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분기점: 겹그믐의 날 (11)
스칸다르의 포털 기착지, 멜하운. 데메트리안이 곧 사라질 미래에서 포털을 타고 가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얼른 자리를 떠나려는 기색이던 데메트리안의 낯이 진지해지자, 대니얼은 제가 맞게 찾아왔음을 알았다.
“이런 현상이 그때 일어난 거라면, 왕자 일행이 당도했을 때 근처에서 누가 마법을 시전했다는 거지?”
“그 일행 중에 마법사가 있었거나…… 무슨 마법을 썼다는 소린데.”
아래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리던 데메트리안이 곧바로 물었다.
“혹시, 왕자의 귀국 행렬에 알레지오가 연관돼 있었어? 후작가에서 호위를 했다거나, 거기 마차를 타고 왔다거나, 아니면 다른 동행인이라도.”
“역시 알레지오인가.”
대니얼이 쓰게 웃었다. 그러잖아도 제 부관인 그레타의 보고를 받은 뒤, 그날 뷔욘과 스칸다르 사절단의 행렬을 목격한 병사들에게 그날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물은 차였다.
“맞아, 왕자가 알레지오의 마차를 타고 왔대. 그들의 동행 중 스칸다르인이 아닌 건 두 사람. 붉은 머리칼의 여인 하나, 아마 알레지오 영애로 추측. 그리고 하얀 머리의 여인 하나.”
하얀 머리, 그 말을 듣자마자 데메트리안의 눈썹이 꿈틀했다.
“참고로 멜하운 포털에는 왕자 일행과 사절단이 제대로 도착했다고 했어.”
이올린 한센에 따르면 그들은 제대로 포털을 탄 뒤 고티유로 복귀할 예정이었으니, 예상대로였다.
“우선, 그 하얀 머리는 인신매매단의 일원이야.”
“이번 그 인신매매단?”
“거기에 백발의 여인이 있다고들 했는데, 태생적으로 백발인 사람은 없잖아. 그런데 마법으로 신체를 변형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고. 그래서 그쪽으로는 파고들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어.”
“……그러니까 결국, 네 유죄 추정 수사가 맞아떨어진 거네.”
농담 섞어 내뱉는 대니얼의 목소리가 씁쓸하게 울렸다.
“응, 결국…… 알레지오인 거지.”
다짐하듯 말하는 데메트리안의 마음은 퍽 심란했다.
모든 정황이 알레지오 후작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마 순간 이동 마법을 써서 달아난 왕자의 호위 기사와 신관 역시, 알레지오 후작가의 비호를 받고 있을 거였다.
‘가장 쉬운 건 후작저를 덮치는 건데, 결정적인 증거가 없으니.’
그에게 황제의 나팔도 있고 경시청의 배지도 있으니 후작가를 수색하는 거야 일도 아니었지만, 이미 크레벨이 목격한 걸 아는 이상 그들이 협조적으로 나올 리가 만무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잠입하기에는 그쪽에 마법사가 협력하고 있을 테니 쉬운 일도 아니었고.
‘신관과 바꿔치기하려던 자가 정신이 들었다곤 했지만, 내내 환각제에 취해 있어서 쓸모 있는 증언을 얻기가 어렵다고 했지. 어떻게 갇혀 있었는지 실마리라도 알면 좋으련만…….’
퍽 심각해진 데메트리안의 낯을 대니얼의 금안이 지긋이 뜯어보았다.
‘분명히 나한테 말하지 않는 게 있는데.’
인신매매단과 스칸다르 왕실과 알레지오 후작가를 엮어서 데메트리안이 추적한 것이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갔다. 하지만 결국 왕자는 귀국했고,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다른 일에 관심을 갖는 듯하다고 에티엔이 그랬으니까. 그뿐만 아니라…….’
오늘 아침 에티엔이 전해 온 소식을 떠올리며 다시금 대니얼이 눈매를 좁혔다.
‘어제 대신전을 습격한 도적 떼를 체포한 게, 실은 경시청이 아니라 크레벨의 기사단이었어요. 그리고 그 도적 떼가 사실은…… 분리 독립파고요. 그런데 그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공론화하지 않기로 크레벨 소공작과 합의돼 있었다고 합니다.’
데메트리안을 불신하는 건 아니지만 요즘 그의 행보가 평소와는 사뭇 달라서, 에티엔을 통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던 차였다.
‘분명 형님께서 겹그믐의 날을 지내러 가신 걸 알았을 텐데.’
