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분기점: 겹그믐의 날 (10)
“동이 트는 대로 키슬라바령에 서신을 보내고, 담뱃잎을 유통한 곳을 추적하기 위해 경시청을 가동할 거야. 농브르에서 연락이 오는 대로 그들을 추적할 거고.”
“응.”
그 말을 경청하는 클로에의 눈빛은, 보물고에서 반짝이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낯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던 데메트리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웃음기를 내뱉었다.
“여기부터는 내게 맡겨 달라고 해도…… 안 통하겠지?”
“성배가 가짜라는 걸 증명하거나, 블라테르 잎으로 신관을 중독시키려 했다거나…… 내가 증언할 수 있어. 그리고 기왕이면 성배를 되찾는 일까지도 내가 참여하고 싶어.”
그리 말하는 클로에의 눈동자가 간절히 빛났다. 데메트리안이 오래간 되새기며 후회하던 바로 그런 빛으로…….
하지만 제게 바라는 바가 달랐다. 원하지 않는 것을 피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쟁취하게 해 달라는 것.
그 미묘한 변화가 서로에 대한 마음이 자라나는 가운데 맞물려 있었다.
데메트리안은 짧게 웃었다.
“그래, 네가 하고 싶다면야.”
그가 느릿하게 내뱉는 말소리에 클로에의 낯이 자못 밝아졌다. 밤을 새운 피로란 다 잊은 듯이…….
그게 무슨 허락을 구할 일이라고. 데메트리안은 엷게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네가 하고 싶은 거라면 뭐든 해. 네가 못 갈 곳도 없어. 무얼 하든, 어디에 가든……”
제 손안에 그러쥔 클로에의 손을 문지르며 데메트리안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목소리는 언뜻 경건한 듯 울렸다.
“내가 네 뒤를 지킬게.”
거기까지 말하고, 데메트리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덧붙였다. 부담스럽게 느껴질까 싶다가도, 더 이상 내뱉는 데 주저하지 않기로 한 그의 진심.
“목숨을 걸어서라도 말이야.”
“……목숨은 너무 거창하지 않아?”
그리 퉁명스레 쏘아붙이면서도 클로에는 귀 끝이 붉어지고 말았다.
***
라구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6시, 먼동이 훤해진 뒤의 일이었다.
데메트리안이 제작을 맡겼던 마도구가 클로에가 쓰기 위한 것임을 짐작하고 있던 라구는, 클로에의 연락에 꽤나 빠릿빠릿하게 답해 왔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요 얼마간 두 사람이 공들여 준비한 일이 있음은 눈치챈 거였다.
난장판이 된 예배당을 복구하기 위해 어수선한 틈을 타, 일행은 몰래 대신전에서 빠져나왔다. 분리 독립파를 경시청에 인계한 크레벨의 기사들이 섭외해 놓고 간 역마차를 타고서였다.
성배를 탈취해 달아나던 것을 크레벨 소공작과 그 수하에게 들킨 상대들이 주시할세라, 크레벨의 마차를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농브르 아저씨들한테서 들어온 소식 있는지 물어보러 한번 가 볼게.”
“응, 라구 경 만나고서 바로 귀택할 거니까 집에서 만나.”
마차가 앙헬라타 대로에 다다랐을 때, 미라벨이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클로에는 데메트리안과 함께 라구를 만나기 위해 마차에 남았다.
“그, 농브르라는 거…… 유명한 거야?”
“제도 근처에서 활약하는 무인들치고 모르는 이가 없기는 하죠.”
“무예로? 정보력으로?”
“둘 다요. 특히 정보력 쪽은 이번에 일을 맡겨 보니 기대 이상이더군요.”
“……나만 몰랐나 봐, 정말.”
“저희 공자님도 어른 되시고 아셨을 겁니다.”
파이겐이 클로에의 맞은편에 앉은 데메트리안을 턱짓하며 말했다.
간밤에 디에크와 안톤미오노를 쫓으러 갔던 미라벨과 파이겐이 농브르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고 털어놓은 차였다. 농브르의 이름은 남작부인의 본업을 정확히 모르고 있던 클로에에게만 낯선 것이었다.
“유모가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건 알았지만…….”
“비범한 인물인 것도 아셨겠고 말입니다.”
“모든 유모가 호신용 암기술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건 데미 유모 보고서 알았었으니까.”
“네가 나랑 표창 던지기 시합하겠다고 단도 빌려달라고 했을 때, 내 유모가 기절할 뻔했지.”
