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어제와도 내일과도 같지 않도록 (2)
말해 보라는 듯, 데메트리안이 클로에 쪽을 향해 돌아앉았다. 상체를 그쪽으로 한참 기울여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이미 그녀에게 어떤 묘수가 있다는 사실에 감격한 태도였다.
저나 라구의 말을 들을 때와는 영 다른 반응에 미라벨이 저거 봤냐는 듯 파이겐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오늘 캄포 대공녀를 만났어.”
“어, 그래…….”
데메트리안은 어디에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혼자 기억하는 미래에서나마 제 가장 못난 시절을 본 루시엔의 존재는 아무래도 불편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어제 만나자는 서신을 받았었거든.”
“그래서 하필 오늘 만났다고?”
밤을 꼬박 새워서 피곤한 날에? 데메트리안의 낯에 들어찬 것은 일종의 걱정이었다.
그가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알아 클로에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리 독립파의 행적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길래 말이야. 네가 그들과 합의해 놓았다지만, 혹시 다른 정황은 없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 마음이 급했어.”
“그들은 결국 합의한 대로 행동했고, 결과적으로 지금 경시청에 있어. 그쪽으론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어.”
그리 말하는 데메트리안의 목소리가 그녀를 구슬리는 듯, 퍽 부드럽게도 울렸다. 그러나 그 너머에 서린 것이 걱정과 미묘한 아쉬움이었다.
“……아침에 기사들이 말없이 역마차를 놔두고 간 것부터가 일이 잘 마무리돼서인데, 내가 그렇다는 말을 안 했나.”
그가 왜 그런 목소리를 내는지 알아 클로에는 속으로 웃었다.
‘저를 여전히 못 믿어서인 줄 착각하고 계셔서.’
진정하라는 듯, 클로에는 손을 내뻗어 그의 무릎을 살며시 짚었다.
“알아, 데미. 그렇다고 해서 어제 정한 약속을 오늘 취소할 수도 없는 법이잖아.”
예법에 어긋나는 것도 알지? 클로에의 눈동자가 단호함으로 빛났다. 어쨌든 저들은 이 일을 함께 해내기로 했고, 저는 단 한 번도 그를 믿지 않은 적이 없는데…….
‘슈바츠 거리에서조차, 거기에 데미가 없었다면 그런 용기도 안 났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말을 목구멍까지 올렸던 데메트리안은 침음을 삼켰다.
클로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자꾸만 스스로 고된 일을 자처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때면 생기 있게 빛나는 눈동자나 흥분하여 빛나는 발간 뺨 같은 것도 너무나 사랑스러웠던 것인데…….
‘그렇게 함께 열띠는 대상이, 책 속의 박제된 이론이며 역사가 아니라 현실에서 같이 꾸리는 일이 된 것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지금으로 돌아와 첫 독서회를 가졌던 4월의 그날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그때의 감격 비스름한 것이 가슴속에 피어났을까.
데메트리안은 흐물거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눌러 내리며, 제 무릎에 얹힌 클로에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당황한 클로에의 귀 끝이 붉어졌다.
‘그 짧은 새 생각이 어떻게 흘렀길래, 또 저 밑도 끝도 없이 느끼한 얼굴이야……?’
게다가 그는 인지하지 못한 듯하지만, 가자미눈을 하고 있는 일행들의 따가운 눈빛…….
클로에는 재빨리 제 손을 빼내었다.
“아, 아무튼.”
빈손이 허전해졌으나, 클로에가 수줍어하는 것이 선연해 데메트리안은 그것만으로도 자못 즐거웠다.
이 위험한 일에 함께하게 된 게 여전히 껄끄러웠지만,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같이 있는 건 역시 좋다.
‘그래, 위험할 일은 내가 없게 하면 되는 거고.’
클로에가 이 일에 함께하기로 한 그 순간부터 다짐한 바를 다시금 가슴에 새기며, 데메트리안이 재차 물었다.
“그래서, 대공녀를 만난 게 도움이 됐다는 거지?”
“응.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더라고. 대공녀가…… 너도 알다시피 평민 지구의 사정에 밝잖아.”
‘너도 알다시피’라는 부분에서 데메트리안의 입가가 가늘게 실룩였다.
‘크레벨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제가 포기한 게 너무 많아서.’
알기야 알았지만, 자세히는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는 게 정확할까…….
