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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156화 (156/189)

156화. 분기점: 겹그믐의 날 (3)

벌써 내일이면 주말이잖아, 클로에가 답답하다는 듯 내뱉는 말에 데메트리안은 얼마간 멎어 있었다.

“얘기……, 적당히 잘 됐어.”

적당히. 그래, 적당히였다.

데메트리안은 어제 루카미오노의 응접실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또 무슨 일을 부탁하려고 오셨어?”

2주 전, 다쳤던 클로에가 집으로 돌아간 이후로 처음 보는 루카는 퍽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맞았다.

그가 데메트리안을 대할 때 내어놓고 살갑게 구는 건 아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기꺼운 기색은 아니었다.

클로에를 대신전 손님방에 들여 치유한 일이, 대신전 내부에서 구설수가 될 거리였던 것일까.

“뭐, 아니라곤 말할 수 없네.”

“쫄기는, 부탁할 일이 없으면 너희가 나를 찾는 일이 있냐.”

……그런 건 또 아니었나. 피식 웃으며 차를 내는 루카의 낯을 살피며 데메트리안은 미간을 슬며시 좁혔다.

“지난번엔 정말 고마웠어.”

“그런 때 나 아니면 누가 있다고? 네가 고마울 게 뭐 있냐, 뭐…… 아주 없진 않겠지만.”

“한 번 더 고마움 좀 느끼자.”

“아후, 또 뭐야? 할망구가 웃으면서 조곤조곤 조지는 거, 너희들이 당해 봐야 해.”

문제가 아주 안 된 것도 아닌 모양이네. 데메트리안은 설핏 웃음을 흘렸다.

저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고티유 대신전을 책임지고 있는 대신관에 대해 저리도 허물없게 말하는 건, 단언컨대 교단 내에서 루카미오노 단 하나뿐이리라.

“이번 겹그믐의 날 말야.”

“어, 다음 주지.”

“그날 대신전을…… 감시할 일이 있어.”

“대신전? ……성소를 말하는 건 아니지? 그날 황자 오는 날이어서 우리는 성소에서 휴거하고 예배당 쪽은 황실에서 경비하는 것도 알고?”

“응, 알지.”

루카미오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제 죽마고우들의 방문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요즘 들어 그들이 무언가 의뭉스러운 용건을 갖고 오는 것이 꽤나 이상하던 참이었다.

저를 볼 때면 오물이라도 본 듯 콧잔등 찡그리는 그 재수 없는 새끼에 관해 자꾸 묻지를 않나, 뭘 하다 왔는지 제 신성력이 아니었다면 한 달은 꼼짝없이 앓아누웠을 상처를 달고 오지를 않나…….

그런데 이번엔, 대신전의 사제 모두가 성소에 머무르며 휴식하는 겹그믐의 날에 대신전에 잠입하게 해 달라니.

그게 그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소외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었다.

루카의 표정만으로도, 데메트리안은 그에게 설명이 필요함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어차피 루카에게 도움을 구하면서 모든 걸 털어놓으려고 다짐했던 일. 데메트리안은 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이게 뭐야?”

“스체르바뇰산 27년 위스키.”

“오오, 21년까지는 많이 봤는데.”

그걸 받아든 루카가 입술을 오므리며 신기해했다. 저 위스키가 유행의 최절정이던 때도 제가 구해 왔더니 엄청 반가워 했었지. 그 낯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데메트리안은 슬며시 입을 열었다.

“3년 뒤에 유행할 거야. 스체르바뇰에서 캔달우드 공녀와의 혼사를 성사시키겠다며 진상한 것 중에 있었거든.”

“……3년 뒤?”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는 루카의 얼굴에는 웬 답잖은 말장난이야, 라는 문장이 떠오른 듯했다. 하지만 말하는 이가 그 딱딱하기 그지없는 제 친우에,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꽤나 진지하였다.

“좀 이상하게 들릴 텐데 말야.”

데메트리안의 낯선 기색에 루카가 마른침을 삼켰다.

“3년 뒤에, 나는 네가 궁금해하던 이 위스키를 갖고 여기에 와서, 우리 저택에 들어와서 지내게 된 정혼자랑 사이가 안 좋다고 털어놓았어…….”

“……과거형?”

