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어제와도 내일과도 같지 않도록 (3)
‘뭐, 폐하께서 알아서 하실 일.’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프레더릭의 황태자 책봉을 미루고, 또 클로에를 스칸다르에 보내고 말았던…… 황제에 대해 데메트리안이 미약하나마 불경한 생각을 품는 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왕실저에 대한 수색령도 안 내려 주셨고 말이야.’
그날의 분노가 생각나,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그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의 낯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걸 본 클로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 인신매매단에 개입한 마법사가 왕자가 귀국하는 날에 거기 나타났다는데, 라구 경에게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어.”
데메트리안은 제가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음을 깨닫고 엷게 웃었다.
‘……하지만 인신매매 정도보다야 성배 탈취가 훨씬 더 심각한 범죄니 폐하께서 수색령을 못 내린 게 차라리 더 잘된 일일 수도. 한센 말로는 왕자가 그 호위랑 떨어진 적이 없다니까 같이 돌아와 있을 확률이 높고…….’
무엇보다 납치된 이들을 되찾기 위해 몰래 멜하운에 보내 놓은 기사단으로부터, 17년 만에 왕실의 적장자가 귀환했다는 소식이 기미조차 없다는 보고를 받은 차였다.
“혹시 그때 멜하운이 아니라 다른 데로 간 건 아니고?”
스칸다르의 포털 기착지, 멜하운이라는 이름을 클로에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입에 올렸다. 그 나라의 후비로 산 게 몇 년이고 그 가족이 그곳을 1년에 한두 번씩 꼭 드나들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울림이 데메트리안에게는 퍽 가슴 저리게 다가왔다.
제게 중요한 게 무언지도 모르고서 잃고야 말았던, 잃고 나서야 그녀가 제 얼마나 깊은 곳에 자리한 존재인지 깨달았던 그 시절……. 다시는 그때에 얽매여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기로 해 놓고 또 그렇게 마음이 괴로워졌다.
그 못난 심사를 감추기 위해 그는 목소리를 슬며시 높였다.
“일단 멜하운에는 다들 제대로 갔다고 보고가 들어왔고, 분리 독립파도 그들이 귀국했다가 몰래 돌아올 계획으로 알고 있다고 했어.”
“그럼 디에크 경도 그렇게 돌아온 건가…….”
“그 사람, 왕자의 최측근이겠지?”
“응, 친위대에 속할 예정이야.”
무언가를 되짚듯 가라앉는 클로에의 눈빛을 보며, 데메트리안은 다시금 그 시절의 고통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내처 말을 이었다.
“인신매매단이 납치한 자들을 마법으로 빼돌릴까 봐서 황실 마법사단에게 대규모 마력 반응이 일어나는지 확인해 달라고 부탁해 뒀었어.”
“그걸 감지할 수 있대?”
“순간 이동 마법이 다른 마법에 비해 마력이 많이 소모된대. 실제로 어제 그들이 대신전에서 도망치고 나서 한 번 더 순간 이동 마법을 써서 움직였는지, 그즈음에 마법사단에서 마력 반응을 감지했다고 연락이 왔어.”
“마법진을 통한 거랑 헷갈린 건 아니고? 네가 가진 건 그때 대신전에서 마도구를 쓴 것도 감지했잖아.”
“일반적으로는 마법사가 직접 마력을 사용한 것만 감지할 수 있대. 그리고 그 마력의 크기가 고티유 밖으로 빠져나간다고 판단할 정도는 아니었대.”
“그렇다면…….”
“아직 고티유 내에 있다는 거지.”
그 말을 들은 클로에가 미라벨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농브르에서 내린 결론과 상당 부분 유사했다.
그때까지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파이겐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면 후작저에 그 기사도 있다고 보면 되는 셈이군요.”
“응. 그리고 어쩌면 스칸다르로 돌아간 것으로 위장했다는 그 기사들까지.”
“병력이 어느 정도 된답니까?”
“그건 군사 기밀이라 모르지만, 납치된 자들 중 슈바츠 거리에서 그들과 바꿔치기할 셈으로 데려간 이들이 마흔은 된다고 봐야 한다더군.”
“……그럼 최대 마흔 명하고 싸우게 되겠군요.”
파이겐이 자못 긴장한 듯한 얼굴로 제 양 손바닥을 맞부딪었다. 건틀렛 낀 손 사이로 투박한 마찰음이 울렸다.
