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분기점: 겹그믐의 날 (9)
“마력에 오염된 흔적요?”
파이겐이 클로에 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그러고 보면 파이겐만이 클로에가 보석이 마력에 오염되는 현상에 대해 제보한 일의 내막을 몰랐다.
“응, 여기 보면 조금 빛이 다르잖아.”
“모조 보석이나 싸구려여서 그런 게 아니고요?”
“내포물이랑은 모양이 좀 달라. 그런 건 한두 개씩 들어가 있는 거고.”
“아가씨, 보석 전문가 다 되셨군요? 무슨 사업하신다더니.”
클로에가 파이겐에게 제 지식을 뽐내는 사이, 클로에의 사업에 대해 대강 알고 있는 친우들의 낯이 저마다 진지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이 성배 또한 마법에 노출됐다는 소린데…….”
데메트리안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파이겐이 가볍게 대꾸했다.
“아까 그 기사랑 신관이 이동 마법진을 타고 갔으니, 같은 걸 타고 왔을 수도 있겠죠.”
“진짜 성배는 마력에 노출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
“응, 신성력이 깃들어 있으니까. 이건 가짜라 마력에 오염될 수밖에 없었겠고.”
클로에가 데메트리안의 말을 곧장 받았다. 데메트리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생각에 빠져 혼잣말처럼 제 생각을 읊조렸다.
“저번에 구휼 기금 문제 때 그 현상을 제보한 적이 있으니 가짜라는 근거로 제시할 수야 있을 것 같은데…….”
“믿어 주느냐의 문제기도 하지, 아까 루카가 말한 것처럼.”
건성으로 대꾸하며, 클로에는 여전히 성배를 이모저모 뜯어보았다. 잠깐 눈매를 가늘게 하였던 클로에가 곧바로 손사랫짓해 루카를 불렀다.
“루카, 내가 보기엔 이 에메랄드 크기가 조금 작아 보이는데.”
“원래 성배가 사람이 만든 게 아니어서 거기 달린 에르드의 심장 모양이 제각각이라는 건데, 그러게……. 크기만 놓고 보면 균형이 꽤 안 맞네.”
“그렇지? 이것도 성배가 가짜라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에르드의 심장을 모방해서 보석 가공하는 거야 흔한 일이니까.”
클로에와 루카가 대화하는 걸 듣던 데메트리안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스칸다르의 왕자께서 얼마 전에 에메랄드를 주문하셔서 말입죠. 가장 알이 큰 게 이번에 그리돼 버려서, 주문하신 것보다 못 미치는 걸로 납품하는 바람에 값도 제대로 못 받았지 말입니다.”
구휼 기금 절취 건을 수사하기 위해 마력에 오염된 보석을 목격한 상단이 있는지 탐문할 때, 키슬라바 상단주가 하소연하듯 내뱉은 말이었다.
‘키슬라바 상단에서 구한 에메랄드가 바로 저기에 쓰인 거라면…….’
아니, 그럴 확률이 높겠지. 턱을 쓸던 데메트리안의 검지가 그의 입술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키슬라바 상단이 키슬라바령으로 돌아갔으니, 포털을 통해 전령을 보내야 할 거였다.
‘라구 경이 개발한 장치를 누구와 공유했는지 알면 추적하기도 쉬울 테고.’
오늘 마무리하려던 것을 허무하게 놓친 건 아쉽지만, 적들의 정체는 다 알았으니 거의 다 온 셈이고…… 무엇보다 증거는 많을수록 좋았다.
그래, 원래 계획대로 오늘 절도범을 체포했더라면 자칫하면 왕자가 꼬리를 잘랐을 수도 있는 법.
‘전화위복이 될 수도…….’
그리 생각하며 데메트리안이 입을 열었다.
“키슬라바 상단에서 왕실저가 에메랄드를 구입했다고 했어. 보증서 사본을 보관하고 있을 테니까, 대조해 보면 이 에메랄드가 키슬라바산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거야.”
확신에 찬 어조였다. 대륙 최고의 에메랄드 광산에서 나오는 최고급 에메랄드인 만큼, 그 색이나 순도, 내포물의 위치 같은 것들을 서류로 꾸려 신전의 보증을 받아 놓았을 테니까.
그 말을 들은 클로에가 계획을 가늠하는 듯, 팔짱을 끼고 미간을 슬며시 찌푸린 채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그럼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전령을 보내고…… 또, 라구 경한테 미리 통신을 보내 놓을까.”