그렇게 데메트리안은, 제가 겪은 주신의 신비에 대해 천천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네 몸을 빌어 주신께서 어떤 신비를 베푸신 것 같다는 것과 그렇게 돌아온 제가 하고 있는 일들, 그리고 겹그믐의 날에 클로에와 하려는 일들…….

“그래서 루카가, 납득한 것 같았어?”

“……반쯤은. 주신의 목소리를 받는 일이 제 의지가 아닐 때도 있다고 하잖아. 그런 일이 있을 수는 있겠다고 받아들인 눈치였어.”

“그래, 우리가 보여 달라고 하니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하기도 했지.”

루카가 주신의 목소리를 받기 시작한 것은 그가 성국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얼마 안 돼서였다.

보통은 6년의 아카데미 과정을 거치고서 사제 서품을 받을 때나 그 신성력의 양에 따라 겪을까 말까 한 일인데, 한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거대한 신성력을 보유한 루카에게는 아카데미 시절부터 종종 있던 일이라는 모양이었다.

“그럼, 뭐래?”

“확신이 필요하대. 지난번에 우리가 사적인 일로 손님방에 머무른 게 조금 곤란했던 모양이야.”

“……천하의 루카미오노에게 곤란한 것도 다 있고.”

긴장감을 떨치려는 듯 클로에가 애써 이죽거렸다.

“게다가 그게 실은 교단 내에 권세 있는 신관이 부정을 저지르리라는 예측을 전제로 한 거니까……. 아무리 루카가 차기 대신관으로 내정돼 있다지만 막무가내로 굴 수는 없는 일이겠지.”

“대신전에 우리가 가는 걸 미리 알려야 하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혹시 들킬 경우를 고려하자면.”

클로에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작게 오므려진 입술, 탁자 모서리 어드메에 붙박인 시선, 어슴푸레 좁혀진 미간, 쉬이 깜빡이지 않는 숱 많은 속눈썹……. 생각에 빠진 그녀의 낯을, 데메트리안은 얼마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런 모습에 매번 새삼스레 두근대면서도, 어찌 그리 늦게야 제 마음을 깨달았던 걸까.

이제라도, 이제라도 기회를 얻었으니까…….

데메트리안을 설핏 웃으며 수백 번은 한 다짐을 다시금 머릿속에 새겼다.

“주말 중에 다시 연락을 주겠대. 주신의 응답을 기다려 보겠다고.”

***

고티유 대신전의 사제들은 루카미오노의 기행에 자못 놀랐다. 그것이 기행이라 이름 붙을 수 있는 것은 그가 루카미오노여서지만서도.

“오늘도 기도실에 있다고?”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건지.”

“철이 들었나?”

루카미오노는 신성력깨나 있는 신관들처럼 목이 뻣뻣하지 않으면서도 경박하지도 않아, 평사제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와중에 사교계 행사는 꼬박꼬박 참석하되 새벽 기도나 성서 강독과 같은 사제들의 기본 일정에는 번번이 불참하여 시샘을 사기도 했다.

그런 루카미오노가, 벌써 사흘째 기도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또 안 드셨어?”

“응, 밀 빵이랑 우유면 간단히 드실 수 있으니까 괜찮겠지 싶었는데…….”

루카미오노 사제님은 신전 고아원에서 기거하는 급사 어린이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그의 기행에 관한 소문을 들은 아이들은 끼니때마다 제 몫으로 나온 빵을 루카미오노 사제님 드시라고 기도실 문 앞에 챙겨 두었다.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유독 무른 그였지만, 그리고 아이들이 다녀가는 기척을 모를 리가 없었지만, 루카미오노는 그럼에도 사흘 동안 기도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제라도 철이 들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또 무슨 수작질은 아닌가 걱정해야 할지.”

첫날은 웬일인가 싶고 둘째 날은 이상하다 싶었지만, 셋째 날이 되니 심상치 않았다.

루카미오노의 행적에 대해 늘 모르쇠로 일관하던 신관들도 어느덧 그의 기행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안톤미오노 형제님.”

“……뭐, 별 뜻이야 있겠습니까. 올해 주신의 목소리를…… 받는 영광도 입었으니, 응당 깨달은 바가 있는 게지요.”

“안톤미오노 형제님께서는 참 너그러우십니다.”

“대신관께서는 도대체 저런 허랑방탕한 이의 어디가 마음에 드셔서.”

“그나저나, 어딘가 편찮으신가요? 안색이 영 좋지 않으십니다.”

