도 충분하여, 한가득 담긴 걱정과 가까이 닿아 있다는 설렘, 또 숨길 수 없는 다정이 뒤섞인 그의 낯이 시야에 들어찼다.
그러고 보니 발밑에 신경 쓰느라 몰랐을 뿐, 그와 퍽 가까이 있었다. 제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것만 같은 느낌에 클로에가 저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 손을 지켜보던 데메트리안이 당황하여 내뱉었다.
“반지는. 안 끼고 왔어?”
“잠깐 라비한테 줬어. 넘어가자마자 마법사 마주치면 어떡해.”
“로이, 그건 딱 한 번밖에 못 쓰는 거야.”
“딱 한 번 지켜주고 싶을 만큼 나한텐 라비가 소중한걸.”
으, 요 고집쟁이. 미라벨에 대한 질투심도 잠시, 데메트리안은 침음을 삼키며 재빨리 물었다.
“가죽 갑옷은.”
“안에 입었어.”
“마스크는.”
“여기.”
클로에가 셔츠 앞섶을 슬쩍 내려 보였다. 클로에가 지난번에 훈증된 환각제에 쓰러졌던 것을 염두에 두고 구한, 대기를 정화하는 허브를 활용해 만든 마스크가 목 아래 걸려 있었다.
정작 클로에는 아무 생각 없이 셔츠 안을 보인 거였지만, 그녀의 바로 위에 있던 데메트리안은 맨살 하나 보이지 않았는데도 당황하고 말았다.
“너, 너는, 진짜……. 단도도 다 가져왔지?”
“당연하지.”
그리 말하며 클로에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스무 살로 돌아오고서 보는 데메트리안은 제가 기억하던 것과 달리 퍽 답답한 면도 있고, 어설픈 모습도 보이지만…… 그것마저, 싫지 않았다.
클로에는 속으로 작게 웃었다.
‘이렇게 걱정한다고 쩔쩔맬 때면 정말…….’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니, 대신전의 손님방에서 깨어났을 때 처음으로 본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쓰러질 듯 위태로이 기울어져 있던 그의 신형, 얼마간 스스로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이 자명한 그의 어둑한 낯.
그리고 제가 쓰러지던 순간에 절박하게 달려들던 모습, 지키라는 말에 입매를 단단히 굳히던 모습까지…….
“……그리고 네가 있잖아.”
“어?”
“이번엔 정말로 똑바로 지켜 보이겠다며.”
“……응.”
“목숨 걸겠다며.”
“…….”
클로에의 목소리가 조금 장난스러운 기색을 띠었을까.
저를 놀리는 게 불만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무언가 편하게 이야기하게도 되었다는 것이 또 반갑게 느껴졌다.
데메트리안은 짧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숫자 세는 걸 잊었네.”
“괜찮으니까 아직 안 왔겠지. 가자.”
두 사람은 함께 발을 내디뎌 마법진이 내뿜는 빛 속으로 사라졌다.
***
“……으아악!”
알레지오 후작저의 손님방.
어둠에 잠긴 공간에서 안톤미오노는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다. 손이 벌벌벌 떨려왔다.
또, 그 꿈이었다.
이미 늦어 버리고 만 제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듯이, 꿈속에서 그는 스칸다르의 궁정에서 멸시당하는 제 모습을 몇 번이고 보았다.
한번 배신한 자는 또 배신할 수 있다거나, 타락한 자는 원래 개차반이었던 자보다 더 악독하다거나. 그렇게 수군대는 소리도 귓가를 가득 메웠다.
‘그게 정말 미래일 리가…….’
스칸다르의 왕자가 제게 보장해 준 것 중에 저런 취급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