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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165화 (165/189)

165화. 어제와도 내일과도 같지 않도록 (1)

한낮에도 알레지오 후작저는 적막했다. 지난주부터 사용인들에게 휴가를 준 탓이었다. 보안을 위해 창문마다 암막 커튼을 꼼꼼히 친지라 그 내부는 어둑하기까지 했다.

마법사 길드와 긴밀하게 협력하고 대륙에서 가장 많은 마정석과 마도구를 유통하는 알레지오 상단의 저택답게, 퍽 밝고 시원하게 설비되어 있었지만.

스칸다르의 초가을처럼 선선한 실내. 뷔욘 스칸다르는 스칸다르식 로브를 여러 겹 겹쳐 입고서 소파에 반쯤 누워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남대륙의 선인장으로 만든 독주가 들려 있었다.

“당분간 선인장주는 못 드시게 되었어요, 달링. 남대륙산은 아직 남부 촌것들을 거쳐야 하니까.”

알레지오 후작의 외동딸, 헬레네가 은쟁반에 잘게 썬 레몬과 소금, 커피 가루 같은 것들을 담아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응접탁자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서, 레몬 조각이 든 종지를 들고 뷔욘이 느른히 누운 곳 앞에 앉았다.

“거사도 마쳤으니, 이제 내년 대축일만 기다리면 되겠죠.”

레몬 조각을 뷔욘의 입술에 물릴 때, 헬레네의 손끝이 그의 입술을 은근히 스쳤다. 까륵, 헬레네의 입에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흘렀다.

“성배가 사라진 걸 알게 되면, 제국이 얼마나 신나게 뒤집힐까요? 그러면 달링의 나라도 마음껏 독립을 선언할 수 있을 거고요.”

“국혼만 치르시고 나면 제가 스칸다르에서 남대륙까지 직통하는 상행로를 뚫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왕후의 가문이 권력에 아무 도움 안 되는 장사치 나부랭이인데, 그쯤은 해야죠.”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알레지오 후작이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소리를 들으며 뷔욘이 짧게 웃었다. 소파의 팔걸이에 발을 올려 둔 그의 허벅지 위에는…… 어제 디에크가 대신전에서 훔쳐 나온 것이 있었다.

천 년 전 아르투젠이 제국을 이룰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매개물, 캄포의 성배.

“이렇게 보니 참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뷔욘의 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헬레네의 입가에 퍽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꼬리는 제대로 떼셨겠지요.”

“그럼요. 저택 보안도 마법사가 노력 중입니다. 그래도 환영 마법에 큰 마력이 안 들어서 다행이지요. 황실 마법사단이 갑자기 마력 반응을 꼼꼼히 감지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바로 떴으면 좋았을 것을, 끝까지 황실 눈치를 보는군요.”

뷔욘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원래 계획대로였으면 순간 이동 마법을 통해 바로 이 지긋지긋한 도시를 뜨는 건데.

이런 걸 두고 자업자득이라고 하는 걸까. 인신매매단 일 때문에 황실 마법사단이 마력 반응을 감지하기 시작한 것이니.

뷔욘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선인장주를 다시금 입에 머금었다.

헬레네가 다시금 손을 뻗어, 레몬 조각을 그의 입에 물리려 했다. 고개를 돌려 그녀의 손을 피한 뷔욘은 그 레몬 조각을 제 손으로 받아들었다.

“그 버러지 녀석들도, 그 일 하나 제대로 마무리 못 하고.”

뷔욘이 찝찝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대신전에서 양동작전을 펼쳤던 분리 독립파가 바보같이 근처를 지나던 경비대에게 붙잡힌 것을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대기 중이던 기사님들껜 돌아오시라 연락해 두었습니다.”

“그 버러지들 때문에 굳이 기사들을 남겨 놓으려고 그 고생을 한 건데. 아무 쓸모도 없게 돼 버렸군.”

“그래도, 온전히 벗어나실 때까진 모르는 일이니까요.”

“……쓸모 있을 일 없이 마무리돼야 할 텐데.”

톡, 톡, 톡, 뷔욘의 긴 손가락이 금으로 된 성배의 표면을 울렸다.