도적 떼로 위장한 분리 독립파는 헌금함을 훔쳐 달아났다고 되어 있었는데, 도대체 그들의 진짜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데메트리안은 그들과 무슨 협상을 한 걸까.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곰곰이 생각하던 대니얼의 뇌리에 그가 요 얼마간 고민하던 부황의 한마디가 불현듯 떠올랐다.
‘네가 보관을 쓸 것도 아니면서 네 형을 흔들 일을 만들지 말거라.’
스칸다르의 왕자를 의심하는 일이 프레더릭을 흔드는 일이라는 듯 말하던 부황. 그리고 프레더릭이 머물던 대신전에서 수상쩍은 일을 벌인 스칸다르의 분리 독립파.
그리고 말을 맞춰서는 분리 독립파를 체포해 인계한 크레벨의 기사단…….
무언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그 연결고리가 조금 답답하다고 느껴질 무렵.
“어떻게든 알레지오 후작가를 뒤엎어야겠어.”
데메트리안이 결기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신매매단에게 납치된 피해자들을 구하기 위해서. 대니얼은 그 뒷말을 그렇게 상상했으나, 데메트리안이 실제로 다짐한 내용은 대니얼로서는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성배를 찾고 스칸다르 왕자의 음모를 낱낱이 까발려서, 제가 겪었던 그 미래가 기미조차 보이지 않게 하는 것.
데메트리안이 그리 다짐하며 제 손을 말아 쥘 때였다.
“크레벨 소공작이십니까?”
복도 안쪽에서 인기척이 나기에 돌아보니, 황실 마법사단의 제복을 입은 여성이 있었다.
“단장님의 전언을 갖고 왔습니다. 얼마 전에 부탁하신 일에 대해 보고드릴 것이 있다고.”
마법사가 내민 것은 마법으로 안전장치가 된 마법사단장의 서신이었다.
“정확한 것은 읽어 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새벽에 제도 내에서 광범위 순간 이동 마법으로 짐작되는 마력 반응을 감지했다는 내용입니다.”
***
저택에 돌아온 클로에는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목욕하고 실내복으로 갈아입는 내내 초조한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다.
‘이따 저녁에 다시 만나기로 했으니까.’
현재 성배가 도난된 것을 아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에 불과했다. 디에크가 미라벨을 알아봤다면 라크루아에도 그들의 감시가 붙을 수 있으니,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했다.
“그 왕자님이 귀국한 직후에 리비에라 강변 남쪽 언덕이 좀 수상했대. 얼마간 유랑 상단이 잠깐 머무는가 싶더니 빈자리에 마법진만 남았다고.”
“……거기 경비가 좀 느슨하다고 그랬었으니까. 귀국하는 척해 놓고 남았다는 그 사절단의 호위들이 거기에 머물렀을까?”
클로에는 데메트리안과 리비에라 강변 남쪽 언덕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그가 아카데미에서 배웠다며 주워섬긴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대가 높은 탓에 그 자체로 성벽의 기능을 하여, 다른 곳에 비해 경비가 허술하다던 그곳.
“그래서 어제 바로 그쪽을 확인해 봤는데, 마침 그 마법진이 대신전 뒤편에 그려졌던 거랑 똑같더래.”
“그럼 어제 그 두 사람이 거기로 도망친 거였겠네.”
“응, 그런데 다른 마법진도 더 없고 말발굽이나 마차 바퀴 자국 같은 것도 없어서, 그다음엔 마법사가 직접 순간 이동 마법을 쓴 모양이래.”
“그다음에 어디로 갔는지가 문제인 거네.”
“……농브르에서 그다음을 추적하기는 했어. 원래 주시하고 있던 곳이 또 따로 있었다나 봐. 문제는 거기에 잠입하기 힘들어서……”
똑똑.
응접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 이야기가 끊기고 말았다.
“캄포 대공녀 전하 도착하셨습니다.”
“으응, 나갈게.”
이리 피곤할 줄 알았다면 약속을 하루쯤 늦게 잡았을 거야, 클로에는 그리 생각하며 대꾸했다.
‘밤을 새워 본 적이 있었어야지.’
루시엔이 분리 독립파에 대해 언급하며 최대한 빨리 만나자기에, 클로에 또한 조급해져 최대한 가까운 날짜에 초대한 탓이었다.
‘분리 독립파에 대해 정보를 하나라도 더 얻으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지금도 그 생각이 달라진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루시엔은 오늘도 수많은 선물의 행렬과 함께 궁정백저에 들어섰다.
“요 며칠 정말로 걱정이 많았답니다. 별일 없으셔서 다행이에요.”