“경, 그때 그 기사에게 이길 뻔했잖아.”
“아, 그 폐건물에서 말이죠.”
“그 기사가 스칸다르 왕실 기사 중 거의 세 손가락 안에 꼽는 기사래. 자신감을 가져.”
몇 년 사이에 스칸다르 왕실군이 대폭 개편되지 않는다면 말이지, 그 말을 마음속으로 삼키며 클로에가 생긋 웃었다.
역시 이 아가씨께서도 뭔가 이상하시다……라고 생각하며 파이겐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해 볼 만하겠네요.”
어쨌든 한번 승기를 잡아 본 상대가 그중 가장 무력이 좋다면,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는가.
“그 기사?”
“왕자님 호위.”
“아아.”
미라벨의 눈매가 새초롬해졌다.
그녀는 맞은편에 앉은 파이겐을 은근하게 눈짓하며 말했다.
“경, 내기해요.”
“또요? 이번에도 소원 내기?”
“그 스칸다르 기사, 누가 격퇴하는지로.”
미라벨의 노란색 눈동자에 호승심이 어렸다.
‘그러고 보면 라비가 디에크 경한테 꽤 관심을 가졌었지. 이 기회에 확인해 볼 수도 있으려나.’
스칸다르로 가게 되면 미라벨이 검 한번 제대로 잡지 못하게 되는 것이 개중에도 가장 미안한 것이어서, 클로에의 마음에 자못 뿌듯함이 어릴 때였다.
“다녀왔습니다.”
그때, 창가에 라구의 신형이 나타났다. 다짐한 반 시간보다 조금 덜 되어 도착한 그는 퍽 지친 기색이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늘 피곤한 낯이긴 했지만…….
“짐작하신 대로 아무도 없었고요, 마법진이 몇 가지 설치돼 있었습니다.”
“몇 가지? 한 개가 아니고?”
“정말 포털 대신 썼네.”
미라벨이 놀란 눈을 뜨며 말하자 클로에가 헛헛하게 웃었다.
“그럼 그중에 뭐가 후작저로 연결되는지 알 수가 없는 건가…….”
“아, 그렇지는 않습니다. 알아냈어요.”
“아이, 뭐야. 빨리 말하지.”
미라벨의 탄식이 울렸다. 그녀가 대신 읊어 주는 제 심사에 클로에는 속으로 웃었다.
“마법진이 정교한 술식이어서요. 완벽히 같은 문양으로 제작된 두 개가 통하는 개념이라지만, 어쨌든 서로 교섭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좌표는 설정해 줘야 하거든요.”
“으응, 그래서.”
마음이 급해서인지, 오늘따라 그의 말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며 클로에는 말을 재촉했다.
“그 술식을 분석해 보니 하나는 아마 제도 남단. 리비에라 강변 남쪽을 향해 있었고, 다른 하나는…… 북동쪽. 스칸다르 방면일 거예요.”
역시나. 클로에와 데메트리안이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벨이 말한 대로 스칸다르의 기사들이 몰래 주둔해 있었을 리비에라 강변 남쪽 언덕, 그리고 최소한 디에크만은 포털을 타고 넘어갔다가 돌아왔을 멜하운.
이외에도 라구는 후작의 개인 사유지나 차명으로 소유한 별장지, 기타 다른 상회로 이어지는 마법진들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최근에 설치된 게 후작저로 통하는 것 같았어요. 마력을 흘려 넣어 보니 여전히 작동했고요.”
“오, 그럼 그걸 타고 가면.”
“후작저에 닿겠죠.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는 게 문제긴 하지만요.”
라구의 나지막한 한마디에 모두가 한동안 말을 잃었다.
“……둘 중에 하나야. 그곳에 올 줄 알고 대기하고 있거나, 아주 모르고 있는 것.”
“대기하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맞닥뜨릴 이들이니.”
“내기할까요? 누가 더 많이 처리하는지로.”
“아가씨는 또 무슨 소원을 그리 많이 비시려고.”
“이기시면 되잖아요?”
“제대로 같이 싸우는 건 처음이니 신중해야죠.”
파이겐이 너스레를 떨며 씨익 웃었다. 그들의 퍽 친근한 기색에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꽤 친해졌네……?’
스무 살로 돌아오고서 데메트리안과 개인적으로 부딪히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에 파이겐과 미라벨도 더 친해진 모양이었다.