평민 상인들과 퍽 친근하게 굴기야 했으니 맞는 말일 것이지만 그녀의 정보력에 대해 직접 확인한 바는 없었다.
어어, 그렇지, 그렇게 읊조리는 그를 살피며 클로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로부터 당시의 일에 대해 자세히 들은 바가 없기에 넘겨짚어서 한 말이었는데.
‘생각해 보면 대공녀가 아까처럼 그렇게 내어놓고 정혼을 깨고 싶어 하는데도 소문조차 안 난 건 건 왤까? 아무리 맹세고, 아무리 대공녀가 사교계에 두문불출했었다지만. 물론 나랑 친해진 것부터가 그때랑 달라진 거긴 한데…….’
그렇듯 예상외로 적극적인 행동들을 보이는 탓에 루시엔 또한 시간을 거스른 건 아닌지 생각했던 건데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클로에는 괜스레 뻗어 나가는 생각의 꼬리를 잘라냈다. 그럴 때가 아니었다.
“대공녀가, 네가 분리 독립파와 교류한 것까지 알고 있더라고. 주기적으로 신전에 드나들고, 프레더릭 전하에 대해 조사를 한 것까지.”
데메트리안의 눈썹이 꿈틀했다.
루시엔이 고티유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도 상단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고티유에 드나든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고티유의 사정에 밝은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평민 지구에 떠도는 뜬소문 같은 것까지 수집할 정도로.
“그리고, 슈바츠 거리 때. 기억나? 우리 마지막에 꼭대기 층에서 스칸다르 기사들 맞닥뜨렸을 때 거기 같이 있던 분리 독립파.”
“응, 마정석 폭탄 던지던. 기사들과 함께 사라졌지.”
“그 사람이 그간 계속해서 분리 독립파와 접촉한 모양이야.”
그 말을 들은 데메트리안의 표정이 살얼음 낀 듯이 굳었다. 그 반응에서, 클로에는 그가 관련하여 아는 바가 없음을 직감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걸 보고 대공녀는 분리 독립파가 아직도 왕자의…… 지령을 받는다고 생각했대.”
“……별다른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데메트리안이 눈매를 좁히며 중얼거렸다.
아침에 안톤미오노가 소지하고 있던 담뱃잎을 유통한 상단을 조사하기 위해 경시청에 갔을 때, 이올린 한센을 위시한 분리 독립파들이 유치장에 갇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 거래는 기존의 계획대로 도적 떼로 변장하여 소란을 피우고 달아나는 분리 독립파를 크레벨 기사단이 체포한다, 단 하나였기에 더 확인할 사항은 없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되짚는 그의 낯이 자못 심각하여, 클로에가 넌지시 덧붙였다.
“결국 별 소득이 없었으니 분리 독립파가 너와 합의한 바를 행한 거겠지?”
“……그렇겠지.”
밑도 끝도 없이 흘러가던 생각이, 그녀의 순발력 좋은 판단 한마디에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았다.
이 일에 클로에의 운명이 달라지고, 제 미래 또한 거기에 종속되어 달라진다는 것을 단 한시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정말이지 돌다리를 수백 번씩은 두드려야 직성이 풀렸다. 라구에게 큰손이 되어 의뢰했던 마도구들이 그 증거의 일부였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경시청으로 사람을 보내 그들에게 왕자와 다른 꿍꿍이를 꾸리지 않았다는 확답을 받아야 하나, 그렇게 생각이 흘러가던 차였다.
“데미.”
그가 머릿속으로 멀리까지 갔다 돌아온 것을 확인한 클로에의 한쪽 입꼬리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었다.
“오늘 끝내자고 모인 거잖아. 다른 데 정신 팔면 안 되지.”
“……맞아.”
오늘 끝내자. 그 말이 퍽 흡족하게 들려 데메트리안도 그제야 낯을 풀었다. 그의 중얼거림에 경쾌한 기운이 서렸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지. 그러고도 갈 길이 한참인데.”
오늘 이 일을 완수하여 클로에가 그녀의 미래가 달라졌다는 확신만 얻는다면,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할 일만 남았다.
그것은 어쩌면 20여 년 동안 그가 짊어지고 살아온 후계자의 길을 박탈당하는 일이 될 수도,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졌던 권세나 부를 일정량 포기해야 하는 길이 될 수도 있지만…… 그거야말로 정말 제가 알아서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녀가 제게 기회를 준다면야, 무엇이든 달게 받아들이리라.
