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분기점: 겹그믐의 날 (8)
그리 말하며 데메트리안이 출구 쪽으로 뛰기 시작하자 미라벨이 바싹 따라붙었다. 민첩하기로는 그녀가 이들 중 단연 일등이었던 것이다.
“그게 뭐예요?”
“마력 반응을 감지하는 겁니다. 신성력을 활용해서 마도구를 구동할 경우에도 감지되게 해 놨어요. 신관이 한 패라니 혹시 몰라서…….”
“먼저 가 볼게요!”
설명을 들은 미라벨이 발을 굴러 속도를 올렸다. 일전에 보물고 견학 덕에 지리를 익혀 놓은 터라 내딛는 발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파이겐이 데메트리안에게서 마력 탐지기를 건네받고서 그녀를 바싹 따랐다.
나머지 일행도 지하 통로를 빠져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보물고에서 통로를 지나 계단을 타고 예배당으로 올라오기까지, 그곳을 경비하는 인원은 정말로 단 한 명도 없었다.
“얼른 물 끼얹어! 빨리, 빨리!”
“저기, 달아난다! 막아!”
“조심해! 무너져!”
예배당 내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예배당 곳곳이 불에 타 평소의 경건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디에크와 약속된 시간이 다 되어서인지 도적 떼로 위장한 분리 독립파가 예배당에서 퇴각하려 하고 있었다. 그들을 막기 위해 신전 경비대가 분전하고, 그들이 지른 불을 끄기 위해 평사제들이 발을 동동대었지만…… 그 어느 곳에도 황실의 친위대는 보이지 않았다.
‘저 소란이 안 들릴 리가 없는데.’
데메트리안은 기도실이 자리한 제단 뒤편의 석실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프레더릭으로서는 이곳에 황태자의 책봉에 의견을 낼 수 있는 크레벨의 일원이 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거였다.
“데미, 어서.”
클로에가 재촉하는 말에 데메트리안은 고개를 작게 까딱이고는 예배당 곁문으로 빠져나갔다.
“에이, ××…….”
그들을 따라 나온 루카는 난장판이 된 예배당을 심란한 낯으로 바라보다가, 입술을 꾹 깨물며 평사제들 쪽에 합류했다. 그의 신성력으로 물을 축성하면 불길을 잡는 데 도움이 되리라.
데메트리안이 겪었다는 그때에는 분명 저는 휴거를 빌미로 외출하였거나, 모른 척 깊이 잠들어 있었을 게 빤했다.
대신전 뒤편 담장 너머,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 있는 숲에 두 사내의 신형이 불쑥 나타났다. 털푸덕, 파이겐과 검을 맞대고 있던 디에크가 무게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쓸 만하군.”
하아, 하, 참았던 숨을 몰아쉰 디에크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마법사가 신성력을 써서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는 마도구를 챙겨 주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크레벨 놈들에게 잡힐 뻔했다. 그 벌렁거리는 심장을 내색하지 않은 채 디에크는 무릎을 털며 일어났다.
그의 뒤에 선 안톤미오노는 성배가 담긴 주머니를 끌어안고서,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어린 시절 신성력을 발현한 이래로 주신의 품 안에서 살아가는 삶 외의 것이란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던 그였다. 신전에서 나간다는 것 또한, 고티유 대신전에 배속돼 온 20여 년 전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 이렇게 되기까지는…….
그는 결국 이렇게, 교단을 배신하고 말았다.
주머니 너머로 전해지는 성배의 딱딱한 감촉이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아르투젠이 여러 왕국을 제국으로 통합한 정당성의 상징, 에르드 어머니께서 인류를 품으셨다는 의미로 지상에 남겨 두신 보물, 캄포의 성배.
7년 전 그가 보물고 담당 신관이 된 이래로 대축일 예식 때마다 대신관에게 건넸던 바로 그 성물.
‘주신도, 대신관도 모두…… 내가 바라는 거엔 관심도 없었으면서.’
으흐흐흐, 웃음도 울음도 되지 못한 괴상한 소리가 그의 잇새에서 났다. 어느새 주르륵 흐르고 있는 눈물이 그의 턱을 따라 뚝뚝 떨어졌다.
“여기 어디, 마법진을 설치해 놨다고 했는데.”
그런 안톤미오노의 낯을 못 본 체하며 디에크가 바닥을 살피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만들어 준 마도구는 대신전 뒤편 숲쪽에 무작위로 떨어지게 되어 있는 거였다.