“좋아요, 그럼 경하고 제가 먼저 돌입하죠. 라구 경은 우리와 같이 갔다가, 무슨 일이 있으면 돌아가서 상황을 전달해 주면 되겠어.”
“……예에.”
그리 말하는 라구의 낯이 다소간 지쳐 보였다.
조금 전 데메트리안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나 클로에가 걱정스럽게 말을 붙였다.
“경, 순간 이동에 마력이 많이 든다던데, 혹시.”
“네? 아…….”
라구가 멋쩍게 웃었다.
“혼자 이동하는 건 제 몸에 있는 마나를 쓰는 거라서 괜찮습니다. 다만 여러분을 상단 건물로 다 옮기려면 그게 걱정이어서, 우선 그쪽에 마법진을 만들어 놓고 왔어요.”
“마법진을, 그 사이에?”
미라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법진을 본 적은 별로 없지만, 어젯밤 대신전 뒤편 숲에서 본 그 마법진은 언뜻 보기로도 엄청 세밀하고 정교해 보였던 것이었다.
“마법진 없이 마법을 쓰면 그 마력식을 정교하게 구현할 수 없으니까 마력이 더 많이 드는 거여서요. 이게 마력 소모만 놓고 보면 훨씬 효율적이긴 합니다.”
그리 말한 라구는 빈 공간에 가더니 쪼그리고 앉아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법사도 마법도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마법진은 또 처음이어서, 클로에와 미라벨이 신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그가 하는 양을 구경했다.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언뜻 식은땀까지 흘리는 것이 꽤나 지쳐 보였다.
“정말로 괜찮겠는가? 마차로 조심해서 가도 괜찮은데. 경이 우리 중엔 유일한 마법사니까…….”
“제가 도움을 드리려는 건 알프레다가 환영 마법으로 장난쳤을 때 그걸 파훼하는 정도니까요. 파훼하는 건 술식을 역으로 깨면 되는 거여서, 제 마력이 들 일이 별로 없어요.”
“알프레다?”
“말씀드린 그 동료예요. 저희 세대에서 환영 마법의 일인자고요.”
“그렇다면 혹시, 머리 색도.”
데메트리안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네, 소공작께서 여쭈셨던 게…… 알프레다였나 봐요.”
상단에 설치된 마법진도 분명 그녀의 필적으로 된 거였어요, 그리 중얼거리는 라구가 다시금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혹시 마탑에서든 어디서든 백발의 마법사를 본 적이 있냐고 묻기에, 어디서 웬 광대를 봤나 생각했던 거였는데.
‘환영 마법을 써서 사람들의 눈을 속였던 모양이지. 그 정도의 광범위 환영 마법은 알프레다 정도만 가능한 거니까…….’
마침 왕자의 귀국을 도운 백발의 마법사에 대해 물으려던 데메트리안은 그의 침울한 기색에 말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알프레다의 공격계 마법은 평범한 수준인데, 뭐 저도 사정은 다르지 않고요.”
“다른 마법사가 더 있는 건 아니겠지……?”
미라벨이 넌지시 물었다. 파이겐과 먼저 돌입하기로 했는데, 마법사의 공격을 받는다면 퍽 곤란해질 거였다. 용병이 되어 몬스터 소굴을 구르지 않는 이상 공격 마법을 경험할 일은 없으니까.
“없을 거예요. 알레지오 후작의 개인 의뢰를 받는 건 알프레다뿐이었거든요. 제가 나올 때 다른 동료들은 다 숙소에 있기도 했고…… 그런데.”
거기까지 말한 라구가 잠시 일행들 쪽으로 시선을 던지더니 넌지시 덧붙였다.
“신성력을 쓰는 분이 있으면 더 나을 텐데요. 그 사제라는 친우분께서는 혹시…….”
“아, 루카는.”
클로에가 데메트리안을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어제 도와준 것만으로도 꽤나 어려웠던 일이고 대신전도 아수라장일 거라 연락해 보지 않았는데. 바깥일은 바깥 사람들끼리 처리해야지 싶어서.”
***
루카미오노가 아침 댓바람부터 대신관의 집무실을 찾았을 때, 대신관은 마치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보니 반갑군요, 루카미오노.”
간밤에 엄청난 소란이 있었는데도 대신관은 퍽 평온해 보였다. 그녀의 엄숙하고 고요한 자태에, 루카미오노는 대신관이 생각보다 많은 일을 알고 있음을 확신했다.
꿀꺽, 루카미오노는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