데메트리안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놀리듯 말했다. 20년을 속았다는 생각 때문일까, 클로에의 입술이 빼죽 튀어나왔다.
“결국 도움을 받았다니 다행이긴 한데, 찾았을까?”
“마법진을 써서 움직였다니 추적하기가 쉽지는 않을 테지만…… 농브르가 우리 의뢰 때문에 왕실저를 주시하고 있었으니, 또 모르는 일이지.”
그리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마음에 작은 여유가 깃들었을 무렵. 역마차가 어느새 그들의 아지트로 쓰이는 데메트리안의 건물에 다다랐다.
3층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피곤한 기색의 라구가 그들을 반겼다. 순간 이동으로나마 일어나자마자 달려오게 된 탓이었다.
방에 들이닥친 이들의 행색이 분명 밤을 꼴딱 새운 이들의 것이어서 라구는 자못 놀랐다.
‘그냥 밤을 새운 것도 아니고,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래서였을까, 그들이 인사치레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음에도 라구는 그러려니 했다. 물론 그건 평민인 라구가 즐겨 쓰는 화법이기도 했지만.
“이번에 의뢰한 마도구에 넣은 장치 말이네. 새로 개발했다는 거. 혹시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해 주었을까?”
“어떤 장치…… 말씀이신가요?”
“신성력을 마력으로 전환해서 마도구를 구동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거 말일세.”
클로에가 제 허벅다리에 매어 두었던 단도를 테이블 위에 올리며 말했다. 라구가 경량화 마법을 걸었다는 거였다. 실제로 신전 내부에서 단도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지는 일은 없었다.
“아아, 그거…… 제 동료들은 다 알고 있죠. 마탑에서는 지식을 모두와 공유하니까요.”
애초에 제 동료가 부탁해서 개발한 거기도 하고……. 라구가 제대로 깎지 못한 수염이 거뭇거뭇한 턱을 쓸며 말했다.
“그럼 혹시 그걸 활용해서 다른 마도구를 제작한 일이 있을까?”
“그건 의뢰인의 개인 정보와 관련된 부분이라, 아무리 영애님이시라도 알려드리기가 좀…….”
라구의 얼굴에 난색이 어렸다. 매사에 태연하게 구는 그에게 낯선 일이었다.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원칙만 따질 수는 없는 상황이지.’
대니얼이 알았다면 네가 그런 생각도 하느냐고 놀릴 일이라 생각하며, 데메트리안이 품에서 경시청의 배지를 꺼내려고 할 때였다. 그 배지는 경시청과 공조하며 얻게 된 것으로, 일종의 영장으로 쓸 수 있는 거였다.
“경의 술식이 아무래도 그릇된 일에 쓰인 것 같네.”
라구를 설득하기 위해 클로에가 목소리를 낭랑하게 울리자 데메트리안의 손이 우뚝 멎었다. 그 말에 라구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제 대신전에 도적 떼가 들었네. 그 틈을 타 성물을 훔친 자들이 있었고.”
그 내용이 제법 충격적이어서, 라구의 연한 눈썹이 한껏 더 치켜 올라갔다.
“대신전 성물이라면…… 캄포의 성배요? 그게 도난당했다고요?”
아무도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아, 라구는 입을 떡 벌렸다.
“절도 현장을 잡았는데, 신전 안에서 순간 이동 마법을 써서 달아났네. 범인은 마법을 못 쓰는 기사 하나와 신성력을 쓰는 신관.”
“그렇다면…….”
“신전 안에서는 마법을 쓸 수 없고, 신성력으로는 순간 이동을 할 수 없으니까 말일세.”
클로에가 라구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눈을 절박하게 빛냈다.
“우리는 스칸다르의 왕실이 제국에 혼란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경의 기술을 썼다고 확신하고 있네.”
꿀꺽, 라구가 마른침을 삼켰다.
신성력을 마도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전환하는 술식은 정말로 제가 이번에 처음으로 개발한 거였다.
몇 달 전 알프레다가 부탁한 일 때문이었으니까.
‘후작이 알게 된 신관이 있는데, 신성력으로 마도구를 쓰고 싶으시다나 봐. 뭐에 쓸지는 모르지만 좀 광범위한 마법을 시전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뭐, 두어 명 순간 이동도 가능할 정도……?’
그렇게 부탁받은 일이었지만, 신관이 성물을 훔치는 데 쓰이리라고는 상상한 적 없었다.
‘그때부터 알프레다랑 술식을 이것저것 공유하기 시작했었지. 그래서 영애님께 만들어 드린 환영 마도구도 도움받을 수 있었고.’