라크루아의 하녀들이 다과상을 차려 두고 나가자마자, 루시엔은 눈썹을 늘어뜨리며 걱정 한가득한 말을 내뱉었다. 그게 앙큼한 친우의 계산된 연기라고 보기에는 퍽 과한 구석이 있었다.
“그, 편지에서 언급하신, 저에게 해를 끼친 이들은……”
“제가 캄포여서 스칸다르 쪽 정세에 밝기도 하지만, 아시다시피 제 오라비가 외무부에서 일하잖아요.”
제대로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루시엔이 고개를 까딱였다. 루시엔의 오빠인 올리비에는 캄포의 대공자인 동시에 오리포네 왕실의 방계라는 혈통을 십분 활용하여 외무부에서 활약하는 중이었다.
“분리 독립파의 활동에 대해서는 외무부에서도 별도로 감시 중이었어요. 그래서 그들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는데…… 소공작께서 그 일당을 풀어 줬다는 이야기가 돌더군요?”
“아, 그건.”
“두 분, 애틋한 사이 아니었어요?”
“네?”
클로에는 마시던 찻물에 사레들 뻔했다.
“게다가 분리 독립파의 수장과 매일같이 만났다니……. 제가 그걸 알고서 얼마나 기함했는데요.”
한들룽 지구에서 알게 된 일이에요. 그리 덧붙인 말만으로도 루시엔이 상황을 어찌 파악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다만, 무언가 잘못 파악한 모양인데…….
“게다가 어제 대신전에서 났던 난리도 분명 분리 독립파의 소행인데, 그전까지 크레벨 소공작이 신전에 계속해서 드나드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 일은…….”
저도 거기에 끼어 있는데요. 루시엔이 무언가 단단히 오해한 기세였지만, 클로에는 선뜻 해명할 수가 없어 찻물만 들이켰다.
“아무리 제가 계승권이 탐난다지만, 영애를 그런 분과 엮으면서까지 지킬 건 아니었단 걸 이번에 깨달았어요. 일전에 슈바츠 거리에서도 영애를 위험에 빠뜨리신 것도 화가 났는데.”
“네?”
“정말 실망스럽네요. 사랑이라도 찾아 드려서 온건하게 파기하려 했더니……. 역시, 서대륙의 극독을 주문해야 할까 봐요. 1년이면 없던 지병도 만들어 준다던데.”
“네에?”
옆에서 미라벨이 쿡쿡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서대륙의 극독이라면 프래즈 부인께서 구해 줄 수 있으니 편지에 당근을 그려 보내라던 그거네…….’
데메트리안이 클로에를 위험에 내몬 것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아주 그릇된 판단에 빠져 클로에의 원수인 분리 독립파와 손을 잡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아니면 최소한, 분리 독립파의 함정에 빠졌거나.
그 기저에는 고티유에 와서 처음으로 사귄 저에 대한 호감이 깔려 있으리라.
저 치밀한 소녀의 깜찍한 호감에 클로에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저, 대공녀.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겹그믐의 날에 일을 벌인 건 모반으로까지 엮을 수 있는 일이에요. 그분이 얼마간 1황자 전하의 뒷조사를 한 정황도 있다고요.”
1황자의 뒷조사를, 하기야 했다.
클로에는 같은 퍼즐을 갖고 루시엔이 내린 사뭇 다른 추론이 저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마음이 복잡해졌다.
“저, 대공녀. 잠시만요.”
클로에가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데미가 분리 독립파와 손을 잡은 건 맞아요. 하지만 그건 황실이 아니라, 스칸다르 왕실을 뒤엎기 위해서예요.”
“분리 독립파가, 스칸다르 왕실에 반기를 든다고요?”
루시엔이 놀란 눈빛을 했다.
“분리 독립파는 스칸다르의 왕자의 후원을 받지 않나요? 그들 중 하나가 최근까지도 알레지오 후작저를 오갔어요. 아무래도 스칸다르의 왕자가 후작저에 남은 모양이거든요.”
클로에는 루시엔이 분리 독립파가 뷔욘의 밑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데 한 번, 알레지오 후작저의 정황에 대해 알고 있다는 데 또 한 번 놀랐다.
잠시간 생각에 빠졌던 클로에가 입을 열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주시겠어요? 스칸다르의 왕자를 추적해야 하는데, 아직 작전을 짜지 못하고 있거든요.”
스칸다르의 왕자. 언젠가 제 부군이었던 이를, 클로에는 그렇게 건조하게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