‘상단들 털 때 기억하지? 그땐 내가 같이 움직였잖아. 마법진을 그려 두면 내가 없어도 가능하지만, 마법진이 없으면 나처럼 시전자가 필요해. 시전자가 없으면 마도구의 기능이 많이 떨어져. 신성력도 결국은 마력이 아니라서 정교한 제어가 불가능하고,’
크레벨 놈들이 뭐라도 아는 것처럼 들러붙기에 혹시나 해서 장만한 거였는데, 정말로 쓰게 될 줄이야.
디에크는 얼른 대신전 근방에서 몸을 빼기 위해 마법사가 미리 작업해 두었을 이동 마법진을 찾으러 바닥을 살폈다. 어디 나무 아래 그려 놨다고 했는데…….
“저기예요!”
그때, 멀리서 이편으로 달려오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기척은 하나인데 대화하는 소리가 나는 게, 한쪽의 은신술이 퍽 뛰어난 모양이었다.
“……젠장.”
어떻게 이렇게 빨리? 목소리가 난 곳을 따져 보면, 여기서 한 300에트 정도 거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였지만, 시간이 없었다. 이 나무도 아니고, 저 나무도 아니고, 저쪽일까, 그 옆쪽일까. 디에크가 그 근처의 나무들을 하나하나 살피는 동안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퍽 가까워졌다.
“신관님.”
디에크의 채근에 안톤미오노도 나무 밑동 쪽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어린 은은한 빛무리 덕에 시야가 다소간 확보되었다.
“도대체 어디에 해놓은……”
“윽!”
쐐액, 공기 가르는 소리가 짧게 나더니, 안톤미오노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종아리에 단도가 날아와 박힌 채였다.
안톤미오노는 성배가 든 주머니를 한 팔로 안고서, 단도를 뽑아 바닥에 내던졌다. 그가 신성력을 사용해 지혈하는 사이 디에크가 몇 그루 떨어진 곳에서 이동 마법진을 발견했다.
“이쪽입니다!”
“……큿.”
안톤미오노가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제대로 처치하지 못한 채 신성력을 불어넣은 상처가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가 힘겹게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을 때.
쐐액, 쐑-.
단도 두어 개가 더 날아왔다. 어둠 속이어서 정확히 노린 곳은 모르겠으나 그들의 진로를 방해한 것만은 확실했다.
탁탁탁, 더 이상 기척을 숨기려는 기색도 없이, 미라벨이 보라색 포니테일을 대롱이며 저 멀리서 나무들 사이로 날아 왔다. 그 뒤를 파이겐이 따랐다.
“멈춰!”
챙! 미라벨이 조급한 마음에 단도를 하나 더 던졌지만, 디에크의 검격이 손쉽게 걷어내었다.
미라벨과 파이겐이 다다른 것보다, 안톤미오노가 절뚝거리는 다리로 디에크의 곁에 다가선 것이 조금 더 빨랐다. 그의 손을 잡아챈 디에크가 재빨리 발걸음을 내디뎌 마법진 위에 자리하였다.
“안 돼!”
미라벨의 새된 목소리가 울릴 무렵, 바닥의 마법진을 따라 빛무리가 피어나더니 그 속으로 디에크의 신형이 빨려 들어갔다. 그의 손에 잡혀 있던 안톤미오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이씨, 또!”
“아가씨!”
미라벨은 이를 빠드득 갈고는, 두 번 연속으로 놓치자니 약이 올라 재빨리 그가 사라진 마법진 쪽으로 뛰어갔다. 저 너머에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욱하는 마음에 그들을 따르려는 거였다.
“라비, 안 돼!”
처음 듣는 목소리가 미라벨의 애칭을 불렀다. 미라벨이 멈칫했을 때, 그들을 은신용 활동복을 입은 무사 다섯이 그들을 에워쌌다.
그들과 적대하지 않는, 누가 봐도 무예를 수련한 자들…….
‘엄마 동료들!’
미라벨로서야 그들의 정체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건 말건, 미라벨은 내처 걸음을 내디뎌 마법진에 발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어라?”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흠흠, 이동 마법진의 연결을 끊은 모양입니다.”
한가운데 자리한 사내의 목소리에 파이겐이 작게 놀랐다. 농브르와 정보 거래를 할 때 마주하던 그 왜소한 중년인이었다. 아까 미라벨을 부른 것 또한 그였다.
“농브르 아저씨들이 무슨 참견이시죠?”
말을 툭 내뱉은 미라벨의 노란 눈동자가 꼼꼼하게 사내들을 훑었다.
