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분기점: 겹그믐의 날 (7)
‘퇴각할 때 서편 담장을 넘어 나오게. 크레벨의 기사들에게 체포된다면 한 달 안에 경시청에서 빼내 주겠네. 이 일에 가담한 게 분리 독립파라는 사실이 아르투젠에 퍼질 일은 없으리라 약조하지.’
대신전이 자리한 야산의 자락에 은신한 채 대신전을 내려다보며, 이올린 한센은 곡도曲刀를 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배신.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너희의 신념을 돈으로 사겠다는 거다.’
10년 전 거액의 돈을 갖고서 저들을 찾았던 저희들의 왕자 전하께서는 확실히 그리 말씀하셨다.
그것이 신념껏 수백 년간 분리 독립파가 해 온 일들을 하게 해 준다는 보장일 줄 알았지, 신념도 아닌 일을 제국을 어지럽힌단 미명 아래 해야 한다는 의미이리라고는 어찌 상상할 수 있었을까.
“배신당한 건, 우리야.”
이올린이 잇새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내내 생각하던 말을 내뱉고 나니, 그 말이 파동이 되어 그녀를 둘러싸고 선 동지들의 마음을 울렸다.
“리카야 왕녀님이 딸로 태어나신 걸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많았지.”
“그래, 씨이, 제국도 아직 여제가 없었는데 우리가 먼저 여왕 한번 모셔 보지.”
“나는 이제 어디 가서 돈 훔쳐 오란 명만 안 내리면 성군이라 치기로 했어.”
이올린 한센이 분리 독립파의 수장이 되고서 근 20년. 그 세월을 함께해 온, 몇 안 남은 동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투덜거려 주었다.
“수장, 자정이야.”
“출발하지.”
그녀의 말이 신호가 되어, 십수 명의 발걸음이 산자락을 타고 멀어져 갔다.
***
땡땡땡땡땡땡땡땡.
“불이야!”
“도적이 들었다!”
도적 떼로 변장한 분리 독립파가 예배당에 침입했을 때, 클로에 일행은 성소의 손님방에서 나와 지하의 보물고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뒤늦게 달려간 경비대와 분리 독립파가 칼 부딪는 소리, 집기들이 부서지는 소리, 불을 끄기 위해 경비대가 허겁지겁 물동이 들고 뛰어다니는 소리.
예배당의 법석대는 소리가 저 멀리서 아스라하게 들려왔다. 모두가 성소에서 휴식하고 있던 겹그믐의 날이어도, 갑작스레 경보음이 울리니 경비대건 사제들이건 나와 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헌금함을 훔치는 것도, 일단 그대로 하기로 한 거야?”
긴장을 떨치려는 듯 클로에가 속삭였다. 그녀의 바로 앞에서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기던 데메트리안이 제 귓가에서 울린 말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루카가 언급했던, 성소에서 보물고 뒤편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있었다. 보물고 입구에서 한참 먼 곳이라지만, 지금쯤 혼란을 틈타 보물고로 향하고 있을 자들이 있다 생각하니 자연스레 목소리를 낮추게 되었다.
“그들이 작전대로 움직여 주는 게 우선이야. 불을 지르면 성배 탈취를 담당한 이가 잠입하고, 저들이 헌금함을 들고 달아날 때 뒷문으로 빠져나간다는 게 작전이랬으니까.”
“××, 불신자 새끼들, 신전이 아주 동네북이지.”
맨 앞에서 앞장서고 있는 루카가 아이들과 있을 때 드러내지 못했던 제 원래 말버릇으로 중얼대었다. 그가 데메트리안과 파이겐 두 사람 너머에 있대도 비밀 계단의 공간이 좁아 선명하게 들렸다.
나선으로 된 가파른 계단을 다 내려가자, 클로에가 안톤미오노의 안내를 받아 구경했던 대신전의 지하가 펼쳐졌다.
“동선을 아무리 상상해 봐도 이쪽으로는 절대 오지 않을 거라, 여기서 대기하는 게 좋겠더라고.”
그리 말하며 루카가 계단참에서 이어지는 작은 홀로 그들을 안내했다. 보물고 뒤편에 자리한 그 공간은, 포도주가 든 오크통 몇 개와 안 쓰는 예배당 집기를 모아 두는 등 일종의 창고로 사용되는 듯했다.
문이 달리지 않은 문구멍을 통해 보물고의 입구로 직통하는 통로가 보였다. 이쪽에 조명이 없고 벽의 각도가 어슷해서 그 통로에서는 이편이 보이지 않을 거였다.