제가 혼자서 하려던 일에 그녀가 함께 열중해 있는 모습……. 마음이 뿌듯해진 데메트리안은 흐물거리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내뻗어 자잘하게 주름진 그 고운 미간에 엄지를 대었다. 그 모든 고민을 나누어 가벼이 해 주고 싶은 마음을 담아서…….
“응, 우선 올라가서.”
쉬면서 생각해 보자. 피로가 드러난 그녀의 낯이 안쓰러워 꺼내려던 말이었는데.
“그 신관의 거처로 가 보자. 루카, 갈 수 있지?”
“로이?”
그가 제게 뭘 한지도 모르고서 클로에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그녀의 미간에 맞닿았던 데메트리안의 손만 어색하게 허공에 멎고 말았다.
평소라면 진즉에 잠들었을 시간이었다. 오늘 낮부터 밖에 나와 긴장감에 떨다가, 그 긴장한 몸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지 않았던가.
황망해하던 눈동자에 걱정이 들어찼다.
“그 신관, 분명 여송연 부작용에 중독돼 있었어. 슈바츠 거리에서 봤거든.”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로에의 말소리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단순히 회유한 게 아니라 환각제에 중독시키기까지 한 거라면 꽤나 질이 낮은데…….’
그녀가 자꾸 무리하려는 것만 같아 마뜩잖으면서도, 그 내용이 사뭇 심각하여 데메트리안은 선뜻 제지할 수 없었다.
“갈 수야 있고, 가 봐야 하기도 하지. 어쨌든 교단의 배신자니까…….”
따라오라는 듯이 손짓하며 보물고를 나가며, 루카는 연신 욕지거리를 주워섬겼다. 그와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선임 사제로서 그를 내심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 그 새끼 실실 처웃으면서 나한테 친한 척 ×× 떨 때부터 알아봤어. ×× 고상한 척은 혼자 다 떨어 놓고, ××…….”
앞장서는 루카의 어깨가, 왠지 모르게 조금 힘이 빠진 듯 보였다.
안톤미오노의 방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루카의 응접실이 성소 생활에 마음을 붙이지 못한 탓에 세간살이를 들여놓지 않아서 깔끔했다면, 그의 방은 고결한 성정이 반영된 거랄까.
그가 성물을 훔쳐서 교단을 배신한 이상, 그에게 ‘고결’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지 싶어지는 것이었지만…….
“떠날 준비를 하느라고 이렇게 다 치워 둔 건가?”
“……그는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 될 예정이었어.”
“아.”
‘예정’을 언급하는 데메트리안의 말에 친우들의 표정이 짤막하게 굳었다. 오히려 파이겐만이 분리 독립파와 합의해 놓은 상황을 대충 파악하고 있어 놀라지 않았다.
“체격 비슷한 이를 섭외해서 사제복을 입혀 놓고 살해할 예정이었대. 그 사람을 죽이지 말고 함께 투항하라고 했어. 인신매매 사건에 대한 증인이 될 테니까.”
“분리 독립파가 누굴 죽인 건…….”
“살인은 처음이지. 테러도 아니고. 아무리 상대가 환각제에 취해서 무방비라지만…….”
데메트리안이 설명하는 상황에 대해 듣는 클로에의 낯이 점점 어두워졌다.
‘사람 죽는 이야기를 듣는 건, 아무래도 끔찍하게 느껴지려나.’
그녀는 저처럼 무예를 수련한 것도 아니고, 일로서 사람을 죽고 죽이는 일을 접한 적도 없고……. 과한 이야기를 했나 싶어 데메트리안이 클로에에게로 한걸음 다가설 때였다.
“그럼, 이번에는 그 사람 산 거지?”
“응? 응, 그럼.”
“인신매매단에 납치되었던 사람인 거고? 환각제에 취했다는 걸 보면.”
“맞아.”
클로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돌아와서 미래를 바꾸면서, 적어도 한 사람의 목숨은 살린 거네.’
그리 생각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열의에 빛났다.
뿌듯함에 꼬옥 쥔 주먹이 의미하는 바를 짐작하던 데메트리안은, 그녀의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오른 것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쨌든 이 일이, 그녀에게 괴롭지 않게 다가간 것이리라.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즐거운 건가?’
클로에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걸 얼마 만에 보았더라.
뛰어노는 것만으로도 성취가 되었던 어린 시절, 둘만의 독서회에서 저를 말문 막히게 했을 때, 리도테의 졸업 시험에서 학술원에 진학하는 펜세르 영애 다음으로 차석을 차지했을 때, 또 최근에는…….