파이겐 또한 덩달아 긴장했다. 기실 그는 미라벨로부터 당분간 농브르의 인사들이 추가로 호위할 거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늘 긴장해 있었다. 제도에서 검 좀 잡는다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농브르의 이름을 얼마쯤은 경외하는 거였으니까. 그에게는 그 외에도 이유가 몇 가지 더 있었지만.
하지만 미라벨만은 불경하게도 그들을 세모눈으로 훑어보는 거였다.
단주 대행을 맡는 중년인이 파이겐과 거래할 때처럼 은근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까 그들을 추적하려는 거지?”
“말씀대로 마법진의 연결이 끊겨서 불가능하게 되었지만요.”
미라벨이 경계심을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누가 봐도 농브르의 단원인 저들 앞에서 전후 사정을 섣불리 내뱉지 않는 것이 합격이었다. 단주 대행 중년인, 그러니까 변장한 누아제트 남작부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제 딸을 뜯어보았다.
보물고가 있는 지하까지 따라갔던 이가 있어서 상황에 대해 대강은 아는 차였다. 하지만 그들이 대치하는 정확한 연유까지는 몰랐다.
“라크루아 아가씨께서 쫓는 일이고?”
“맞아요.”
“아가씨께서는 무사……”
“합니다, 예, 무사해요. 크레벨 소공작이 그쪽에 붙어 있어요.”
남작부인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아닌 척해도 제가 클로에의 전담 호위인데 누군가가 더 붙은 것이 마뜩잖은 모양새였다.
그러고 보면 농브르가 저들의 의뢰 때문에 스칸다르 왕자의 뒤가 구린 부분을 조사한 것이 떠올라, 파이겐은 흥미진진하게 사내와 미라벨의 대치를 지켜보았다.
“혹시, 스칸다르의 왕자와 관련된 일인가.”
미라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라크루아 아가씨께서 하시는 일까지 필요한 만큼 도우라는 것까지가 우리가 받은 의뢰요.”
“…….”
그 말을 들은 미라벨은 미간을 살포시 좁힌 채로 중년인을 살폈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데다, 미라벨은 모르지만 인상을 흐리게 하는 마도구까지 쓰고 있어서 그의 낯에 떠오른 기색을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엄마의 오랜 동료들 아닌가. 엄마가 부르는 내 애칭까지 알고 있는…….
“신전의 성물을 훔쳐 달아났어요. 저들을 추적해서 공식적으로 황실에 스칸다르 왕실을 고발해야 합니다.”
생각보다 퍽 큰 스케일에 놀랐던 것도 잠시. 신전에서 이 상황을 방조한 1황자 프레더릭과 뷔욘 사이의 연결고리를 알고 있는 남작부인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농브르의 명예를 걸고 추적하지.”
이내 농브르의 사내들이 수풀에서 사라졌다.
***
루카가 보물고를 열 수 있다는 사실을 신기해해야 할지, 가짜 성배가 너무도 정교하다는 사실을 신기해해야 할지.
‘루카, 너 지금도 보물고 열 수 있어?’
3년 뒤에는 그럴 예정인데. 예배당의 정리를 돕고 있던 루카를 찾아 데메트리안이 다짜고짜 물은 말이었다.
미라벨과 파이겐이 허탈한 마음으로 합류하자, 데메트리안은 우선 가짜 성배를 확인하는 것을 택했다. 진짜를 못 찾아도 보물고에 가짜가 있다는 것만 확연해지면 공론화할 수 있으리라.
디에크와 안톤미오노의 추적에는 농브르가 나섰으니, 그들은 날이 밝는 대로 수사망을 좁혀 보자는 거였다.
“이거 정말 정교한데요…….”
성배를 가까이에서 본 적은 없지만, 무언가 성물 같아 보이기는 했다. 파이겐의 말에 루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루카, 너도 못 알아보겠어?”
“……신성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 나야 아닌 걸 알지만, 황자가 얽힌 이상 평사제 나부랭이의 증언은 별 소용이 없을걸.”
“너 말고 다른 사제들은.”
“평사제들은 대부분 신성력이 없고, 고위 신관 놈들은 다들 그 새끼랑 친했어서 어찌 나올지 모르겠다.”
대신관 할망구나 좀 기대해 볼 만한데……. 루카가 그리 중얼대며 턱을 문지를 때였다.
“잠깐만.”
클로에가 성배 쪽으로 다가갔다. 가짜라는 확신이 있어서인지 이리저리 둘러보는 손길에 거침이 없었다.
“여기, 마력에 오염된 흔적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