“저 통로 반쯤 가면, 저기 기둥 보이지? 양옆으로 움푹 들어간 곳이 있어.”
일행은 문구멍을 통해 루카가 말하는 곳을 살펴보았다. 일전에 보물고를 견학할 때, 그쪽에 작은 성화 몇 개가 걸려 있는 것을 안톤미오노가 소개해 준 기억이 났다.
“저기 잠복해 있으면 놈들이 보물고에서 나올 때 시야에 걸리지 않을 거야.”
“어렸을 때 숨바꼭질 좀 한 보람이 있었네, 잘 찾은 걸 보면.”
“어휴, ××, 성국 아카데미 때 성전 건축학, 뭐 그런 ×같은 수업 귀에 쑤셔 박다 보면 모를 수가 없어.”
미라벨의 너스레에 루카가 한껏 경박한 말투로 어깨를 떨며 답했다.
“그런데 괜찮을까? 그들 무리에 마법사가 있잖아. 왜, 구휼 기금 탈취할 때 순간 이동 마법이 쓰였으니까.”
“모르시나 본데 신전에서는 마력이 무효합니다요.”
클로에가 조심스레 낸 말소리에 루카가 또 밉살스레 답했다. 그걸 한번 흘겨 주고서, 클로에는 곰곰 생각에 빠졌다.
“하긴, 보석 정화하는 거 생각하면 신성력과 마력이 서로 밀어내는 셈인가……. 아니, 그런데 그럼 나 속에 받쳐 입은 가죽 갑옷도 경량화 마법이……”
“그거로 말할 것 같으면, 저 새끼가 며칠 전에 나 찾아와서는.”
“쉿.”
클로에와 루카가 조잘거릴 때, 통로 쪽을 주시하던 데메트리안이 나직하게 내뱉었다. 그의 손짓에 친우들은 문구멍 양옆으로 몸을 숨겼다. 사각지대여도 혹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통로에 두 사내가 등장했다. 두건을 쓴 건장한 청년의 앞으로, 사제용 로브를 걸치고 후드를 눌러 쓴 사내가 느릿하게 걷고 있었다.
“로이, 저 사람…… 우리 슈바츠 거리에서 봤던…….”
클로에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미라벨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인치고 다소 큰 키지만 무예를 수련하지는 않은 몸 위로 사제용 로브를 걸친 뒷모습은…… 언젠가 슈바츠 거리에서 그녀들이 목격했던, 에르베르의 친교 클럽에서 비틀대며 쫓겨나던 그 사제였다.
“겹그믐의 날에 악마가 드나든다더니, ××, 저 ×같은 새끼 지 얘기였구먼. 악마 ×이나 × 새끼.”
그 중얼거림으로써 루카가 그의 정체까지 확인해 주었다. 아무리 사이가 소원해도, 몇 년을 같은 건물에서 부대끼고 산 이였다. 로브 뒤집어쓴 뒷모습정도로 알아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르르륵.
통로 너머에서 석재 긁히는 소리가 났다. 안톤미오노가 신성력을 사용해 돌로 된 보물고의 문을 연 모양이었다.
보물고 안쪽의 조명이 새어 나오는지 통로가 한껏 밝아졌다가, 다시금 어두워졌다.
“가지.”
데메트리안이 손짓하자, 파이겐과 미라벨이 가벼운 몸짓으로 문구멍으로 나갔다. 그 뒤를 데메트리안이, 그리고 클로에가 따랐다. 전투력이 없는 루카는 그곳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저 무사가 누구인지만 확인할게.”
절대로 위험하게 안 굴게. 클로에가 데메트리안의 뒤를 따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미 그의 뒷모습만으로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던 차였지만…….
그녀가 결심한 바를 모르는 게 아니어서, 데메트리안은 뒤를 돌아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클로에의 낯에는 결의와 불안함 같은 것이 뒤섞여 있었다.
통로를 반쯤 지나자, 과연 루카가 말한 대로 벽 양쪽에 기둥을 따라 퇴창처럼 움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둘씩 갈라 파이겐과 미라벨이, 데메트리안과 클로에가 한쪽씩 들어갔다.
보물고에서 바깥으로 통하는 길은 이곳 하나뿐. 그들이 방심한 채 이곳을 지나갈 때 급습한다는 것이 일행의 계획이었다.
그르르륵.
얼마 지나지 않아, 석재 긁히는 마찰음이 다시금 났다. 복도가 환해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저벅, 저벅, 저벅, 두 사내의 발걸음 소리가 묵직하게 복도를 울렸다.
데메트리안의 바로 옆에 바싹 서서 벽면에 몸을 붙인 채, 클로에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성배를 들고나오고 있는 거겠지…….’