‘대축일 주간 장터에서 광대탈을 잡았을 때? 분리 독립파의 아지트를 습격했을 때……?’
기실 데메트리안의 추측은 꽤나 정확한 것이었다. 제가 뛰어듦으로써 조금이라도 달라진 게 있다는 사실에 클로에는 퍽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루카, 기억하지? 에티엔이 사교클럽에서 그분 마주쳤다고.”
“어, 그때 사과하겠다고 찾아왔었잖아.”
“사교클럽에서?”
제가 모르는 이야기에 데메트리안이 끼어들었다.
“응, 4월쯤이라고 했던 것 같아. 사제 하나를 사교클럽에서 마주쳤는데 루카인 줄 알았다고.”
그 말을 듣는 데메트리안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4월이라. 여송연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이 최근의 일이지만, 그게 아르투젠에 들어온 건 더 오래됐다고 했으니까…….’
데메트리안이 그리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클로에는 미라벨과 함께 방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살해된 걸로 위장하셨다면 이 방을 특별히 깔끔히 치운 건 아니겠지?”
“귀중품 같은 건 가져갔겠지만 말이야.”
클로에와 미라벨이 대거리하며 침대 아래와 서랍장 등을 뒤적이자, 루카가 재빨리 따라붙었다.
“뭐 찾는데?”
“환각제를 쓰셨다면, 그리고 그게…… 에티엔이 봤을 때부터 계속된 일이라면 분명 중독되셨을 거거든.”
“그럼, 찾으려는 게.”
“으응, 잘하면 성소에서도…… 혹시 모르니까.”
아무래도 불경한 이야기인지라, 클로에가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환각제에 중독됐을 증거를 찾는다는 거였다.
검소하고 단출한 살림이어서, 성소 안 어느 방에나 있는 가구 몇 가지를 뒤지자니 어렵잖게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었다.
“이거다.”
책상에 딸린 서랍 맨 아래 칸에 보관돼 있던 양철 케이스에서 말린 약초 한 움큼이 나왔다. 톱밥처럼 짧게 말려 있는 것이, 스칸다르의 생태에 대한 책에서 읽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밑에는 담뱃잎 여러 장이 싸인 헝겊 꾸러미가 함께 있었다.
“담뱃잎에 이걸 말아서 태우면 환각 증상이 온댔거든.”
“……우리 할망구 일어나시는 대로 보고해야겠구먼.”
아무리 에르드의 교리가 사제에게 금욕을 요구하지 않는대도, 환각제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게다가 성물 절도까지. 루카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데메트리안도 고개를 내밀어 클로에가 발견한 것을 살폈다. 그 헝겊 꾸러미에 그려진 문양은 양철 케이스 뚜껑에 그려진 것과 동일했다.
“……스칸다르산 여송연 판매 경로를 추적할 때, 이 상표를 본 적 있어.”
스칸다르 왕실의 음험한 구석을 하나라도 더 발견하기 위해 애쓰던 때의 결실이었다.
***
손님방의 침대 하나를 차지하고 누운 급사 아이들은 무슨 난리가 일어났었는지도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아이들이 밤에 일어나 당황하지 않도록 루카가 신성력을 활용해 깊이 재워 둔 덕분이었다.
저 멀리 새벽 별이 떠오를 때까지, 농브르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라구에게도 일어나는 대로 답해 달라고 연락을 넣어 둔 차였다.
“답 올 때까지 한숨 자 두는 게 어때?”
데메트리안이 클로에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루카가 준비해 주고 간 따뜻한 곡차를 한잔 건네면서였다.
희미한 별빛이 그들이 앉은 창가를 비췄다.
“마음 편히 잘 때가 아니잖아.”
“그래도 꼬박 밤을 새웠는데.”
클로에는 대답하는 대신 찻잔 안의 수면에 시선을 던졌다. 수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 수면이 고요한 것이 언뜻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가라앉은 기색에서, 데메트리안은 얼마 전 리비에라 강변에서 그녀의 흐려졌던 낯을 떠올렸다.
‘어떻게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할 수 있겠어?’
무언가 제가 또 주제넘었던 걸까. 데메트리안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오늘 하루가 정말 길었잖아. 다 끝난 것도 아니고.”
“으응, 엄청 긴장했었지.”
그렇지만 소득이 없으니까, 그 말을 클로에는 입안에 숨겨 두었다.
그때, 데메트리안의 손이 조심스레 찻잔을 쥔 클로에의 양손을 모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