시중에 유통되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상만 흐리게 해 주는 정도인데, 클로에에게 만들어 준 것처럼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환영 마법은 알프레다가 아니면 안 되었으니까.
라구의 얼굴이 수심에 잠긴 걸 본 데메트리안이 넌지시 말했다.
“알레지오 후작가가 개입돼 있지?”
“네? 그건…….”
당황한 듯한 라구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그것만으로도 일행은 라구의 답이 긍정임을 알았다.
한편으로 클로에 또한 놀라고 말았다.
‘어쩐지, 알레지오 후작가가 왕자님과 연이 꽤 깊어 보이더라니.’
알레지오 상점에서 뷔욘과 긴밀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던 알레지오 후작, 그리고 뷔욘과 퍽 친밀해 보이던 알레지오 영애…….
‘게다가 경매장에서 에르드의 심장에 맞먹는다는 루비 목걸이를 알레지오 영애가 거액에 낙찰받았었지.’
라구로 말할 것 같으면,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어 있었다.
물론 그들은 큰손에 제법 고마운 거래처이기도 하지만, 제가 무슨 공방이라도 열자면 꽉 쥐어야 할 거물 고객들이긴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히 말씀드릴 일은 아닌데요…….”
“당장 마음먹기 어려우면 천천히 답해줘도 좋아. 하지만 경, 이건 성물의 문제야.”
그러고 보면 알프레다가 요 얼마간 숙소에 돌아오지 않았다. 라구는 입술을 깨물었다.
***
그날 오후, 겹그믐의 날을 치른 황실에서는 묘한 내용을 공표하였다.
정체불명의 도적 떼가 고티유의 대신전에 침입해 난동을 부렸다. 헌금함을 노리고 대신전에 침입한 것으로, 도주 중에 체포되어 결국 절도는 미수에 그쳤다.
이런 일이 있을 줄 몰라 최소한으로 배치돼 있던 1황자의 친위대는 1황자의 호위를 우선으로 했기에 도적 떼의 소탕에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해당 일로 친위대의 기사들은 징계를 받았으나, 그 이상의 무엇은 없었다.
황실에서 이례적으로 사건 바로 다음 날 해명한 것치고는 싱거운 일이었다. 성배가 탈취된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 전말에 대해 아는 극소수 중 한 사람인 데메트리안은, 그래서 동분서주했다.
키슬라바에 서신을 보내고, 황제의 나팔로 경시청을 가동해 안톤미오노가 소지하고 있던 담뱃잎의 출처를 수색하도록 지시하고…… 본업인 원로원 일을 확인하기 위해 잠시 원로원의 집무실에 들렀을 때였다.
“요즘 왜 이렇게 보기가 힘들어?”
대니얼이 그의 자리에 앉아 그를 반기고 있었다.
최근 보좌관 일을 다 떠맡게 되어 늘 툭툭대는 퓌잘리 누스가 그 덕에 꽤 훈훈한 분위기인 것이 다행인 마음도 잠시, 데메트리안은 다소간 당황스러워졌다.
정말로 잠깐 들르려던 차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현재 그가 골몰한 일이 그의 형인 프레더릭의 부정에 관한 것이었으니까.
“경시청 쪽 일 때문에 좀 정신이 없네.”
그답지 않게 얼버무리는 기색에 대니얼의 금안이 날카롭게 빛났다.
“나가서 얘기 좀 하자.”
“어어, 그래.”
“퓌잘리 경, 다음에 또 보자고.”
“예, 전하, 얼마든지 또 오세요!”
데메트리안 경이 요즘 자리에 붙어 있는 적이 없으니까요, 퓌잘리가 감격한 낯으로 그들을 배웅하였다.
대니얼이 데메트리안을 이끈 곳은 집무실이 자리한 복도의 가장 끝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한 대니얼의 기색 때문인지, 전면이 유리창으로 된 밝은 곳임에도 어딘지 구석진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인데?”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는데.”
주변을 살피던 대니얼이 꺼낸 것은 2황자의 문장이 새겨진 배지였다.
“여기 봐 봐.”
두 개의 깃발이 교차된 아래, 황자의 상징인 아기 사자와 그가 성인이 되며 하사받은 우르드 후작령의 상징인 독수리가 그려져 있었다.
“그레타 경이 갖고 있던 건데 얼마 전에 이런 현상을 발견했대. 그레타 경이 지난주 뷔욘 왕자가 돌아간 날 멜하운 방면 포털 담당이었고.”
다양한 색의 사파이어로 장식된 깃발 부분에, 명백히 마력에 오염된 흔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