“대공녀가 말하길, 분리 독립파의 그 사내가 후작저의 사용인인 척하면서 드나드는 통로가 있다고 했어.”
“곁문 같은 거? 후작저의 사용인들을 다 뺐다며. 그렇다면 거기도 폐쇄됐을 텐데.”
데메트리안이 미라벨을 눈짓하며 말했다.
“응, 사용인들 다 휴가 주고서 곁문은 폐쇄하고 다른 비밀 통로를 썼대. 아무래도 식자재가 필요는 하니까.”
“비밀 통로라. 후작이 아무래도 은밀한 일을 많이 해 온 모양이니까……. 그럼, 알레지오 상점 같은 데로 연결되려나?”
“비슷해. 한들룽 지구에 있는 건데, 후작의 차명으로 운영 중인 상단 건물이 있다고.”
“설마.”
데메트리안의 낯이 굳었다.
오늘 낮에 안톤미오노의 방에서 나온 담뱃잎의 출처를 알기 위해 확인한 그 상단의 지부 또한 한들룽 지구에 있었다. 그리고 그 상단으로 말할 것 같으면, 클로에에게 거기까지는 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분리 독립파에서 왕자의 심부름으로 물건을 들여올 때 명의를 빌려 쓰던 상단이지. 로이 선물을 들여온 행상도 이 상단 명의로 고티유에 들어왔고.’
그가 생각에 빠져 제 턱을 쓰는 걸 바라보며 클로에가 슬며시 말을 보탰다.
“곰베르의 북극성이라고…… 들어 봤어?”
“응, 아까 찾았다던 그, 스칸다르산 담뱃잎 유통하던 상단.”
끄응, 혹시나 했지만 정말로. 클로에는 목구멍이 다소간 갑갑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말을 이었다.
“상단이 잘 오가지 않는 빈 건물인데 요즘 들어 매일 같은 사람이 들락거려서 주변에서 수상하게 여겼다나 봐.”
“그럼 거기에 비밀 통로가 있거나, 최소한 마법진 같은 게 있을 수 있겠네.”
“……마법진을 해제하지만 않았다면.”
“일단 거기부터 확인해 봐야겠지?”
“무작정 후작저로 가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저어.”
두 사람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라구가 입을 열었다.
“어딘지 알려주시면 제가 확인해 보고 오겠습니다. 그게 훨씬 빠를 것 같아요.”
그가 기꺼이 손을 보태주겠다는 것에, 클로에와 데메트리안의 낯이 퍽 밝아졌다.
빨리 확인해야 오늘 일도 빨리 끝나지 않겠나요, 그런 식으로 라구는 둘러대었지만 실은 두 사람이 대화를 하다 말고 자꾸만 저들 감정에 빠져드는 걸 지켜보는 게 답답해서……라는 사실은 파이겐과 미라벨만이 알았다.
“반 시간 안에 다녀오겠습니다.”
데메트리안으로부터 그 상단의 위치를 받아든 라구가 순간 이동 마법을 써서 사라졌다.
“근데, 아직 거기에 남아 있는 건 확실한 거겠지?”
“응, 포털이야 대니얼 통해서 단단히 막아 두었으니 공식적인 경로로는 못 빠져나갈 테니까…….”
“2황자 전하께서 이 일을 아셔?”
“……성배 건까지는 모르고, 왕자가 귀국하는 과정에서 무슨 문제가 생긴 것만 알아. 거기에도 마법사가 개입한 흔적이 있었거든.”
데메트리안은 제가 숨기는 것이 있음을 간파했는지 미심쩍은 낯으로 저를 보던 대니얼을 떠올렸다.
‘왕자가 성배를 탈취한 게 알려지면, 분명 프레더릭 전하도 연루된 게 밝혀질 텐데. 그러면 실각하실 확률이 높고……. 대니얼 녀석이 계속 후계자 자리를 고사하면 또 나름대로 혼란스러워지겠지.’
제가 아는 미래에서도 데메트리안은 끝내, 그가 황위를 마다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제가 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그랬던 건가 싶어 무언가 특별한 기색이 있는지 꼼꼼히 살폈지만, 지금의 대니얼에게서는 특별히 제국을 책임지기 싫어한다거나 황실을 꺼린다거나 하는 기색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