저벅, 저벅, 저벅, 남자들의 발자국 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캉! 데메트리안과 눈빛을 주고받은 파이겐이 휘두른 검이, 앞서 있던 사내의 검에 걸리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검격을 받아친 사내의 낯에 당황함이 흘렀다.
“뭐냐!”
“오호, 우리 구면이지?”
검을 맞댄 채 먼저 통로로 나온 파이겐이 즐겁다는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데메트리안이 파이겐의 뒤에서 사내들의 낯을 확인했다. 미라벨과 클로에는 통로로 나오지 않은 채 기둥 뒤에 서서 통로의 상황을 훔쳐보았다.
두건을 쓴 체격 좋은 검사의 낯에는, 몇 주 전 파이겐에게 당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역시, 맞았어.’
뷔욘의 호위기사, 디에크였다.
‘정말로 왕자님이 개입한 일이었어.’
그의 낯을 확인한 클로에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 손끝에 허벅지에 매달아 둔 단도의 손잡이가 걸렸다. 데메트리안이 맞춰 준 엘타늄 금속으로 된 단도였다.
‘정말로 성배 약탈이 스칸다르의 소행이었고, 스칸다르에서 그런 음모를 꾸몄다는 것만 증명만 하면……!’
클로에가 맞은편의 미라벨과 시선을 맞추었다. 클로에가 고개를 까딱여 보이자 미라벨이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제국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
두 아가씨의 낯에 희미한 희망과 결의 같은 것이 스쳤다. 결국에 확인하고 만, 뷔욘에 대한 어슴푸레한 실망감까지…….
“벌써 한 달이 다 돼 가니 상처도 다 아문 모양인데. 아쉬우니 하나 더 만들어 볼까?”
“…….”
예기치 못한 파이겐과의 조우에 디에크의 연파랑 빛 눈동자가 떨렸다. 통로 벽면에 걸린 램프 속 불꽃이 두 사람의 살기에 흔들렸다. 성화聖火의 푸른 불꽃이 맞물린 검날을 타고 예리하게 빛났다.
그그그그극, 두 칼날이 맞닿아 긁히는 소리가 대기를 울렸다. 파이겐이 팔을 한번 크게 휘둘러서 검을 미끄러뜨렸다가, 이내 다시 내리그었다.
캉! 순식간에 자세를 고쳐 잡은 디에크가 제대로 검을 맞받았다.
“고위 신관께서 보물고에서 스칸다르인과 무얼 하셨을까.”
파이겐의 등 뒤에서 데메트리안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디에크를 알아본 파이겐의 말소리와 클로에의 표정에서, 그가 왕자의 수하임을 확신한 터였다.
디에크의 뒤에 있는 사제 로브를 입은 사내, 안톤미오노가 손에 든 가죽 주머니를 끌어안았다.
‘저 안에 성배가 있는 거겠지.’
디에크를 파이겐에게 맡겨 두고서, 데메트리안이 안톤미오노에게 다가가기 위해 걸음을 내디딜 때였다.
“신관님, 그걸.”
근처에 있는 사람들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디에크가 중얼거렸다. 안톤미오노가 손을 뻗어 디에크의 등을 짚었다.
루카가 클로에를 치유할 때처럼 안톤미오노의 손이 가닿은 쪽에 빛무리가 어리더니……
삑! 데메트리안의 품에서 경보음이 울렸을 때였다.
“……뭐야!”
갑작스레 두 사람의 신형이 사라졌다. 저와 검을 맞대고 있던 이가 사라지는 바람에 파이겐이 엎어질 뻔했다.
“순간 이동 마법……?”
마법은 대신전에서 못 쓰는데? 클로에와 미라벨은 경악하여 입도 눈도 닫지 못했다.
그때, 창고 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루카가 뛰쳐나오며 외쳤다.
“그거야! 클로에 갑옷에 한 것처럼!”
“그거?”
“……신성력을 전환해서 마도구를 작동시키는 회로를 라구 경이 개발했어.”
데메트리안이 짓씹듯 말했다. 라구의 기술을 활용했다는 것은, 정말로 마법사 길드의 누군가가 스칸다르 쪽에 붙었다는 이야기였다.
삑!
그때, 아까와 동일한 경보음이 다시금 울렸다. 데메트리안이 어금니를 빠드득 갈며 품에 넣어둔 것을 꺼냈다.
반구 모양의 나침반처럼 생긴 것이었는데, 그 안의 바늘이 그들이 있는 곳에서 대각선 위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방향이면…… 신전 뒤편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