분리 독립파의 쓸모는 여기서 끝났다. 제국 곳곳에 폭력적인 테러를 일으켜, 이러느니 스칸다르를 제국 연방에서 추방하자는 의견이 아르투젠 귀족 사회에 대두되게끔 하는 것.

스칸다르의 왕관을 흠결 없이 쓰기 위해서는 그들과의 연결고리를 잘라내야만 했다.

그들을 처리하기 위해 탄신연의 사절단과 함께 왔던 호위 기사들을 제도에 남겨 둔 것이었다. 포털에는 다 함께 귀국한 척하기 위해 인신매매단이 납치한 이들을 사절단 호위 기사로 위장하여 돌려보냈다.

‘부왕에게 독을 먹이는 이들도, 셰비크에 돌아가자마자 다 처리해야지. 그리고……’

뷔욘의 눈동자가 슬며시 알레지오의 부녀에게로 향했다. 제국의 성물을 제가 은닉하려는 것 또한,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일이긴 한데…….

톡, 톡, 톡, 뷔욘의 손가락이 규칙적으로 성배를 울렸다.

그의 입가에 퍽 흡족한 미소가 깃든 것에 알레지오 후작 또한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그건, 정말로 셰비크로 가져가실 건가요?”

알레지오 후작이 성배를 턱짓했다. 에르드교를 믿지 않는 스칸다르에서 그걸 알아볼 이야 없겠지만, 아무래도 가는 길이 멀다 보니 위험하지 않겠는가.

‘성물 중 으뜸인 캄포의 성배. 그걸 증발시켜 제국을 혼란에 빠뜨리는 게 내 목표입니다. 그 알량한 통합의 상징이 사라진다면, 골칫덩이 소국 하나 독립시켜 주는 건 일도 아니겠지요.’

상업을 천시하는 제국을 떠나 더 큰 권세를 얻길 바라던 알레지오 후작은 그 포부를 내비친 스칸다르의 왕자를 기꺼이 후원했다. 마침 나이 차가 크게 나지 않는 딸이 있어, 그것은 혼약으로 보증되었다.

제국의 고결하신 귀족들께서 아무리 후작이라 해도 장사치에게는 딸을 내어주지 않아, 그 또한 스칸다르 귀족의 태에서 헬레네를 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제 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자리는, 산고 끝에 죽은 어미의 나라의 왕후 자리.

그렇게 8년 전 규합한 뷔욘 스칸다르와 디에고 알레지오의 야망이 드디어 실현된 것이 바로 어제였다.

어제의 무대를 만들기 위해 교단에 실망한 신관 하나와 황자를 포섭하느라, 퍽 오랜 시간을 공들였다.

그 인고의 시간 끝에 마침내 그들의 수중에 들어온, 캄포의 성배.

알레지오 후작이 손을 뻗어 뷔욘의 잔에 술을 채웠다.

“아무래도 직접 갖고 가시자면,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 걱정이 돼서.”

원래는 알레지오 상단의 비밀 금고에 숨기거나 후작가가 차명으로 소유한 별장지에 묻어 놓는 등 다양한 선택지가 거론되었었다.

그러다가 돌연, 계획을 바꾸어 셰비크에 갖고 가겠다고 뷔욘이 선언한 것이 귀국 직전의 일이었다.

“완벽히 숨기려면 내가 갖고 있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설마 셰비크까지 수사하겠다고 나서지는 않겠지요.”

“그럼 달링, 나는 이 골동품이 셰비크 궁 왕후의 침실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헬레네가 그의 술잔 가장자리에 소금을 바르며 콧소리를 내었다.

표면상으로 뷔욘은 제 의중을 그리 표현하였지만…….

‘혹시 또 모르지. 상황을 봐서, 다른 협상을 할 수 있을지도.’

제국의 모든 것들이 지긋지긋해진 그였지만, 그러고 보면 아주 싫은 것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따금 제게 특별할 것 없는 목소리로 말을 걸던, 맹랑한 눈동자.

그 맹랑함이 어찌나 과하던지, 어제 대신전에 그 수하가 나타났었다는 것도 같지만…….

뭐, 제국의 아녀자가 아무리 대단하대도, 한 사내의 여인이 되면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가.

‘오히려 그렇게 순종하는 아내로 굴복시키는 것 또한 제국에 대한 일종의 복수가 될 수도.’