안톤미오노를 따르는 하급 신관들이 걱정스런 낯을 보였다. 예전보다 해쓱해진 얼굴, 조금 우묵해진 듯한 눈 밑, 거칠어진 피부 같은 것이 이전의 인자하고 고결한 안톤미오노와는 사뭇 다른 인상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마음고생이 심하시구먼, 저 근본 없는 사제 놈이 오기 전만 해도 차기 대신관 자리는 안톤미오노 님의 것이었는데.

하급 신관들의 낯에 그런 동정심이 짙게 깔려 있어, 안톤미오노는 울컥하는 마음을 꾹꾹 눌러 내려야만 했다.

“요 며칠 겹그믐의 날 준비로 골치를 썩였더니 얼굴에 티가 났나 봅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이제는.”

“아이구, 정정하신데요. 황실에서 다 준비하는 일을 다 걱정하시고요.”

“역시 대신전은 안톤미오노 형제님 없으면 굴러가지를 않습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하급 신관들이 입에 발린 소리를 속살거렸다. 이제는 비참하기만 한 그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안톤미오노는 사흘째 열리지 않는다는 기도실 문을 바라보았다.

‘저치가 무엇을 알아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저 천둥벌거숭이를 보는 것도 이제 며칠 남지 않은 일이다. 그게 하필이면 대신관보다도 주신의 목소리에 가까운 이라는 루카미오노인 게 걱정스러웠지만, 그에게는 이제 남은 시간도,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늦었어. 이미 다 늦고 만 일이야.’

그리 생각하며 말아쥐는 그의 손끝이 사정없이 떨렸다. 벽을 등지고서 뒷짐을 지고 있어,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

루카의 연락을 기다리는 주말에도 데메트리안은 착실히 라크루아의 타운하우스를 방문했다.

간만에 맞이한 휴일인 빛의 날에조차 데메트리안을 제집에서 마주하게 된 에티엔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편으로 납득 가는 구석도 있다고 생각했다.

‘역시, 로이가 다친 게 퍽 충격이었던 게지.’

제 마음속에서 그의 평가를 조금 수정해야 할까. 제가 수정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그 대단한 정혼은 깰 생각이나 있으면서 저러는 건지.’

내어놓고 클로에에게 푹 빠진 티를 내는 걸 보면 무언가 계획이 있겠지 싶으면서도, 그 계획이란 것이 선뜻 짐작 가지 않으니 걱정스러운 것이었다.

‘……요즘 동분서주하는 걸 보면, 무슨 공적을 세워서 공작님께 인정을 받으려는 것 같긴 한데.’

그날 만나 본 분리 독립파의 사내를 미끼로 쓰겠다며 가석방하라기에, 이해는 안 갔지만 황제의 나팔에 따라 분부를 받들었다.

하지만 결국 스칸다르의 왕자는 귀국하고야 말았고, 데메트리안은 인신매매 사건에서 잠시간 손을 뗀 것처럼 보였다.

‘다른 공적을 노리는 걸까? 수사가 지지부진하긴 하니까. 마법사단에서는 납치된 이들을 제도 밖으로 빼돌렸을 만한 마력의 운용이 감지된 적이 없다는데, 제도가 아무리 넓어도 그렇지 이렇게 찾기 힘들 일인가. 어디 귀족가에서 손을 쓴 게 아니고서야…….’

꼭 닫힌 소응접실 문 앞에 서서 에티엔은 곰곰 생각에 잠겼다. 공적을 세워 원하는 이와 미래를 약속할 수 있다면, 퍽 즐거운 일일 거였다. 요즘 들어서는 그리 구는 데메트리안이 조금, 부러운 것도 같았다…….

똑똑.

노크하고서 문을 여니, 대화하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뚝 멎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퍽 다정하게 울리던데.

왜 내 집에서 훼방꾼이 된 느낌을 느껴야 하는 거지, 자조하면서 에티엔은 예의 바른 목소리를 내었다.

“제가 오늘 간만에 집에서 만찬을 하게 되어서 요리장이 실력 좀 발휘한다는데. 소공작께서도 함께 드시고 가시겠어요?”

그 말에 데메트리안은 즉각 클로에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 시선을 주고받는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퍽 훈훈하여, 에티엔은 제가 모르는 새 둘의 관계가 급격히 진전되었음을 눈치챘다.

‘로이도 저러는 걸 보면,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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