뷔욘은 제가 수년 전 세우고 착실히 다져 온 계획을 하루아침에 뒤트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연인조차 못 되는, 괜스레 눈길이 가는 여인 하나 때문이라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도…….

‘어차피 열등감에 빠진 남자는 늘 그릇된 결정을 내리기 마련이니까. 나도, 그 녀석도.’

뷔욘이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프레더릭의 얼굴을 떠올리며 비죽 웃었다. 그런 얼간이가 즉위한다면, 성배가 있건 없건 제국은 쇠하리라.

‘이렇게도 복수할 수 있고, 저렇게도 복수할 수 있고.’

뷔욘은 즐거운 생각에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제가 배신한 것이 수많은데, 알레지오 후작을 배신하지 못할 건 또 무언가.

다만 그것은 아직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었다. 그 선택지를 남겨 놓는 것부터가 배신이라면 배신이겠지만.

***

그날 밤, 클로에와 미라벨은 마차를 타지 않고 몰래 저택을 빠져나왔다. 마치 분리 독립파의 아지트를 급습하기 위해 밤마실 나갔던 4월의 그날처럼.

“어제도 괜히 거짓말하지 말고 그냥 나올 걸 그랬나?”

“어젠 엄마한테 따로 얘기 안 했잖아. 농브르 아저씨들이 데미 공자님네랑 이야기가 되어 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이렇게 나가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걸?”

“그럼 지금도 그들이 따라오려나?”

“백 퍼센트야.”

실력은 좋으니 잘됐지, 미라벨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두 사람은 타운하우스 밀집 지역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자리한 역마차 집합소에서 역마차를 얻어 타고 앙헬라타 대로로 향했다. 그들의 아지트가 된 사무실에 다다르니 아침에 만났던 이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라구 또한 그 자리에 와 있었다. 늦은 오후쯤 고민을 마쳤는지, 협력하겠다고 통신구로 연락해 온 것이었다.

“짐작하신 대로 제 동료가 후작의 의뢰를 받아 제게 그 술식을 개발해 달라고 했었어요. 그게 어떤 마도구에 쓰일지는 말 안 하고, 두어 명 순간 이동할 수 있는 양의 마력을 전환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그게 정말로 두어 명 순간 이동을 시킬 마도구를 만드는 데 쓰였을 줄이야. 라구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키슬라바령에서 바로 보증서 사본의 사본을 공증받아 오긴 했어. 경시청에서 신관의 방에서 나온 담뱃잎을 유통한 상단을 찾았더니 알레지오 후작가의 차명으로 된 상단이 나왔고.”

“특별히 놀라운 결과는 아니네.”

오늘 동분서주한 결과를 보고하는 데메트리안의 말소리에, 상석에 앉은 클로에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레지오 후작의 이름이 다시금 언급되자 라구는 꽤 불편한 낯이 되었다.

지금까지 그에게야 단순히 고용주에 불과했지만, 하룻밤 새 제국의 기반을 뒤흔들 음모를 꾸민 역적이 되지 않았는가.

“농브르에서도 알레지오 후작저를 감시하고 있었대요.”

“혹시 잠입할 경로를 알아낸 게 있답니까?”

어제오늘 사이 농브르가 누아제트 남작부인의 것임을 안 데메트리안이 살갑게 물었다. 그전에도, 이번에도 농브르에게 여러 도움을 받고 있는데 그 정체는 이번에야 안 차였다.

하지만 미라벨의 낯에는 난색이 어렸다.

“농브르가 취재원으로 활용하는 건 일반적으로 저택의 사용인들이래요. 아니면 거기에 드나드는 배달부들이나……. 아무튼 목표물이 될 법한 거물들이 주목하지 않을 만한 사람들요.”

제 엄마가 변장하여 현장에서 뛰는 건 몰라도, 농브르가 대충 어떤 일을 하는지는 평생 들어 온 미라벨이었다. 익숙하게 주워섬기던 미라벨의 목소리가 조금씩 기어들어 갔다.

“그런데, 지난주에 후작저에서 사용인들 모두에게 휴가를 줘서…….”

그리 말하며, 미라벨이 눈동자를 굴려 클로에 쪽을 바라보았다. 클로에가 답삭 순서를 넘겨받았다.

“후작가로 어찌 잠입할지는, 내가 알아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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